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무릇,꽃무릇,상사화(相思花)

윤근택 2022. 4. 4. 19:22

 

             

 

                                                 무릇,꽃무릇,상사화(相思花)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무릇’, 사랑은 영원한 거. ‘대체로 생각해보아’, 사랑은, 특히 남녀간의 사랑은 흔히들 영원하지 않다고들 하나, 영원한 거. 그가 선물한 그 어떤 사물이 있고, 그 선물로 하여, 때때로 그를 추억하게 되니까.

  내 ‘만돌이농장’ 농막 뒷산에는 고인(故人)들 유택(幽宅)이 십 여 기(基). 마을의 연로(年老)한 어르신들은, 그분들 고인들께서는 이미 100여 년 전 유골이 묻혔을 거라고 말씀하신 지 벌써 20여 년. 아내와 나는 그 봉분(封墳)마다에 들어선 참나무류 등 나무를 베어내고, 잔디를 새로 깔끔하게 입혀드리는 따위로, 온전한 그분들 포근한 유택으로 되돌려드렸다. 해서, 이젠 아주 친숙한 나의 이웃이다. 그런데 그 유택들 가운데에서 유독 하나. 그 분 유택에는 해마다 ‘무릇’이 봉분과 ‘벌(뻘)’에 유난하다. 그 특유한 색깔의 꽃과 ‘꽃 생김’. 이 봄날, 그분의 유택에 즐비한 ‘무릇’을 보다가 내 유년시절의 추억과 겹쳐져 이런저런 상상에 젖어들 줄이야!

  사실 그러했다. 우리는 그 ‘무릇’을 ‘물냉이’ 혹은 ‘물래이’라고 불렀다. 봄날 그 무릇을, ‘소꼴’을 캐면서 두 갈래 잎이 있는째로 잘도, 조심스레 캐곤 하였다. 그것들을 ‘꼴 다래끼’에 공손히 모셔왔다. 어린 우리는 그 ‘무릇’을, 먼 훗날 맞고픈 각시로 생각했다는 거 아닌가. 이 무슨 이야기냐고? 두 갈래의 잎을 지닌 무릇, 그 비늘뿌리가 쪽파의 뿌리처럼 생겨 먹은 무릇, 그 비늘뿌리가 ‘미인 여성형’으로 대변되는 ‘거꿀달걀꼴’보다 더 곱고 얼굴이 하얬던 무릇. 우리는 소죽 쑤는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장래의 각시’를 경쟁적으로, 그야말로 경쟁적으로 꾸며나갔다. 이글거리는 장작불에 은근슬쩍 그 무릇을 구웠다. 정말 이뻤다. 유들유들했다. 낭창했다. 향긋한 ‘살 내음’과 함께. 참말로, 그렇게 구워낸 무릇의 얼굴은, ‘거꿀달걀꼴’ 얼굴보다 훨씬 빼어난 미인이었다. 우리는 서로 으스대며, 그렇게 은근슬쩍 그 몸을 달군 각시를 치장해 주었다. 그 갈래 잎으로 머리를 땋아 주고, 각시한테 가는[細] 싸리꼬챙이로 비녀도 꽂아주고... . 정말로, 나중, 아주 나중에 그렇게 이쁜 색시를 맞고 싶었다.  이 '만돌이농원’뒷산에 누워계신 그분도 그러한 추억 때문에 그렇듯 무리 지어 무릇을 당신 묘역에 들어서도록 했을까? 그분도 유년시절 무릇으로, 지난날 나처럼, 유년시절의 나처럼 아주 이상적(理想的)인 각시를 아직도 그리워하는 걸까?

   “오, 지금의 나의 색시여! 이젠 할미가 된 나의 색시여! 혹여 이 글 읽으시더라도, 이렇게 말하는 나를 용서해주시길... .”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그 곳 정읍. ‘정읍수필문학회’ 카페에,‘카페지기’란 분이 나의 수필,‘조팝꽃’을 옮겨가서 싣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맺은 글.

 

  <(상략)

  그대 뜨락의 수수꽃다리가 보라색으로 피어날 적이면 이곳 산마을의 조팝꽃은 눈이 시리도록 희게 피어납니다. 수수꽃다리와 조팝나무의 꽃철은 같으니까요. 둘은 우리처럼 닮은 점도 퍽이나 많습니다. 그대는 보라색 오월을 기억하겠지요. 그대 향한 내 그리움은 언제나 조팝꽃처럼 새하얗고요. 오월에 우린 헤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오월은 조팝꽃 향기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대는 아주 먼 곳에 계십니다.

  그대 뜨락에 수수꽃다리가 피어날 테지요. 수수를 갈아야 할 절후임을 잊지마십시오. 수수와 조를 망태에 담아 메고, 머리에 수건을 질끈 두른 채 산자락 뙈기밭으로 나설 일입니다. 끝.>

 

   위 ‘조팝꽃’을 읽으신 어느 연세 많은 여류 수필가. 그분은 장거리 시외전화 걸어 와서 나직 한숨지은 바 있다. 후일, 그분은, 풍문에 의하면, 오랜 병마와 사투(死鬪)를 벌이다가 가셨단다. 그분 묘역에는 ‘조팝꽃’이 해마다 오월이면 필까?

  정읍,정읍. 그곳에는 위 ‘조팝꽃’의 주인공이 실제로 살았다. 그는 나랑 평생 ‘문학적 동반자’이길 서로 약속했다. 그는 나한테 자기가 사는 정읍의 ‘내장사(內藏寺)'에서 한 촉[數] 분양받았다며 낯선 식물을 선물로 보내 온 적 있다. 그게 돌이켜본즉, 30여 년 전. 그는 그 화초를 ’상사화(相思花)’라고, 동봉한 편지로 알려 주었다. 그때 그 한 촉을 내 ‘만돌이농원’ 둔덕에 정성스레 심어두었다. 그게 벌써 30여 년 째.

  오늘, 아내는 둔덕 화단에 서 있는 그 꽃 이파리를, 마치 참빗으로 머리를 쓰다듬듯, 자기 손가락 모두를 부려 빗으면서 말한다.

  “현지 아빠, 해마다 이 꽃 너무 이쁘게 피지 않던가요? 잎 지고 여름날에 외로 꽃대 올려 화려한 꽃 피우는 상사화(相思花)! 잎과 꽃이 서로 영영 만나지 못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 ‘상사화’!”

  남의 속도 모르고, 남의 속도 모르고... .

  풍문에 의하면, 그 상사화, 아니 선운사 꽃무릇 한 촉을, 그 꽃말 ‘이룰 수 없는 사랑’서신(書信)과 함께 선물로 부쳐준 그는 진즉에 이승을 떴다는데... . 그의 무덤가에는 상사화류인 꽃무릇이 피려나?

   무심한 아내는 남의 속도 모르고, 남의 속도 모르고, 선운사 꽃무릇 잎을 ‘참빗질’ 하고 있다.

 

창작후기)

 

  사실 작가는 당해 작품을 적기에 앞서, 작품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챙기게 됩니다. 하더라도, 이번 글은 최소의 재료로 작품을 만드는, 이른바 ‘미니멀지즘(minimalism)’방식을 채택했습니다. 미니멀리즘이란, 장식적인 요소를 일체 배제하고 표현을 아주 적게 하는 문화 예술 기법이나 양식을 일컫는다. 미술에서 ‘저드’가 조각조각 판자로 구현한... .

  덧붙여, 작가는 각 단락마다 ‘무덤가’에 제각기 사연으로(?) 피는 꽃을 상상하여 글 전체를 한 덩어리로, ‘일체의 한 덩어리’로 만들고 있음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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