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75) - 빼어난 문학인이기도 했던 작곡가 -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75)
- 빼어난 문학인이기도 했던 작곡가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작곡가인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독일)와 더불어 빼어난 문장가이도 하였다. 그의 자서전 <회상록>은 음악인이 쓴 전기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들 양인(兩人)은 동시대 작곡가다.
잠시. 그에 대한 이야기는 미뤄두고, 리하르트 바그너의 화려했던 이력을 더듬고 넘어가자. 그는 작곡가 겸 지휘자 겸 극작가 겸 시인 겸 수필가 겸 문예 이론가였다. <나의 생애>란 자서전을 적어, 아내 ‘코지마’한테 헌정할 정도였다.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코지마는, 친구이자 장인인 작곡가 리스트가 어느 공작부인과 사귀면서 사생아로 얻은 딸.
다시 이 글의 주인공 이야기다. 그는 ‘전통적 서사시’가 아닌, ‘문학적 서사시’를 한 편 적게 된다. 자기가 적은 서사시에다 ‘표제’를 붙여, 교향곡 형식의 곡을 적게 되는데, 그러한 예는 이전 음악사(音樂史)에 전혀 없었던 일. 온 세상이 나중에 그의 작품 공연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나는 위에서 그가 적은 글을 ‘서사시’라고 감히 이름지었다. 사실은 그가 어떤 연유로, 마약을 과다복용하고, 자살을 기도해서 풀밭에 쓰러져, 행인들이 죽은 것으로 오인할 정도였다는데, 며칠간 망상(妄想)에 사로잡혔던 내용을, 의식이 돌아오자, ‘좔좔’ 종이 위에다 적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그 내용 전체가 그러한 분위기다.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야 애가 타는 말든, 내 사랑하는 그이야 애가 타든 말든, 작중인물의 이름을 아직은 밝히지 않으련다. 짐짓, 나의 글 마지막 문장까지 한눈팔지 말고 따라오라고.
1827년 25세였던 그는, 음악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부친의 뜻을 저버리고, 파리음악원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영국 셰익스피어 악극단의 파리 공연을 관람하러 나섰다. 오필리아와 줄리엣 역을 맡아 연기하는 여우(女優),‘해리엣 스미드슨’에 첫눈에 반하고 만다. 자기보다 무려 열 살씩이나 더 많은 여우. 사실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인터넷상에 올라있는 그녀의 실물사진을 보고서 나도 한눈에 반할 지경이었다. 특히, 장식한 머리와 오뚝한 코와 얇은 입술이 몽땅 그녀를 훔치고 싶을 만치 매력적이었다.
그길로 그는 상사병 수준으로 간다. 그 여우가 머무는 아파트 근처에 숙소를 잡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가 하면, 연애편지를 수도 없이 보낸다. 심지어 이듬해인 1828년에는 자신의 연주회에 그녀한테 초대장을 보내게 된다. 요즘 들어, 부쩍 사회적 이슈가 된 스토커(stalker) 수준. 사실 사랑하는 일에 관해서만은‘집념’과 ‘집착’이 어떠한 차이인지, 70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어쨌든, 위 그의 노력들은 모조리 퇴짜. 당시 인기절정이었던 그녀가 무명(無名)의 작곡가이며 젖비린내 나는 이라고 여겼을 것은 번연한 이치.
그는 이를 ‘보드득보드득’ 간다. 그는 멋진 교향곡으로 복수해야겠다고. 해서, 그는 그 이듬해인 1828년부터 <환상교향곡>을 적기 시작한다. 위에서 내가 이미 이야기하였던 그 망상의 글에다 곡을 입혀나간 셈이다. 그는 그 곡 ‘예제(豫題)’까지 붙였다.
‘ 실연한 젊은 예술가가 절망에 빠져 극약을 먹고 무서운 환상을 본다’
그는 제 1악장에다 ‘꿈과 열정’, 제 2악장에다 ‘무도회’, 제 3악장에다 ‘들의 풍경’이란 표제(標題)를 차례차례 과감히 붙여나간다. 당시까지 교향곡에 그러한 예는 없었다. 즉, ‘절대음악’이 신봉되어왔던 터. 물론, 그 내용들이 기괴한, 자기가 체험한 환상속의 장면들을 그린 것들이었다. 그렇게 작품을 이어가던 그. 그는 풍문에 그 잘나빠진(?) 여배우가 어느 남자 품으로 가버렸다는 ... . 해서, 그는 제 4악장을 곧바로 짓게 된다. 그 연인을 복수 살인하여 사형선고 받고, 단두대로 향하는 내용. 표제는 ‘단두대로 행진’.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교향곡에서는 전례 없는 제 5악장까지 마저 짓는다. ‘바르푸르가스의 밤의 꿈’이 바로 그것이다. 마귀들이 자신의 잘린 머리 둘레에서 희희낙락 춤을 추는... .
한편, 1829년 3월에는 ‘해리엣 스미드슨’이 속해있던 연극단이 파리를 떠남으로써 이 글의 주인공과 파리에서는 더 만날 기회가 없었다. 이 글의 주인공도 이 작품을 완성한 후 ‘마리 모크’라는 젊은 여류 피아니스트를 사귀며, ‘해리엣 스미드슨’을 기억에서 차차 지워나갔다.
