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76) - 예술가의 토양(土壤)은 -
오전에는 객지친구 '태oo'의 도움으로,
그가 운행하는 트랙터로 밭 세 뙈기 1,000여 평 다 갈았어요.
호주의 효자인 '하우더'가 자기 부친의 수고를 덜어주려고
인류 최초로 고안한 그 '로터리식 쟁기'가 여러 날 달린 그 트랙터로 말이지요.
곧 장마가 온다는데,
들깨, 참깨, 메주콩 등을 이식해야 할 테니까요.
부디, 아름다운 나날!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76)
- 예술가의 토양(土壤)은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대학시절, 전공필수과목 가운데에는 ‘토양학(土壤學)’도 있었다. 모든 작물은 토양의 지배를 받으며... .‘토양’은 ‘흙’이나 ‘땅’의 개념과 사뭇 다르다. 토양은 어느 작물의 생애를 좌우하는... .
자, 작곡가들한테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나름의 독특한 토양이 있었으니... . 이번에는 자신들 부친들의 지나친 의욕으로(?) 인하여, 유소년시절부터 혹사당한(?) 작곡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 클라라, 프란츠 리스 등이 그러한 이들이다. 그들은 공히 자기 부친들의 극성으로(?), 유년시절부터 음악계에 데뷔하여, 각국으로 음악여행을 떠나는 등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잠시. 그들이 그처럼 해외 여러 나라를 돌고 돌아도, 끝내는 자기 고국의 독특한 선율에 귀의(歸依)하게 되었다는 점도 유의할 만하다.
러시아 -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제 1악장>, 폴란드 - 쇼팽의 <마주르카 제 7번 제 1악장>, 노르웨이 -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 ‘아침의 기분’, 체코 -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가운데에서 ‘몰다우’, 그리고 헝가리 - 프란츠 리스트의 < 헝가리 광시곡> 19곡.
위 예시에서처럼, 작곡가들은 저마다 끝내는 자기 고국의 전통적 선율을 민족적 선율을, 자기 것으로 버무려 명작들로 남겼다.
이번에는 ‘프란츠 리스트’에 관한 이야기만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 들려드리려 한다.
그는 위에서 짝짓기 했던 대로, <헝가리 광시곡> 19곡을 남겼으며,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한 곡으로 꼽힌다.
그는 1811년에 헝가리 왕국의 관할구역 안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5세 때부터 피아노에 흥미를 보였다. 그는 8세에 작곡을 시작했다. 그리고 9세 대 피아니스트로 처음으로 공개연주를 하게 된다. 그의 음악적 재능이 비범함을 알아차린 아버지는 아들한테 피아노 레슨을 하게 된다. 1820년 그가 10세가 되던 해, 그의 부친은 아들을 데리고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게 된다. 그의 부친은 베토벤의 수제자인 체르니한테 아들을 맡겨, 피아노 레슨을 받게 한다. 한편, 빈 궁정음악 감독인 안토니오 살리에리한테서는 작곡을 레슨 받게 한다. 이는,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자기 아들 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을 뽐내기 위해 세계 도처에 음악여행을 했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소년 프란츠 리스트는 부친의 기획에 따라, 음악여행은 성공리에 이뤄진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쉴 새 없는 공연으로 인하여 피로감이 누적된다. 게다가, 그는 17세 무렵 제자와 사랑에 빠졌으나, 제자 부친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하여 그는 신경쇠약증에 빠져, 사망 부고가 신문에 실리는 해프닝까지. 그를 요양차 휴양지로 데려갔던 그의 부친은 그곳에서 장티푸스로 죽고 만다. 급기야 그는 무대기피증에 걸리고, 종교 관련 서적을 읽는 등 음악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가고 싶다고 모친한테 호소한다. 그의 모친은 들어주지 않았다. 뒷날 리스트는 그때 일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서커스단의 동물 같았어요.”
그가 28세가 되던 1839년 무렵, 그는 어린 시절 떠났던 고국 헝가리에 잠시 돌아오게 된다. 정작 그는 모국어도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르는 청년이었다. 그는 자기 고국에 머무르는 동안 자기 고국 민속음악에 눈뜨기 시작한다. 그가 헝가리 민요선율이라고 믿었던 그 고유한 선율. 실제로는 헝가리 중상류층 사람들이 작곡하였거나 헝가리 작곡가들이 작곡하였고, 집시밴드들이 연주했던 그것. 독특한 집시 음계와 자유로운 리듬, 그리고 직접적이면서도 유혹하는 듯한, 집시 춤곡 ‘차르다시(czardas)’를 바탕으로 삼아, 나름대로 곡을 덧입혀(?) 나간다. 그는 음악사(音樂史) 최초로, 그 일련의 작품들을 ‘광시곡(狂詩曲;랩소디)’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가 말했다.
“나는 환상적이고, 영웅적이며, 민족적인 성격이 강한 자유로운 음악 형식을 ‘광시곡’이라고 한다.”
