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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송(治送)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농막 창밖은 봄비. 처마 밑 흔들의자에 하릴없이 나앉는다. 빗방울들은 양철 지붕을 마치 중저음의 타악기를 연주하는 듯하다. 어린 날 이웃마을 ‘굿바들’ 나의 친구,‘희윤’이는 이처럼 양철지붕을 토닥이는 빗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고 말한 적 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이내 잠들곤 했다는데... .
‘누군가가 나더러 예술가가 아니랄까봐서? ’
어느새 나는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1891~ 1968)의 연시조인 <비>를 음송(吟誦)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국정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그 시조를 줄잡아 50년 넘은 이날까지, 그야말로 달달 외우고 있다는 것이, 내가 생각해도 신기한 일.
비
이병기
짐을 매어놓고 떠나려 하시는 이 날
어둔 새벽부터 시름없이 내리는 비
내일도 나리오소서 연일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내리는 비
저으기 말리는 정은 나보다도 더하오
잡았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둔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오.
내 감흥에 관한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하자. 참말로, 그분은 국문학자답게‘치송’의 개념과 문장수사법상 ‘돈오법(頓悟法)’을 너무도 잘 아시고, 위 시조에 정교하게 적용했다는 사실. 놀랍기만 하다. 30여 년째 수필작가 행세를 하는 나는 혀가 내둘릴 지경이다. 기술상(記述上) 순서는 뒤바뀌었지만, 그분이 사용한 돈오법부터 더듬어보자. 바로‘갑자기 꿈을 깨니’다. ‘돈오(頓悟)’다. 돈오란, 불가(佛家)에서,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듯 깨달음 얻음’을 뜻한다. 그분은 ‘꿈’이라는 안전판(安全瓣)을(?) 교묘히 이용했다. 사실 이처럼 ‘꿈’을 이용한 작품은 더러 있다. 춘원 이광수의 단편소설 <꿈>도 그러하고 나의 수필작품, <청년 미취업자>와 <고드렛돌>도 그러하다. 공히 꿈속 이야기다.
진실로, 내가 주목하는 위 시조의 주요부분. 이병기는, 시조시인 이병기는 ‘치송’의 개념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치송, ‘행장(行裝)을 꾸려 즉, 짐을 싸서 손님 등을 보내는 일'을 일컫는다. 우리 안동권 어르신들은 전국 온갖 잡것들이(?) 모여 사는 서울 촌놈들의(?) 말투와 언제고 달랐다.
“참, 자네 슬하(膝下)에 자제분들이 몇이었더라? 자제분들은 모두 ‘치송’했는감?”
그런데 서울 촌놈들 말투는 한결같다. 딸을 시집보내는 것도 출가, 아들 장가들이는 것도 출가라고 뭉뚱그려 말하곤 한다.
이 대목에서 아니 더듬고 넘어갈 수 없는 어휘들이 있다.
‘출가(出嫁)’는 처녀가 시집을 감을 뜻하는 말, 출가‘(出家)’는 ‘1.집과 세속의 인연을 떠나 불문에 들어 수행 생활을 하다 2.집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하다 3.집을 떠나다.’등을 나타내는 말, 출가(出稼)’는 ‘일정한 기간 다른 곳에 가서 돈벌이를 하다’를 이르는 말, ‘출가(出駕)’는 가마나 수레를 타고 나가는 걸 뜻하는 말. 아울러, ‘가출(家出)’은 어버이 속을 썩이며 무단으로 집 나가는 일, ‘출가(출家)’는 위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집과 세속을 떠나 불문 등에 들어 수행’하는 일. 그러함에도 상놈들은(?) 마구잡이식으로, “아들들, 딸들을 다 출가(出家)시켰다.”식으로 말하곤 한다. 내 여담은 여기까지.
나의 이야기는 다시금 ‘가람’의 위 연시조로 돌아간다. 그분, 가람은 (사랑하는 이를)‘치송’하고자 짐을 매어두었다. 아니, 그이가 작정을 하고 짐을 메어두었다. 그 고운 이는 비가 그치면 곧 떠나겠다고 한다. 참말로, 먼 길 떠나시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놓아주기는 싫은데... . 안타깝다. 애절하다.
치송,치송,치송. 나도 지금 짐을 매어두고 있다. 내 사랑하는 그를 곧,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떠나려 한다. 본디 사랑은 깊어갈수록 그 괴로움 또한 깊어가나니.
아,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다. 거기까지는 내 참을 수 있다. 견딜 수 있다. 그런데 저 ‘짐 덩어리’ 과년(過年)한 두 딸년들 치송을 생각하면... .
(창작 후기)
사실 작가는 당해 작품을 적기에 앞서, 작품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챙기게 됩니다. 하더라도, 이번 글은 최소의 재료로 작품을 만드는, 이른바 ‘미니멀리즘(minimalism)’방식을 채택했습니다. 미니멀리즘이란, 장식적인 요소를 일체 배제하고 표현을 아주 적게 하는 문화 예술 기법이나 양식을 일컫습니다. 현대미술에서 ‘저드’가 조각조각 판자로 최초로 구현한... .
(후일담)
그리고 며칠이 지난 다음 나는 위 글의 당사자한테 이런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 '치송'이란 제 글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어요.
치송,치송, 치송. 나도 지금 짐을 매어두고 있다. 내 사랑하는 그를 곧, 눈치채지 못하게 떠나려 한다. 본디 사랑은 깊어갈수록 그 괴로움 또한 깊어가나니.
나머지는 님께 숙제로 남긴 것인데요, 그 동안 띄워드렸지만 채 읽으시지도 않은... .
그 동안 제 e메일에 메시지 내지 암시 다 남아 있어요.
산더미처럼 수북 쌓여 있을 텐데요.
그 e메일의 내용만 제대로 해독한다면, '잉카의 결승문자'를 해독하듯, 그 내용만 충분히 해독한다면,
'수필학 박사감'일 텐데요.
오, 행복했어요. 저는 또 다시 길을 나서요. 언제고 외로웠던... .
제 그림자가 너무 길게 남아서도 곤란할 텐데요.
뒷날, 먼 뒷날 저를 많은 이들한테 자랑스레 말씀하셔도 되어요.
'정말 그는 문학을 사랑했고, 나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이라고요.
감사해요. 은둔의 수필작가 윤근택으로부터>
그런 다음, 작가는 자신의 휴대전화기를 조작하여 그의 전화번호를 '수신거부'로 처리하였다.
그 다음에 펼쳐질 장면은 당사자인 나도 모르겠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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