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음’은 곧 ‘얻음’
그 누군가에게, 그 무엇에게 미치지 않으면 왜 작품을 써요?
누구라고 밝힐 수는 없으나, 위 애독자님들 가운데에서 한 분이 이런 문자 메시지 보내오셨군요.
< 애초에 그대는 오로지 글쓰는 일하고만 사랑에 빠졌는데,여인이 무슨 소용?
다 지나가는 허깨비놀음일 따름.>
‘잃음’은 곧 ‘얻음’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대체, 그게 언제 이야기인가. 문득, 어떤 계기가 있어, 그때 일을 추억하고 있다. 나의 두번째 수필집, <이슬아지>의 1부 ‘외딴집’, 그 가운데에서도 맨 먼저 나오는 13편 연작 수필 ‘화투’, 그 가운데서도 3월 ‘벗꽃’에 있었던 글로 기억하는데... . 참, 나는 그때 의도적으로 ‘벚꽃’이라 하지 않고, 굳이 ‘벗꽃’이라고 소제목을 붙인 바 있다. 내 서재에는 이제 단 한 권도 남아있지 않은 그 <이슬아지>란 수필집. 인터넷 검색창에다 대고 키보드를 두드려 물어보았더니, 1999.11.20. 만든 것으로 정보가 뜬다. 셈을 하여보니, 2022년 지금 기준으로, 23년 전에 출간한 책. 내 곁에서도 그처럼 무심한 세월이 흘러갔더란 말인가.
본론에 접어든다. 그 연작수필 ‘화투’에서 계절적으로 3월은 ‘사쿠라(벚꽃)’ 그림으로 화투장에 그려져 있는데... . 당시도 요즈음의 내 마음 상태처럼, 어떤 열병(熱病)으로 인하여, 아내와 어린 딸 둘을 대구의 도심에 팽개친(?) 후 영양, 영양 가운데에서도 오지마을인 ‘압시골’ 의 어느 폐농가(廢農家)에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원(自願)한 직장 전근. 더 솔직해지자면, 나는 실연(失戀)의 아픔을 겪고 있었다. 아니, 사랑하는 이를 눈물머금고 포기할밖에 없는 처지였다. 회사에서 거저 주는 읍내 사원 아파트도 마다하고 그리하였다. 아궁이에 군불 때고, 양은솥 걸어 밥 짓고, 이불을 여러 겹 덮고... . 그렇게 지내면, 내 모든 고통 다 사라질 줄 알고 그렇게 24개월 여 지냈다. 화투장 1월에서 12월까지 그 48장에 나의 생활을 그대로 대입하였던... . 더 구체적인 내용은 본인의 수필, ‘세상을 바꾼 사물들’ 제 3화 ‘개구리’에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실 나는 멋모르던 문단데뷔 초기에 두 권의 수필집을 연거푸 낸 적이 있다. 그 두 번째 수필집, <이슬아지>의 맨 앞부분에 ‘화투’라는 수필을 실은 바 있다. 그 ‘화투’는 총 13편의 연작수필로 되어 있다. 화투장 가운데 12월 광(光)에 그려진 ‘우산 쓴 영감’이 실존했던 일본의 선사(禪師)이며, 그가 득도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고 적고 있다. 나는, 꽃피고 새우는 산속에서 온갖 유혹 참아내며 득도해나가는 그 선사를 떠올렸다. 내가 누군가가 버려둔 농막(農幕)에서 정확히 24개월 지내면서, 그 12개월의 화투장 그림에 내 생활을 대입해본 글이었다. 사실 그 글은 많은 애독자들과 문학비평가들로부터 두루 찬사를 받은 바 있다.
그러한데 그 ‘우산 쓴 영감’이 선사가 아닌 ‘오노노도후[小野道風, 894~966)’라는 서예가였음을 이 글을 적기 직전에 새롭게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서예가’도 도(道)의 경지로 따져 ‘선사’와 크게 다를 바 없으니, 내 두 번째 수필집 내용은 그대로 유효하다.
사건인즉 이러하다. ‘오노노도후’는 공부에 실패하자 하산하는 길이었다. 일본은 아열대성 기후라서 12월에도 비가 자주 내린다고 한다. 그는 비가 내리자 우산을 쓰고 하산하고 있었다. 그는 웅덩이 앞에서 발을 잠시 멈춘다. 개구리가 버들잎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따먹으려고 거듭거듭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저 미물(微物)도 실패에 굴하지 않거든, 하물며 인간인 내가... .”
그는 다시 산으로 올라갔고, 공부에 정진하였다.>
그때 영양에 은둔생활을 할 적에, 아침저녁으로 스쿠터를 타고 내 농막 앞 길을 지나다니는 이가 있었다. 키가 훤칠하고 늘 미소를 띠던 그 사람. 그는 ‘박박머리’였다. 읍내에 고작 조간신문 한 장 받으러 그렇게 나설 뿐이라고 하였다. 나는 호기심이 일어, 한 번은 그를 꼬드겨, 자전거가 탈났다는 핑계를 대며, 뒷좌석에 편승하여 내 농막까지 유인한 다음 ‘깡소주’를 함께 마신 적 있다.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아주 충격적이었다. 본디 그는 온전한 스님이 되고자 절간에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수행 중이던 그이한테 큰스님이 맡긴 임무는 온갖 허드렛일. 그 가운데에서도 냄새가 지독한 수채를 삽과 괭이를 써서라도 퍼내는 일. 그는 그 일을 하다가 그야말로‘뿅!’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거 아닌가. 수채를 퍼낼 때에는 그렇게 고약하던 냄새가, 며칠이 지나 ‘꺼덕꺼덕’ 바람과 햇볕에 마르자, 퍼낸 수채찌꺼기에서 냄새가 다 날아가고 더 이상 나지 않더란다.
그는 그길로 산문(山門)을 나섰고, 연고도 없는 영양의 압시골에, 내 농막보다 더 외진 폐농가에 홀로 산다고 하였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나는, 그가 사는 움막에까지 그의 스쿠터 뒷좌석에 앉아 함께 타고 가게 되었다.
참말로, 사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삭정이를 주워 군불을 때고, 생쌀로 연명하는... . 그때 나는 그가 볼세라, 밖에 나가 숨어서 마구 울어댔다. 그가 과연 그러면 깨달음을 얻고, 모든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서. 해서, 나는 그 두 번째 수필집 , <이슬아지>의 화투편 3월에다 굳이‘벗꽃’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와 나는 ‘벗’이라는... .
그로부터 햇수로 따져 23년, 아니 25년이란 세월이 흐름 지금. 나는 더 나아진 것도 없다. 얼마 아니 있어 70에 접어들 나이임에도 수양된 점도 전혀 없다. 인간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가도 그 본성은 아니 바뀌는 모양. 그는 살아있을까? 살아있다면 지금은?
하더라도, 하더라도 ‘잃음’은 곧‘ 얻음’이라는 그 하나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작가의 말)
이 글을 내 사랑했던 그분께 헌정한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