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미술 이야기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22) - 93차례 이사를 했던 미술가 -

윤근택 2022. 8. 14. 13:05

부디,

아름다운 나날!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22)

                                                            - 93차례 이사를 했던 미술가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그는 살아생전 93차례 이사를 하였다. 그림 그리는 일에만 몰두하여, 방이 어질러지면 방 치우는 시간마저도 아까워, 화구(畫具)만 챙겨 또 다른 집으로 이사하곤 하였다. 한번은 하루에 세 차례 이사를 간 적도 있다. 그리고 그는 평생 33회 아호(雅號)를 바꾸었다. 하나의 아호 사용으로 성취할 수 있는 일정 수준의 미술단계에 도달하면, 거기서 만족하게 되어 멈추게 될세라, 스스로 단속하여(?) 그렇게까지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여섯 살 때부터 사물의 형태를 베끼는 것에 열정을 갖게 되었어요. 쉰 살 때부터 많은 그림을 출판했지만, 일흔이 될 때까지 그린 모든 것들 가운데에서 고려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흔 셋에 저는 새·곤충·물고기 등의 구조와 풀 따위의 삶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든 여섯에 더 나아갈 것이며, 아흔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뜻을 더욱 깊이 간파할 것이고, 백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놀랍고 신성한 경지에 다다를 것입니다. 제가 일백열 살이 되면, 점 하나하나가 각자의 삶을 가질 것입니다.”

   그는 위 큰따옴표 속 후반부에 적은 그의 꿈 다 이루지 못하고 89세로 세상을 떴다. 사실 장수한 편이다. 줄잡아 80여 년 창작활동을 했던 화가.

   일본의 전설적인 화가, ‘카츠시카 호쿠사이(Katsushika Hokusai,葛飾北斎, 1760~1849)’이야기다. 그는 일본 ‘에도 시대[Edo時代,江戶時代, 1603~1867]’에 활동한 목판화가. 그가 위에서도 고백했듯, 1831년경 나이 70대에 들어 제작한 연작 목판화 <<후지산 36景>>이 걸작이다. 그 가운에서도 첫 작품인 채색목판화 <카나가와의 큰 파도 아래>가 가장 유명하다. 에도시대에는 ‘우키요에[ ukiyo-e, 浮世繪]’가 성행하던 시절. 유키요에란, 서민계층을 기반으로 발달한 풍속화를 일컫는 미술장르. 판화로 대량 찍어냄으로써 일반대중들한테 생필품 포장지 등으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우키요’는 ‘덧없음·세상·속세’등을 일컫는다는데... . ‘호쿠사이’도 처음에는 당시 성행했던 ‘도제[徒弟]’로 어느 스승 밑에서 바탕그림을 그리는 등 일을 했다는데, 폐쇄사회였던 그 화공(畫工)세계에서 파문을 당하고,  독자노선을 걸은 것으로 미술사(美術史)는 기록하고 있다.

   그의 채색목판화 <카나가와의 큰 파도 아래>가, 서양의 예술계에 끼친 영향은 어지간하였던 모양. 모네, 마네, 르누아르, 드가, 고갱 등 웬만한 화가들은 그의 작품 인쇄물을 다 소장하고 있었단다. 사실 판화의 특성상, 목판낯짝에다 안료를 발라 무한정 찍어낼 수 있으니까.

    1985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비평가 ‘리처드 레인’은 이렇게까지 묘사하고 있다.

  “ 호쿠사이는 19세기 후반부터 서양 예술가들, 비평가들, 예술 애호가들에게 다른 아시아 예술가들보다 더 깊은 인상을 주었다.”

   미술사학자들 가운데에는 호쿠사이의 채색목판화 <카나가와의 큰 파도 아래>가, ‘모네’의 <<인상(Impression: 해돋이)>>를 필두로 한 ‘인상주의’를 태동시켰다고 하는 이도 있다.

   ‘에드가 드가(1834~1917, 프랑스 화가)’는 아예 대놓고(?) 호쿠사이를 극찬한다.

   “호쿠사이는 ‘플로팅 월드(floating world)’에서 단지 한 명의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섬이고, 대륙이며, 그 자신 속에 있는 온 세상이다.”

   글이 다소 길어지더라도, 애독자님들께서는 이해해주시리라 믿으며,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98)’ 일부를 따다 붙이겠다.

