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80) - 그녀의 편지-
오전에는 들깨모를 본밭에다 이종하고 있었어요.
거의 신들린(?) 사람처럼, 200 여 평 밭 뙈기 거의 심었어요.
잠시.
농막에 들어와서 농주인 막걸리 두 병을 사발에 따라 마시고,
'독수리 타법'으로 아래의 글 적었어요.
열정이지요.
사랑이지요.
곧, 다시 들깨모 이종하러 날 겁니다.
생업은 종교 만큼이나 거룩한 거.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80)
- 그녀의 편지-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내 사랑하는 애독자님들, 어느새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가 제 80화에까지 와 닿았다. 숨 가쁘게 달려왔다. 기념으로(?), 어느 음악인인 여인의 살아생전 편지를 베길까 한다.
<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요. 제발 비오는 날만큼은 그 소식을 듣지 않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오늘 당신한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지요.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심장이 ‘쿵’ 내려앉아요. 몸은 이렇게 움직일 수 없는데, 심장은 여전히 제 기능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이를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불행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후 빗소리는 끊임없이 귓전에서 먹먹하게 들리더군요. 그런 상태로 얼마간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둠이 내린 큰 창문 아랫부분에 맺힌 빗물은, 끊임없이 검은 눈물을, 나 대신 흘러주었습니다. 창문이 대신 울어주어서인지, 나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이라고 하시겠지만, 정말 눈물이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습니다. 내 몸이 마비되기 시작한 날 밤, 그리고 첼로 채를 잡았던 오른손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던 그날, 나는 나를 위한 눈물을 모두 흘러버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오늘 아침은 얼마나 행복한지를요. 제가 없어도 당신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제 마음이 홀가분한지를요.
이제 이 세상에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당신과 함께 했던 많은 연주들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무엇이었을까요. 첼로와 당신이 있어서, 이 세상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부디 잘 지내셔요.
내 영원한 사랑 다니엘.>
이 농부 수필가는 그녀의 편지를 위와 같이 베껴 적는 동안에도 오줄없이(?) 두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대체, 그녀가 누구이며 무슨 사정이 있었던지에 관해서는, 수고스럽지만, ‘천상(부득이)’ 나의 수필,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78)’의 주인공인 ‘오펜바흐’와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58) - 재클린의 눈물 (Les lames du Jacqueline)-’를 인터넷 검색창에다 두들겨 패서라도(?) 읽어보시길 강권(强勸)한다. ‘농땡이’이며, 메아리도 없는‘벙어리’인 님들께는 이렇게 강제할밖에. 참말로, 나도 님들 그 태도를 참을 만큼 참아 왔다. 하더라도, 내 마음 조금은 누그러뜨려, 위 ‘농부 ... 제 58화’ 일부분을 자기표절해서 아래와 같이 소개하여 님들 이해를 돕고자 한다.
<(상략)그녀가 바로 ‘재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 1945~1987)’다.
그녀가 22살 때인 1967년, 당시 피아니스 겸 지휘자로서 상승가도를 달리던 유태계 ‘다니엘 바렌보임’이란 음악인과 열렬한 사랑에 빠지게 되어,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개종(改宗)까지 하며 결혼을 하게 된다. 당시 전쟁통에 있던 이스라엘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갖게 된다. 그때 그녀의 말은 퍽이나 인상적이다.
“음악보다도 인간적인 행복을 추구하고 싶다. 나는 악기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
남편인 바렌보임과 시간을 소중히 생각했던 그녀. 부부는 세계 도처를 돌아다니며 연주를 하게 되었고, 남편의 명성은 아내 ‘재클린 뒤 프레’의 명연주로 하여 더욱 빛나게 된다. 부부는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해내고 있었다. 그 곡은 엘가가 죽은 자기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만든 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의 노여움이었을까, 그녀한테 비극이 찾아든다. 재클린은 27세가 되던 1971년부터 병에 걸려 신음하기 시작했다. 병명은 다중경화증. 온 몸이 천천히 마비되어 제대로 걸을 수도 없고 몸을 스스로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되는 병으로 인해 섬세함을 생명으로 하는 연주자에겐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금세 회복 될 것이라 믿었던 그 병은 끝내 낫지 않았다. 그러자 아내 덕분에 음악인으로 성공해 나가던 남편은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한테로 가버렸다.
