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음악 이야기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94) - ‘Musique de Table(식탁음악)’ 창시자-

윤근택 2022. 7. 31. 12:43

부디, 아름다운 하루!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94)

                                - ‘Musique de Table(식탁음악)’ 창시자-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나는 24시간 그야말로, 채널고정 ‘KBS FM’이다. 라디오도 세 대다. 내가 격일제로 근무하는 아파트 경비초소에도 한 대, 몰고 다니는 애마 ‘50조 9115’에도 한 대, 농막 처마 밑에도 한 대. 24시간 방송되는 라디오. 그 편성 프로그램 이름과 진행자의 성함과 프로듀서의 성함까지도 다 외우다시피한다. 그 프로그램들 가운데에서 <새아침의 클래식>은, 내가 애마를 몰고 아파트로 출·퇴근하는 시간대인 오전 5시부터 6시까지 흐른다. 르네상스와 바로크시대의 클래식 음악 전문 프로그램. 영국 BBC 다음으로 우리 ‘KBS FM’이 긴 시간 할애해서 다룬다니, 이 또한 나 같은 클래식 애호가한테는 자부심. 요한 세바스찬 바흐와 헨델의 음악은 평소 여타 프로그램에서도 자주 듣는 편. 그런데 ‘텔레만’이란 작곡가는 낯설었다. 그의 음악도 거의 매일 한, 두 곡 소개된다. 호기심 많은 내가 더 이상 견딜 리가 있었겠나?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1681~1767, 독일). 내 신실한 애독자님들이 속히 내 글 따라오시라고, <다음백과>에서 요약분을 그대로 따다 붙임으로써 서비스한다.

 

 

  <세속음악과 종교음악을 모두 작곡했지만, 특히 독창자·합창단·관현악단을 위한 소규모 ‘칸타타’로부터 대규모 작품에 이르는 교회음악 분야에서 뛰어난 성공을 거둔 작곡가이다. 그 시대의 독일·이탈리아·프랑스의 주요양식들을 섭렵했던 대가인 그. 그 어떤 양식의 작품도 쉽고 유연하게 작곡할 수 있었으며 폴란드와 영국 음악의 영향도 받아들였다. 그는 오페라와 연주회를 위한 작품은 물론 교회를 위한 작품도 같은 비중으로 작곡했다. 바흐와 헨델의 친구였던 그. 바흐의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의 대부(代父)이기도 했는데, 카를 필리프 에마뉴엘 바흐는 텔레만이 86세의 나이로 죽은 후 함부르크의 음악 감독직을 이어받았다.>

 

 

  자, 지금부터는 나의 이야기다. 사실 재편집 수준에 불과하다. 위 요약분 가운데에 나오는‘칸타타’를 더듬고 넘어가는 게 아무래도 좋겠다. ‘칸타타(cantata)’는 독창·중창·합창과 악기 반주가 동반되는 17~18세기 바로크시대에 성행했던 성악곡의 한 형식을 일컫는다. ‘cantata’는 이탈리아어로 ‘노래하다’의 뜻을 지녔으며, ‘악기로 노래하다’를 이르는 ‘sonata(소나타)’에 대응되는 음악 형식으로 알고 지내면 된다.

  텔레만(1681년생)은, 서로 동갑내기였던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년생)와 헨델(1685년생)보다 4년 먼저 그들과 같은 나라 독일에서 태어난 작곡가. 그들 셋은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위 요약분에도 나오지만, 바흐의 그 많은 아들들 가운데에서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의 대부였고, 그에게 사후 함부르크 음악감독 자리를 물러줄 정도였으면... . 텔레만도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강요로, 악기들도 빼앗기고, 마지못해 법과대학 들어갔던 이, 헨델도 부친의 강요로 법과대학 들어갔던 이. 둘은 작곡에 관한 사항이 담긴 서신도 교환하던 사이.

  한번은 라이프치히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작곡가 인기투표가 이뤄진 적이 있단다. 그랬더니, 텔레만 1위, 헨델 2위, 바흐 7위. 사실 바흐는 20여 년 간 라이프치히가 활동 무대였고, 텔레만은 함부르크가 주 활동무대였건만... . 이는 당대에 텔레만이 가장 우러름을 받았던 작곡가였음을 반증한다.

   텔레만, 그의 곡들에 관해 음악평론가들은 대체로 이렇게 말한다.

   “ 자연스런 선율, 대담한 화성, 쾌활한 리듬이 특징이다. 악기편성 또한 나무랄 데가 없다.”

