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고추밭에서(18)

윤근택 2022. 12. 20. 15:42

 

                                                                  고추밭에서(18)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지금은 12월 초순. 된서리 내리고 땅거죽이 얼었다 녹았다 하는 시절. 고추밭 고랑에 들어선 나는 미리 잘라둔 고춧대를 거두면서‘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암송하고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의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예순 닐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내 고추밭 고추작물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자기 몫들을 충실히 해내었다. 풋고추, 첫물고추, 두물고추, 끝물고추 등을 차례로 나한테 선사하였다. 게다가, 영양분과 맛이 썩 좋은 고춧잎도 내 아내한테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내 정성은(?) 위와 같은 수확에 그치지 않았다. 첫서리인 무서리가 내릴 걸 예상하여, 미리고추나무의 발목들을 커터(cutter)와 전정가위로 차례차례 베었다. 그것들 뿌리를 덮었던 ‘2년용 투터운 멀칭비닐’이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그러면 고추나무는 시들어가면서라도 마지막까지 줄기와 꼭지에 남은 자양분을 빨아들여 생명활동을 이어가서, ‘애고추’든 ‘어른고추’든 달린 고추는 모조리 성하게 남는다는 걸 경험상 아는 터. 나는 그것들을 알뜰히 따 모아 건조기 채반에 얹어 말렸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밤 내내 그리움으로 훌쩍대며, 하나하나 알뜰히 꼭지를 딴 후 고추튀각용으로, 고춧가루용으로 내 뮤즈들한테까지 골고루 부쳐드렸다.

   내가 겨울고추밭 고랑에 들어선 이유는, 이제는 바짝 말라버린 고춧대들을 거두기 위함이다. 다섯 포기 간격으로 박아두었던 알루미늄 지주(支柱). 그 지주 사이를 마치 전봇대 사이에 쳐진 전선(電線)처럼 3단으로 쳤던 나이론결속끈(-結束끈). 지주와 나이론줄에, 내 키만큼 자랐던 우람한 고춧대들이 의지하고 지냈다.

   내 작업은 ‘나이론결손끈 가위로 자르기’, ‘지주 뽑기’, ‘고춧대 안아 나르기’를 교대로 이뤄진다. 작업을 하되, 비닐피복이 다치지 않게 조심한다. 위에서도 이미 이야기하였고, 이 시리즈물 어디에선가도 밝힌 바 있지만, 나는 남들과 달리, 매년 고추이랑에는 ‘2년용 투터운 멀칭비닐’을 입힌다. 그 자리는 비닐피복을 벗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이듬해에는 참깨를 심는다. 그 참깨를 수확한 후에는 가을김장배추를 심고. 이른바, ‘돌려짓기’를 그렇게 행한다. 가지과식물인 고추작물이 ‘토양기피성’을 지녀, ‘이어짓기’를 꺼려하기에 해마다 그렇게 돌려짓기를 한다.

   대체로, 이웃들은 고춧대와 결속비닐을 둘둘 말아 밭 가장자리 등에 모아놓고 불살라버림으로써 한 해 고추농사를 마감하는 편이다. 나는, 스스로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 고춧대들마저도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 지금 그것들이 들어서 있었던 밭자리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감나무와 사과나무한테로 아름아름 안고 가서 그 발치에다 놓고 ‘꼭꼭’ 장화 신은 발로 밟아준다. 고춧대에 남아있을 탄저균 등 포자(胞子) 등을 감안하여 그리한다. 그러면 고추나무의 잔해들은 시나브로 썩어, 아니 발효되어 유기질거름이 될 테니. 참, 미꾸라지 양식업자들은 고춧대를 발효시킨 후 양어장에 즐겨 넣어준다고 들었다. 그것이 미꾸라지한테 어떠한 점이 유용한지까지는 모르지만... .

    어느새 깔끔해진 고추밭. 보기에는 좋은데, ‘만돌이농장’에 들른 아내 칭찬은 듣기 좋은데, 내 가슴 이렇게 헛헛해질 줄이야!

    다시금 김영랑의 시를 패러디하여 읊어댄다.

 

   ‘천지에 고춧대는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져느니

   고춧대가 사라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예순 닐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고추모를 심을 때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작가의 말)

    위 동일 제재로 근근이 제 18화까지 끌고 왔다. 김영랑의 위 시 한 구절을 다시 패러디해야할 판.

‘고춧대(고추 글감)가 사라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 또 새로운 연작 수필글감을 찾을 때까지

삼백예순 닐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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