그녀는 1987년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오펜바흐는 120년 이후에 올 어느 여성 첼리스트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했던 걸까? 그처럼 슬픈 곡을 짓다니! 물론, 오펜바흐 자신은 그 곡에다 ‘재클린의 눈물’이라고 부제를 붙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세기 후에 온 ‘베르너 토마스’가 그 곡이야말로 비운의 첼리스트인 ‘재클린 뒤 프레’의 고독과 허무와 배신 등이 너무도 잘 묻어난다 싶었던 모양이다. 해서, 그 곡명을 ‘재클린의 눈물’로 고쳐, 이미 고인인 된 ‘재클린’한테 헌정하게 되었다는 거 아닌가.(하략)>
그녀에 관해 내가 추가로 알게 된 사항 및 잘못 알고 지내왔던 사항들만 이제 ‘겅중겅중’ 내 사랑하는 애독자님들께 간략간략 전해드리고 글을 맺으려 한다.
재클린은 22살에, 자기보다 세 살 위인 아르헨티나 출신, 이스라엘 국적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1942~)’과 결혼. ‘다니엘’은 현재도 잘나가는 지휘자 80대 노인. 그녀는 생의 마지막까지 자기가 연주했던 음원을 들으며, 온몸이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함. 다니엘은 그녀의 묘 참례도 여태껏 하지 않는다고 함. 다니엘은 연주 중 만난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쉬키로바’ 와 마누라인 재클린이 온 몸 마비되어 투병 중일 적에 재혼했다고 함.
그녀는 투병 중 이웃들한테 종종 말했다고 함.
“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그녀는 14년간 ‘다발성 뇌척수 경화증’으로 온 몸이 마비되어, 안면마비까지 앓음으로써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고 함. 그녀는 배신때린(?) 남편을 그래도 치켜올렸다고 함. 젊은 날 남편과 녹음했던 음반을 듣는 게 일상이었고.
‘나는 운이 좋아 다니엘을 만났고, 그랬기에 연주하고 싶었던 곡들을 모두 음반에 담을 수
있었어.’
그리고 위에서 소개했던 독일의 음악학자 겸 첼리스트‘베르너 토마스’는 그녀 사후에 ‘재클린의 눈물’ 헌정한 게 아니라, 그녀가 세상 뜨기 한 해 전에 그 ‘오펜바흐’의 유작을, ‘재클린의 눈물’이란 부제를 붙여 헌정했다는 게 팩트다. 이를 바로잡는다. 재클린은 늘 큰소리로 웃었고, 지나칠 정도로 활달했단다.
이 글은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58)’와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78)’를 ‘아우름’으써 즉,‘옴니버스의 수필’이 비로소 완성도에 도달한 듯.
삼가 ‘재클린 뒤 프레’, 당신의 명복을 비나이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작가의 말)
‘자료 챙김’은 몇 몇 날. A4용지에 ‘4B 연필’로 적은 게 10여 장. 완전히 나의 것으로 소화함. 그리고 ‘쓰기’는 잠시.
요체는 영감!
윤 수필작가는 5,000여 편 글을 써오는 동안, 미리 알아서 쓴 글 거의 없음. 쓴 후 관련된 ‘토막 지식 ’얻었음. 그것이 줄잡아 5,000개. 왜? 내가 쓴 글이 그 정도 편수이까. 그러함에도, 숨어 얼굴 내밀지 않는 나의 애독자님들, 님들은 양심에 솜털 났어요?
그리고 이 글도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그이한테 바쳐요. 이 ‘농부 수필가... ’를 이어가도록 한 데는 님의 역할이 커요. 님은 ‘모티브’를 준 거에요. 저한테 글 쓸 수밖에 없는, ‘동기(動機)’를 주는 분이시까요.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