   나는 위 칭찬의 말 가운데에서 ‘쾌활한 리듬’이란 표현에 주목한다. 그가 53세였던 1733년에 출판한 작품집 가운데에서 그 유명한 <Musique de Table(식탁음악)>도 있다는 거. 행세께나 하는, 귀족들을 비롯한 일부 상류층은 자기네 여흥을 즐기려고 작곡가들을 고용하던 시대. 그들이 식탁 앞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들을 수 있는 음악이 바로 ‘식탁음악’. 텔레만이 창시자였다는 거 아닌가. 그는 그 작품집에다 관현악 모음곡 3곡, 협주곡 3곡, 4중주곡 3곡, 3중주곡 3곡, 소나타 3곡을 포함했다. 식탁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이라면, 가볍고 우아한 형식의 음악이라야 제법 어울릴 것은 번연한 이치. 텔레만의 음악은 대체로 그러한 경향을 띤다고 한다. 내가 이 글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샘플링해서 들어본 그의 식탁음악 한 곡도 역시 편안하였다. 바로 <플루트,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협주곡> TWV53: A2 중 제 4악장. 말년에 이를수록 그 정도가 더해졌다고 한다. 아마투어 음악인들도 쉽게 연주할 수 있는 곡들. 해서, 당시에는 다소 심오한 바흐의 곡보다 인기가 많았던 모양. 바흐와 헨델은 19세기 들어 재평가되었지만, 텔레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평생 3,000여 곡을 적은 최다작의 작곡가로 기네스북에까지 올라있다는데... . 하루 한 곡 적는 것으로 셈하면, 꼬박 10년 걸리는 분량. 그러다보니, 텔레만은 ‘다작의 작곡가이기는 하지만, 실속 없는 3류 작곡가’ 정도로 취급을 받게 이른다. 그러다가 금세기 들어, 음악연구가들 ‘막스 슈나이더’와 ‘로맹 롤랑’양인(兩人)의 연구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는데, 고맙게끔 대한민국 클래식 전문 채널 <새아침의 클래식>은 아주 종종 그의 음악을 내보내주고 있다.

  텔레만, 잠시 후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 보고드리겠지만(?) 그가 그 많은 곡을 적을 수밖에 없었던 기막힌(?) 사정이 따로 있었다. 바흐가 아침마다 가볍게 ‘푸가’한 곡부터 시작하여 적은 게 1,000여 곡. 비발디가 하도 여러 군데서 청탁이 들어오니까, 그게 그거 같은 곡을 적은 게 800여 곡. 후일 구 소련 러시아의 ‘스트라빈스키’는 그 점을 비아냥댔다.

  “ 비발디는 100여 곡 거의 같은 음악을 빚은 작곡가일 따름인 걸.”

   자, 텔레만이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다작의 작곡가가 된 특별한 사정. 그는 첫 번째 아내 ‘에블린’과 첫딸을 얻고 난 뒤 채 일 년도 아니 되어 사별(死別)하게 된다. 빼어난 문필가이기도 하였던 텔레만은 아내를 위해 긴 작품을 지어 헌정했다. 그리고 ‘마리아 카테리나’란 여인과 재혼하게 된다. 카테리나와 사이에서 아들 8명, 딸 2명을 얻게 된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카테리나는 사치스러운데다가 도박 중독자였다. 당시 우리 돈으로 환산해서 2억 3천만 원 정도의 빚을 남기고, 스웨덴 장교와 바람이 나서 달아나고 만다. 기가 막힐 노릇. 파산 위기의 사정을 안 함부르크 음악애호가들은 텔레만을 돕고자, 그가 출판한 작품집을 십시일반 사주게 된다. 출판업이 발달되어 있던 함부르크. 출판업에도 간여했던 텔레만. 게다가 문필가이도 하였던 텔레만. 그는 자기가 쓰는 성악 작품들 가사를 직접 적을 능력이 있었고... . 그가 그 많은 작품을 빚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 더 있다. 그는 함부르크 다섯 교회를 담당하는 칸토르(음악장)이었다. 그 다섯 교회 예배 때에 쓰이는 종교음악을 늘 대어주어야 했다. 게다가, 매년 교회마다 2곡의 ‘오라토리오(聖譚曲)’를 지어 보내주어야 했다.

   두서없는 나의 이야기 여기서 마무리해야겠다. 내 신실한 애독자 여러분께서 더 이상 지루하면 싫어하실 테니. 하더라도, 이 말만은 보태어야겠다.

   ‘ 4살 때 부친을 여의 아이. 어머니로부터 돈 아니 되는 음악 집어치우라고 악기를 모조리 빼앗긴 아이. 한평생 변변한 스승 한 분 모시지 않고 오로지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한 아이. 그는 바흐와 헨델보다 4살 위였다. 바흐와 헨델을 '바로크 음악의 쌍벽'으로 알고 지내왔지만, 그를 포함해서 '바로크 음악의 트로이카'로 부르고 싶다. 출퇴근길 나의 애마에서 듣는 그의 ‘종교 칸타타’는 늘 경건하기만 하다.’

 

 

 

  작가의 말)

 

 

  사실 자료는 몇몇 날 A4용지로 10매가량 메모를 하고, 관련 음악을 듣는 등 챙겼으나,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 너무 지루할성싶어, 나름대로 이처럼 글을 다이어트를 했지만... .

아무쪼록, 다들 부족한 점은 채워서 읽어주시길. 그리고 이 글도 내 사랑하는 그이한테 바친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