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사고친 어느 역관(譯官)
크게 사고친 어느 역관(譯官)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때는 조선조 선조 시대. 명나라에 통역관 일원으로 나섰던 어느 인물. 그는 그야말로 ‘대형사고’를 내고 만다. 공금(公金) 300금을 생면부지의 홍등가(紅燈街) 기녀(妓女)한테 화대(花代)로 선뜻 주고 만다. 이미 위에서 내가 화대라고 말했으나, 정작 그는 그 기녀를 품지도 않은 채 쾌척한 돈이다. 나랏일로 나섰던 이가 그처럼 무모한 짓을 하다니... .
그날 밤 그와 그 기녀한테는 어떤 기막힌 일이 있었던지 알아볼 차례. 객고(客苦)를 풀고자‘청루(靑樓)’에 들른 그의 앞에 나타난 여인은 소복(素服)의 차림이었다. 괴이하다싶어, 그가 물었다. 그랬더니 여인이 글썽이며 대꾸했다.
“제 부모는 본디 절강 사람들이온데, 북경에서 벼슬하다 불행히 염병 걸려 돌아가셨어요. 나그네길이라 관(棺)이 여관집에 있지만, 제 한 몸뿐이라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낼 돈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리로 와서 제 몸을 팔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목메어 울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해서, 그는 그녀한테 장사지낼 돈 삼백 금을,
나랏일로 써야 할 그 큰돈을 선뜻 내어주려 한다. 정작 그녀를 취하지도 않은 채.
그녀가 은인인, 은인을 자처한 그의 이름을 거듭해서 묻는데도 말해주지 않자, 돈을 한사코 거절한다.
“대인께서 성명을 말씀해주지 않으신다면 첩 또한 ... .”
부득이, 그는 자기가 ‘홍씨(洪氏)’임을 밝혔다.
나랏일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귀국한 그. 당연히 공급횡령 내지 공금유용으로 여러 해 옥살이를 하게 된다.
한편, 그때 그 여인은 그 이후 팔자가 풀려, ‘예부시랑’ 석성(石星)의 후처가 되었다. 석성은 애첩의 그 아름다운 옛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예부시랑은, 조선의 홍 아무개의 의로움을 높이 여겨, 사신을 맞을 때마다 반드시 ‘홍역관(洪譯官)’이 왔는지 물었다.
당시 조선의 선조는 자신 재임 중에 기어이 풀고 싶었던 외교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종계변무(宗系辨誣)’. 종계변무란, ‘왕실의 계보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구체적으로는, 태조 이성계의 ‘정통성 없음’에 관한 중국의 기록 문제. 위 홍역관 이전에도 열댓 명의 사신이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아무도 허락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드디어 임금이 크게 노하여 교지를 내렸다.
“이는 역관들의 죄이다. 이번에 가서도 또 허락받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수석 역관 한 사람을 반드시 목 베겠노라.”
역관들 가운데에서 감히 가기를 원하는 이가 없자, 역관들이 서로 의논했다.
“홍역관은 살아서 옥문 밖으로 나올 희망이 거의 없지 않은가? 그가 나라에 빚진 돈을 우리들이 대신 갚아 주고 풀려 나오게 한 후 그를 중국으로 보내는 게 좋겠어. 설령 그가 실패하고 돌아와서 임금으로부터 목이 베인다하더라도 한스러울 게 없지 않은가?”
이에 홍역관도 기꺼이 허락했다.
선조 갑신년(1584년)에, 홍역관은 북경에 이르렀다. 조양문 밖에 비단 장막이 구름처럼 펼쳐 있었다. 한 기병(騎兵)이 쏜살같이 달려와서 홍역관이 어느 분이시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뒤쪽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예부의 ‘석시랑’께서는 공께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인과 함께 마중 나왔습니다.”
계집종 열댓 명에 에워싸인 부인이 장막 안에서 나왔다. 홍역관이 몹시 놀라 물러서려고 하자, 석성이 말했다.