 

 

  < (상략)드뷔시, 그는 33세였던 1905년에 초판 출간한<<La Mer(바다>>의 악보 표지에다 일본의 전설적인 목판화가, ‘카츠시카 호쿠사이(Katsushika Hokusai,葛飾北齋,1760~1849)’의 <가나가와 해변의 파도 아래>라는 작품을 실었다. (중략)또한, 그 판화는 ‘멜라르메’시인으로 대표되는 ‘상징주의 문학’의 바탕이 되었다고도 한다. 음악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그들 화가들 및 시인들과 정기적인 교류를 가졌던 드뷔시. 그도 그 <가나가와 해변의 파도 아래>에 영감을 얻어, 관현악곡인 <<La Mer(바다>>를 작곡함으로써 33세 나이에‘인상주의 음악’의 창시자 겸 완성자가 되었으니... .(하략)>

 

 

   어디 그이들뿐이랴! 그 한 장의 판화는 ‘릴케’한테 영감을 주어 <<산>>이란 시를 낳게 하고, 조각가 ‘클레텔’한테 영감을 주어 청동상 <<파도>>를 만들게 한다.

   오늘날 미술사가들은 ‘호쿠사이’의 그 채색목판화를 비롯한 일본의 판화들이, ‘스냅사진’ 발명에도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미술에 관한 한 문외한인 나. 하더라도, 몇 분 미술평론가들의 글 등을 종합하여 얻은 옅은 토막지식으로,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호쿠사이의 그 <가나가와 해변의 파도 아래>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미술평론가 정윤희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적고 있다. 물론, 내가 그이의 글 표절치 않고 죄다 윤색했다.

 

   < 그의 판화는 너무도 쉽게 그렸으면서도, 그 대상이 생생함을 보여준다. 물결치는 파도가 명료한 선으로 뚜렷하다. 그 동안 서양의 회화에서는 바다가 이처럼 뚜렷하지 않았다. 이는 대담한 구조로 습작을 거듭하여 이룩한 혁신. 모네를 비롯하여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이단아 취급을 받던 일군(一群)의 화가들로 하여금 대담한 터치와 색상을 시도케 하였다.>

 

 

   그런데 정작 수필작가인 내가, 더 신선한 충격을 받은 새로운 사실 하나. 세상의 호쿠사이의 작품도 결코 하늘에서 거저 뚝 떨어진, 아주 독창적인 예술품이 아니더라는 점. 당시 네덜란드와 교류가 있었던 일본. 네덜란드 문물이 일본으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한자성립의 하나인 ‘가차법(假借法)’으로, ‘네덜란드’를 ‘난국(蘭國)’으로 불렀고, 네덜란드의 그림을 ‘난화(蘭畫)’로 불렀던 모양. 호쿠사이는 그 난화풍의 그림에서 그 명작 채색판화가 탄생되었다는 거 아닌가. 게다가, 그가 일본인 최초로 사용한 채색안료가, ‘프러시안 블루(blue de pruse; prussian blue)’. ‘프러시안 블루’는 프러시아에서 개발된 ‘시안화철 혼합물’로 이뤄진 짙은 청색의 안료. 그렇다면 호쿠사이는 해외문물을 남보다 일찍, 온전히 본인의 것으로 받아들였던 셈. 어디 그뿐인가. 호쿠사이는 이미 서양에서 채택하고 있던 ‘선형 원근법’을, 일본 예술가로서는 최초 실험했던 화가였다는 점도 놓칠 수가 없다. 나아가서, 호쿠사이는 자기의 스승이었던 ‘세슈 토요’와 중국의 화풍(畫風)에도 영향을 입었다고 알려진다. 특히, 춘추전국시대 미소년 ‘미자하(彌子瑕)’의 그림과 그로 인해 생긴 고사성어 ‘여도지죄(餘桃之罪)’에서 영감을 얻었다고도 한다.

   자, 이제 나의 생각은 얼추 정리가 된 듯. 호쿠사이의 걸작인 <카나가와의 큰 파도 아래>는 서양의 그 많은 예술인들한테 영향을 끼쳤다. 어쩌면 그들은 이국정취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더라도, 이참에 ‘호쿠사이’도 서양으로부터,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예술적 영감을 얻었음을 여러 모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예술도 밀물과 썰물 같아서, 서로 혼합되고 상호작용을 하는 것으로밖에 풀이할밖에.‘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대체 무엇인가. 융합, 융합. 서로 살아 숨쉬며, 하나의 새로운 생명체로 태어나는 거. 그래서일까, 이 농부 수필가는 그 많은 음악 장르들 가운데에서도 ‘뉴에이지 음악’ 내지 ‘클로스 오버 뮤직’에 매료되어있음을.

 

 

 

 

 

   작가의 말)

 

 

   진심을 다해 그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육 십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알게 되었어요. 사랑해요, 두루두루.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이 글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호쿠사이, 그가 50대에 그린 ‘호쿠사이 만화’를 두루 감상하지 않았을 성싶습니까? 당시 일본 화가들의 ‘데생’ 교재였던 그 만화.

   모름지기, 예술은, 예술가는... .

 

 

 

   이 글은 본인의 개인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