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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老獪)함’에 관해수필/신작 2017. 12. 29. 05:08
‘노회(老獪)함’에 관해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우리 속담에,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다. ‘겉으로는 위하여 주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해하고 헐뜯는 사람이 더 밉다’는 뜻이다. 이에 해당하는 영문(英文)은, ‘He's[She's] a wolf in sheep's clothing[그는(그녀는) 양의 가죽을 쓴 늑대다].’이다.
나는 환갑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위 속담에 해당하는 일을 퍽이나 많이 경험하였다. 그 또한 ‘내 탓’이긴 하지만... .
사반세기 ‘KT’라는 이름난 통신회사에 근무할 적이다. 한 번은 어느 시골 전화국에서 총무과장을 맡고 있었다. 총무과장이란 자리는, 간부직을 제외한 전직원이며 노조원인 이들을 잘 관리해야 하는 임무를 띤다. 개차반인 수장(首長)이며 나와 동급 계급인 전화국장과 노조지부장 사이에 알력(軋轢)이 생기자, 노조지부장이 속된 말로 ‘꼭지가 훽 돌려’ ‘노사 가협정(안) 찬반 투표’에서 사측이 원하지 않는 ‘반대’쪽에다 몰표토록 하되, 전국 사업장 가운데에서 꼴찌가 되도록 행사하였다. 그 불똥은 내가 옴팍 뒤집어썼다. 그러는 게 바로 ‘독박’이다. 나는 정기 인사철이 아님에도, 쥐도 새도 모르게 보직도 박탈되고, 저 낯선 ‘예천’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랬더라도 ‘cool’하게, 운명으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과장 자리는 빤한데 ‘과장 과다 승진’으로 공급과잉이 되자, 새로 오는 국장놈(?)의 자식들은 나를 계속 밟아댔다는 거 아닌가. 넘어진 놈을 일으켜 세우기는커녕 더 밟아대더라는 거. 또, 물에 빠진 놈을 건져주기는커녕 더 물 속으로 밀어 넣더라는 거. ‘상추밭에 똥 눈 개는 저 집 개!’라는 식으로. 이를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마녀사냥’. 그때부터 한직(閒職)이 아닌, 비보직과장으로 지내다가 명예퇴직을 감행하였다. 사실 그 일은 나한테 전화위복(轉禍爲福)이었다. 내가 비보직 과장으로 지내는 동안, 당시 ‘핫 이슈’였던 휴대폰 판매실적을, 거의 기적에 가까우리만치 행하였다. 혼자서 1년 동안 500여 대를 판매하였고, 내가 수령한 판매수당이 30,000원 X 500대 = 15,000,000원에 달했다. 나는 그 피눈물 묻은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고, 그 돈을 종잣돈 삼아 지금의 ‘만돌이 농원’ 토지를 샀던 게다. 모르긴 하여도, 당시 평당 2,3만원에 불과했던 800여 평의 토지가 평당 15만원 내지 20만원은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報償)을 받은 셈이다. 뿐더러, 당시 당해 전화국 직원들은 나 덕분에‘휴대폰 판매’의 멍에에서 벗어나 ‘룰룰랄라!’ 했던 것이고.
최근에는 아주 사세하나마 나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긁어댄 어느 노회(老獪)한 아파트 경비반장이 있었다. 이 직장 끝자락에서 생각해보니, 그 영감탱이는 ‘면종복배(面從腹背)의 달인’ 같기도 하고, ‘전기주임’ 자리에서 타의(他意)에 의해 떠나는 나의 등 뒤에다 비수(匕首)를 꽂는 듯도 하고. 그이야말로 ‘때리는 시어미가 아닌 말리는 시누이’인 듯하다.
참, 내가 위에서 ‘老獪’라는 어휘 하나를 흘려놓았다. ‘늙고(노련하고) 교활함’을 뜻한다. 다시 ‘-獪’를 파자(破字)해보면 흥미롭다. ‘개[犭]가 (모여) 수군덕대는 꼴’이 아닌가. 내일 모레면 나는 이곳을 뜰 텐데, 나에 관한 뒷담화가 얼마나 또 많을지.
내 아내를 비롯한 지인들은 나더러, 너무 솔직하고 순박한 게 탈이라고 늘 안타까이 여긴다. 속을 마치 투명인간인양 드러내지 말라고도 하곤 한다. 그러나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하였으니, 60여 년 체질화된 게 쉬이 바뀌지 않는다. 나의 무지함이여, 나의 무식함이여!
노회한 족속들에 관한 이야기를 덧보태면서 두서없는 이 글을 줄이고자 한다. 본인의 수필작품 ‘툰드라(tundra)에서’의 한 단락이다.
<사랑하는 당신,
그런데 비해, 누[wildbeest]들은 정말 한심한 녀석들이었어요. 당신과 함께 여행했던 그곳, 탄자니아의 세렝게티국립공원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마치 ‘대상(隊商)의 행렬’처럼 떼지어 달려가던 ‘누’들. 그 녀석들은 의리도 의협심도 전혀 없었다고요. 그저 덩치만 멀쑥했지, 정말 허깨비였어요. 나름대로 뿔들도 달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쳐먹는 문제에만 몰두하여 건기(乾期)를 피해, 풀이 돋은 곳으로 달려갈 뿐이었어요. 그렇게 보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던 ‘누’들. 갈증이 나니까 다들 어떻게 하던가요? 혼탁한 호수를 만나니 서로 눈치만 보지 않던가요? 왜? 그곳, 우기를 만나 고인 물에는 악어들이 우글거렸으니까요. 악어들은 무려 일 년씩 굶어도 산다지 않던가요? 호기(好機)만을 기다리며, 그 길목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거에요. ‘누’떼는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란 명구(名句)를 너무나 잘 아는 족속들이었어요. 노회(老獪)한 누는 절대로 앞장서서 건너지도 앞장서서 마시지도 않더군요. 그것까지는 봐 줄 수는 있었어요. 어느 한 녀석이 악어떼의 습격을 받아 희생되는 그 순간이 문제였어요. 악어는 어린 누의 목을 물고 함께 몸을 용트림하여 누를 익사시키더군요.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그 광경을 멀거니 바라보고들만 있더라고요. 그 억센 발굽으로 한 방씩 걷어차기만 해도 악어가 물러났을 텐데… . 그 보다 더 서글픈 장면이 있었어요. 구사일생으로 호수가로 빠져나온 누는 다리를 그만 하나 잃고 만 거에요. 피를 철철 흘리며, 쩔뚝쩔뚝 동료들을 따라 그 먼 길을 가고자 했지만… . 그 누구도 보살펴주지 않았어요. 다들 뒤를 힐금힐금 돌아보고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을 재촉할 따름이었어요. 다시 말하지만, 정말로 한심한 족속들이었어요. 그 의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누만 모조리 잡아도 우리네 단백질 보충으로는 충분하겠더라고요. 그런데 비해, 누를 씹어대는 악어는 오히려 눈물을 흘리더군요. 하기야, 그것이 누를 씹어대느라 턱뼈가 빠지면서 생겨나는 생리적 현상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거짓눈물이나마 짓기라도 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