“당신이 ‘통주’에서 어느 여인한테 은혜 베푸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아내의 말을 들으니, 당신은 참으로 천하에 의로운 선비이십니다.”
부인은 무릎을 꿇고 절하기에, 홍역관이 굳이 사양하자, 부인이 말했다.
“이것은 보은(報恩)의 절이오니, 당신이 받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석성은 홍역관의 임무인 ‘종계변무(宗系辨誣)’을 조정에 주선하여 흔쾌히 해결해주었다.
귀국길에 오른 홍역관 앞에 석성의 부인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자개상자 열 개에 각각 비단 열 필을 담아 주며 말했다.
“이것을 첩의 손으로 손수 짰어요. 공께서 오시기만 기다렸던 걸요.”
그는 한사코 사양하며 받지 않고 돌아왔지만, 깃대를 든 이가 압록강까지 와서 그 비단을 놓고 갔다. 비단 끝에는 모두 ‘보은(報恩)’ 두 글자가 수놓여 있었다.
홍순언의 능력은, 임진왜란 때 다시 발휘했다. 명나라에 원군(援軍)을 요청하러 ‘사신’으로 갔는데, 선조와 고관들은 그이한테서 반가운 소식이 오기만 기다렸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그를 믿고, 조선 정세를 파악했으며, 선조가 이여송을 만날 때에도 그가 통역했다.
대체, 그가 누구?
‘위키백과’는 그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홍순언(洪純彦, 1530년~1598년)은 조선 중기의 한어 통역관, 외교관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종계변무(宗系辨誣)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구원군 파병에 공을 세웠으며, 종계변무에 세운 공로로 광국공신 2등관(光國功臣二等管)에 책록되었다. 기방에 팔려온 남경의 호부시랑 류모의 딸을 구해준 인연으로 그녀의 남편이자 당시 예부시랑 석성의 전폭적인 신뢰로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시 명나라 군대의 파병을 이끌어냈다.
그의 일화는 정재숭의 동평위공사견문록과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옥갑야화 편, 이익의 성호사설 17권 임진재조 등에 부분적으로 전해지다가 1928년 정인보가 그의 행적을 기술한 당릉군유사징을 편찬하여 널리 알려졌다. 초명은 덕룡(德龍), 자(字)는 사준(士俊)·순언(純彦)이고, 호는 동고(東皐)이다. 홍겸의 서자이다. 한성부 또는 경기도 광주군 출신.>
일개 수필작가인 내가 더 보탤 이야기도 없다. 다만, 그토록 의협심이 많았고, 서얼(庶孼)이었음에도 자기가 처해있는 환경을 긍정적 에너지로 돌린 점을 존경 아니 할 수 없다. 한마디로, 그는 위인이다. 조선 대륙의 역사를 ‘훽’ 바꾼,‘ 기생집의 하룻밤’. 그 의로움을 생각하노니... . 사실 이 수필작가의 젊은 날에도 유사한 일이 있긴 했다. 저 ‘장호원(長湖院)’이란 곳. 대학생이었던 나는 고향에서 받은, 이른바 ‘향토장학금(부모님으로 받은 학비를 그렇게 말하곤 했다.)’을 어느 ‘술집 가시내’한테 몽땅 준 일도 있다. 그녀한테 볼에 뽀뽀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너무 이뻐서, 개심(改心)하여 힘들더라도 참답게 살라 하면서 그리하였지만... .
오, 홍순언 통역관이시여! 님께서는 당시 철딱서니 없고, 잘 되면 안내로 삼을 수 있겠다고 의협심 아닌 의협심을 보였던 대학생, 나와 달리, 소복(素服)의 그 기생한테 베푼 의로움이여! 천하에 의로운 선비시여! 위기에 처했던 조선을, 통역(通譯)을 통해 그렇듯 윤색(潤色)하셨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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