1830년, 그의 교향곡은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5개 악장 전체에 면면 흐르는 연인을 나타내는, 클라리넷 ‘고정선율(idee fixe;이데 픽스)’. 그 선율은 그가 너무도 열망했던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임계점’에 이르는 선율. 그것은 아주 새로운 ‘음악적 연상기법’. 약간씩 악장마다 변화는 있으되, 그야말로 끝까지 그 고정선율을 이어나갔다. 청중들은 표제가 붙은 그 고향곡 공연에 열광했다.
그의 교향곡 공연이 거듭 인기를 얻어가자, 1832년에 파리 공연 때에, 그의 지인들은 그 잘나가던 여배우를 부추겨 공연장에 초대하게 된다. 정작 그때에 그는 이미 마음을 다스렸기에, 손수 초대장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청중석에 앉은 그녀는, 그 놀랍고 기괴한 교향곡이 자신을 모델로 적은 작품임을 그제야 알게 된다. 그녀는 마음의 문을 열고, 그의 아내가 된다. 양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33년 결혼.
이제야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 이 글 주인공을 소개해도 되겠다. 적어도, 이 문장까지는 호기심 등의 덕분으로, 한눈팔지 않고 따라왔을 테니까. 그가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ilioz, 1803~1869, 프랑스)’다. 그가 적은 교향곡은 <환상교향곡>이다. ‘어느 예술가의 생애와 에피소드’란 부제가 붙은 곡이다. 음악평론가들과 작곡가들은 그의 <환상교향곡>이 음악사적으로 여러 업적을 남겼다고 말한다. 위에서 이미 이야기하였지만,‘(클라리넷에 의한 여인의) 고정선율’ 적용, 표제적 성격으로 하여, 그와 동시대를 살고 간 ‘프란츠 리스트’가 창시한 ‘교향시’예고편(사실 프란츠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19편은 1839년 이후 주욱 적었다.), 대규모 관현악의 혁신적 악기편성 등. 덧붙여, 프란츠 리스트와 바그너 등에도 큰 영향을 끼친 ‘뮤직 드라마’. 그는 표제음악의 개척자로 일컬어진다.
이 글을 적는 내내 배경음악으로 그의 <환상교향곡> 전곡을 제 5악장까지 흘려놓는데... .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는 궁금하지도 않을까? 그때 결혼한 두 양반의 결말이 어떠했을까 하고서. 한 마디로,‘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되었다. 그들은 빚으로 말미암아 ‘환상’이 쪼개지기 시작하였다. 특급 히로인이었던 그녀는 공연 실패에다 ‘체중 불어남’으로 여주인공에서도 밀려나고 인기도 바닥 신세. 대신,‘베를리오즈’는 날이 갈수록 그 작품에 힘입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에, 30대의 남편과 달리, 이미 40대 중반에 이른 ‘해리엣 스미드슨’은 남편한테 집착하게 되고, 의부증 증세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남편은 그녀를 차츰 멀리하게 되었다. 그는 스페인 출신, 여가수 ‘마리 레치오’를 사귀게 된다. 사실 인터넷에 올라있는 그녀의 외모는 내 눈에는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던데... .
‘해리엣’은 알콜중독자가 되고, 결혼한 지 10여 년 만에 결국은 이혼한다. 그녀는 1854년 나이 52세 무렵 쓸쓸하게 죽었다. 사실 그녀는 이혼 후 숨을 거두기 전에도 이미 심장병으로 쓰러진 적 있다. 이혼했음에도, 이 글 작중인물은 치료비며 간호비며 온갖 걸 일체 부담하며,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재혼을 하지 않고 인간적 도리를 지켰다고 한다.
내 이야기가 도대체 두서가 없다. 여생의 ‘베를리오즈’가 33세의 아들이 황열병으로 죽는 등 얼마나 가정사로 불행했는지 등에 관해서,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는 윤 작가의 글이 모자라는 부분을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채워서 읽어주시길 간곡히 바란다. 대신, 이 수필작가 윤근택이가 님들께 드릴 메시지는 분명 하나 남아 있다는 것을.
“예술가를, 예술가의 작품을 도덕적 잣대로 는 절대로 재지 마시오. 때로는 유치할지라도... .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천형(天刑)’으로 여기며 예술혼을 불태웠다오. 불태운다오. 나머지는 독자들, 청중들 등 당신들의 몫이라오.”
작가의 말)
‘자료 챙김’은 몇 몇 날. A4용지에 ‘4B 연필’로 적은 게 20여 장. 완전히 나의 것으로 소화함. ‘정명훈’이 지휘하는 그의 교향곡도 끝까지 수차례 들음. 몰두 내지 몰입.
그리고 ‘쓰기’는 잠시.
윤 수필작가는 5,000여 편 글을 써오는 동안, 미리 알아서 쓴 글 거의 없음. 쓴 후 관련된 ‘토막 지식 ’얻었음. 그것이 줄잡아 5,000개. 왜? 내가 쓴 글이 그 정도 편수이까.
그리고 이 글도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그이한테 (가상의 인물임.)바쳐요. 참, 참, 저 스스로 또 삭발했어요. 거울을 앞에 두고, ‘바리깡’으로 머리 손수 다 밀었어요. 이는 ‘심경의 변화’겠죠? 또 다른 ‘다짐’이겠죠? 완성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따름인 걸요. 이 ‘농부 수필가... ’를 이어가도록 한 데는 님의 역할이 커요. 님은 ‘모티브’를 준 거에요. 제한테 글 쓸 수밖에 없는, ‘동기(動機)’를 주는 분이시까요.
한 번도 뵈온 적 없으나, 그 작은(?) 품에 안기고 싶어요.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