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그는 세조의 졸개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피할 길도 없었다. 그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였다. 의금부라면, 조선시대 특별사법 관청. 그는 그 관청의 하급 집행관이었던 셈. 그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고 ... .
사실 그에게 계통도에 따라 특명을 내린 세조는 조선 제 7대 왕이었지만, 성군(聖君) 세종과 내 고향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를 친정으로 둔, 어진 왕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사이에서 태어난 8남 2녀 중 차남인 ‘유(瑈)’이다. 대한민국의 그 많은 이씨들한테는 참으로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맞아죽을지언정, 이 이야기는 하고 넘어가야겠다. 이성계장군은 지키라는 나라는 아니 지키고, ‘4대 불가론’을 내세워 ‘위화도 회군’으로 한민족 최초로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을 세웠다. 이는 팩트이지 않은가. 그 이후 격변기를 많이 겪게 된 것도 사실이다. 부자간, 형제간, 숙질간 권력다툼으로 피비린내 나는, 민초(民草)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태를 퍽이나 일으킨 게 사실이다.
다시 이 글의 주인공 이야기로 접어든다. 그는 이러한 정변에 하릴없이 말려든다. 시쳇말로,‘조직이 강패’이니 어쩔 수 없어서. 그는 위 세종대왕 차남 ‘유’가 조카 ‘단종(端宗)’을 폐위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하여 저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낼 적에 호송했던 이다. ‘쪼작쪼작’ 앞서 걷는, 아니면 수레에 탄 17살짜리 노산군을 호위할 적에 그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속으로 이런 생각은 아니 하였을까?
‘차라리 왕손(王孫)으로 태어나지 않고 , 나 같은 범부(凡夫)의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이런 수모 겪지 않으실 터인데... .’
그는 노산군의 유배지인 영월에 도착하여 사방을 둘러보았다. 유배지로는 최적지. 그 어린 왕이 도망갈 수는 없는 요새. 그는 재차 왕명(王命)을 받들고 그곳 영월에 도착한다. 이번엔 사약(賜藥)이 손에 들려 있었다.
그는 차마 노산군한테 약사발을 내밀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그때 체념한 듯 노산군은, 몸종을 시켜, 숙부이며 정권을 잡은 세조의 명대로 사약을 순순히 받고 절명(絶命)한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청령포(淸泠浦)를 마주보는 강 언덕에서 비통한 자신의 심경을 읊는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곳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그가 대체 누구? 그가 바로 ‘왕방연(王邦淵)’이다.
‘인터넷 ㈜ 천재교육’에서는 위 시조에 관해 이렇게 저렇게 전한다.
‘임금과 이별을 슬퍼하며 그에 대한 충성심을 특정한 대상에 빗대어 표현. 갈래는 평시조, 시정시. 성격은 애상적, 감상적, 연군가. 특징은 냇물에 감정을 이입하여 단종과 이별하는 슬픔과 단종을 호송한 죄책감을 진솔하게 드러냄. 사대부의 서정성을 표현한 시조. ’충신연주지사(忠信戀主之詞).’
나이 칠십을 불과 몇 해 앞둔 나. 나는 왕방연 같은 충성심도 쥐꼬리만치도 없다. 그러한 역사인식도 없다. 다만, 다만, 내 잠시잠깐 사랑했던 그한테 본의 아니게 마음 아프게 했던 거, 그걸 가슴 아프게 생각할 따름.
내 ‘만돌이농장’을 휘감는 실개울이... .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흐르는구나).’
작가의 말)
이 글을 내 사랑했던 그분께 헌정한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