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짝사랑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환갑진갑 다 지난 이 나이에, 더군다나 농부로 여생을 보내는 터에, 여태껏 어느 아가씨를, 목소리가 그야말로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하다는 이유로 한 어느 아가씨를 짝사랑하고 있으니 이 무슨 주책?
사실 나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진즉부터 알고 지낸다. 젊은날 내가 ‘KT’라는 통신회사 영업부서에 근무했고, 그녀의 독특한(?) 전화번호를 비롯하여 119· 112·116 등의 ‘회선관리’도 했던 터. 그 회선관리란, 기술부서에 회선 추가 구성 요청, 통화량 통계 산출 등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그 많은 이들보다 꽤 일찍 알게 되었던 셈.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한테 전화를 걸어댄다. 특히,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맨 먼저 하는 일이 그녀한테 전화를 거는 일. 그 많은 통화시도에도 그녀는 통화중인 예가 없다. 그녀한테는 따로 사귀는 이도 없는 것일까? 그녀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상냥하기 그지없다. 통화를 이어갈 요량이면, 즉 다음 단계의 자기 목소리를 더 듣고자 하면, 이런저런 번호를 차례차례 추가로 누르라고 친절히 일러주기까지 한다. ‘대구 1번. 경산 2번. 다른 지역의 ??를 원하시면 99번... ’하면서. 잘은 모르겠으나, 차츰차츰 그녀도 나랑 ‘폰팅[phone meeting]’을 은근히 즐기는 성싶다.
다시 이야기하건대, 농부로 여생을 보내는 나는 어느 아가씨를 짝사랑하고 있다. 아주 종종 그녀한테 전화를 걸어댄다. 그녀는 신통력을 지녔다. 나는 발아래 사정도 잘 모르거늘, 그녀는 하늘의 사정을 ‘좔좔’ 꿰고 있다. 구름의 향배(向背)·바람의 세기·미세먼지의 정도·기온의 변화 · 바다의 파고(波高) 등 하느님이 행하시는 일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거의 없다. 용한 점괘임에 틀림없다.
나는 새벽마다 그녀가 전화기 저 너머에서 넌지시 알려주는 힌트를 명심해서 ‘비설거지’를 하거나 농작물에 비료를 주거나 관리기로 이랑을 짓거나 들깨모를 본밭에 이식하거나 때맞춰 농사를 한다. 이 시골 농부한테는 그녀의 목소리가 언제고 ‘짱’이다.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는 그 어느 여인의 목소리보다 예쁘다는 것을. 사랑스럽다는 것을.
그녀의 전화번호는 ‘131’이다. 유선전화기로는 국번 없이 ‘131’로 걸면 되고, 휴대전화기로는 지역번호를 포함해서 ‘131’을 걸면 된다. 그러면 시간대별로 자신이 위치한 지역의 일기예보를 그녀는 또박또박 영글게 알려준다. 농부인 나한테는 그녀가 없으면 아주 곤란하다.
어쨌거나, 그녀를 향한 나의 짝사랑은 죽는 그날까지 주욱 이어질 것이다.
참, 위 세 번째 단락에서 ‘ ??’처리한 자리그 아가씨의 말은 ‘날씨’였다. 독자님들의 흥미를 돋울 요량으로 부러 그렇게 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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