그는 30대 후반부터 그 19편의 헝가리 광시곡 가운데에서 제 1번부터 제 15번까지 지었다. 그러다가 40여 년이 지난 말년에 이르러서는 제 16번부터 제19번까지 지었다. 그의 헝가리 광시곡들 가운데에서 제 2번과 제 6번은 아주 유명하다. 특히, 제 2번은 요즘도 많은 음악인들이 애연한다.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도 너무도 잘 아시겠지만, 그의 ‘헝가리 광시곡 제 2번’에 관해, 함께 다시 더듬어보도록 하자. 차르다시 춤곡의 성격이 그러하듯, 그의 위 곡은 ‘라산(lassan)’과 ‘프레스카(freska)’로 구성되어 있다. 느린 템포의 라산은 슬픔·애환·평화·우울의 기질. 프레스카는 격렬·야성·열정의 기질. 집시들의 성향이 그대로 반영된 춤곡이다. 이들 둘이 묘하게 어우러져 특유의 선율로 발전하고 묘한 쾌감을 준다.
리스트는 그 광시곡 제 2번을 피아노를 위해 작곡했지만, 피아노를 관현악적으로 취급하는 게 인상적이라고들 한다. 지금은 관현악 버전으로 자주 연주되기도 한다.
다시 내가 위 두 번째 단락에서 언급했던 이야기로 돌아간다. ‘작곡가들한테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나름의 독특한 토양이 있었으니... .’
프란츠 리스트의 대표작들 가운데에서 ‘헝가리 광시곡’이 들어 있다는 사실. 그가 당대의 ‘비르투오소(virtuos;거장)’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였고, 일화도 많이 남겼지만, 자기 고국인 헝가리의 정서를 빼고서는 ‘말짱 황!’이다. 가장 헝가리적인 작품이야말로 리스트의 작품이라면?
사실 리스트가 1848년 시작한 헝가리 광시곡 외에도 헝가리 무곡 ‘차르다시’로 유명한 작곡가들이 더러 있다. 1869년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제5번(사실 브람스는 그 곡을 창작한 게 아니라 길거리 음악인이었던 타인의 곡을 편곡했다는 게 정설이다.)>, 1870년 무렵 레오 들리브의 <무용 모음곡 ‘코펠리아’>,1904년 몬티의 ‘ <(바이올린, 만돌린, 마림바 혹은 피아노를 위한) 차르다시)>’ 등. 단지, 1878년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 바이젠; ’집시의 노래’란 뜻임.)>은 헝가리 집시무곡이 아닌 스페인 집시 무곡일 따름.
다시 엄연한 수필작가로 돌아와 데스크 탑 컴퓨터 앞에 정좌한 나. 사실 이 글을 적기에 앞서, 프란츠 리스트의 생애에 관해 자료를 챙겨 A4용지 30여 장 메모하였으나 다 접어두었다. 이미 그가 당대의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였고, 일화도 많이 남긴 걸 다들 잘 아시는 터에. 대신, 수필작가인 나는, 리스트를 비롯해 위에서 소개한 작곡가들이 하나같이 돌고돌아 끝내는 자신의 고국 민족 선율에 귀착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따름. 나는 고민한다. 과연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시골스러우며 가장 순진무구한 이야기가 뭘까 하고서. 나중에 내 죽은 다음 후배 수필작가들이, 내 두 딸들이 수필작가 윤근택의 대표작을 과연 내세울 게 있을까 하고서.
그리고 지난 호에 이어 다시 한 번 이 수필작가 윤근택이가 님들께 드릴 메시지는 분명 하나 남아 있다는 것을.
“예술가를, 예술가의 작품을 도덕적 잣대로 는 절대로 재지 마시오. 때로는 유치할지라도... .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천형(天刑)’으로 여기며 예술혼을 불태웠다오. 불태운다오. 나머지는 독자들, 청중들 등 당신들의 몫이라오.”
작가의 말)
‘자료 챙김’은 몇 몇 날. A4용지에 ‘4B 연필’로 적은 게 20여 장. 완전히 나의 것으로 소화함. 프란츠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제 2번>을 ‘거듭 듣기’함.
그리고 ‘쓰기’는 잠시.
윤 수필작가는 5,000여 편 글을 써오는 동안, 미리 알아서 쓴 글 거의 없음. 쓴 후 관련된 ‘토막 지식 ’얻었음. 그것이 줄잡아 5,000개. 왜? 내가 쓴 글이 그 정도 편수이까.
그리고 이 글도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그이한테 (가상의 인물임.)바쳐요. 참, 참, 저 스스로 또 삭발했어요. 거울을 앞에 두고, ‘바리깡’으로 머리 손수 다 밀었어요. 이는 ‘심경의 변화’겠죠? 또 다른 ‘다짐’이겠죠? 완성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따름인 걸요. 이 ‘농부 수필가... ’를 이어가도록 한 데는 님의 역할이 커요. 님은 ‘모티브’를 준 거에요. 저한테 글 쓸 수밖에 없는, ‘동기(動機)’를 주는 분이시까요.
한 번도 뵈온 적 없으나, 그 작은(?) 품에 안겨 펑펑 울고 싶어요.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