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29) - 쇼팽의 여인들 -
글 더 보태서 부쳐드려요.
그저께는 낮술에 잔뜩 취해 마감을 제대로 못했던 글이에요.
하기야, 오늘도 벌써 낮술로 막걸리 세 통 부어마시고서 쓴 글이지만요.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29)
- 쇼팽의 여인들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몇몇 날 거의 밤잠 아니 자고 쇼팽을 집중탐구하였다. 물론, 그의 작품들도 이 글의 완성도를 더하고자 낱낱이 들어보았다. 많은 음악평론가 등의 글을 읽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농부 수필가의 접근방식은 그들과 달라야 할 듯. 해서, 나름대로 지금부터 시대별로 그의 뮤즈들에 관한 이야기를 버무려 재구성하고자 한다. 사실 작가는 이미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1. ‘콘스탄티아 글라트코프스카’ 시절
쇼팽은 나이 16세였던 1826년에 자기 고국, 폴란드의 ‘바르샤바음악원’에 입학한다. 19세가 되던 1829년 초, 그는 같은 학교 성악과 여학생한테 ‘뿅’ 가게 된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인기있는 젊은 성악도였다. 소심한 쇼팽은 그녀한테 말도 못 붙이고, 짝사랑하게 된다. 해서, 1830년 3월 초연한 <피아노협주곡 제 2번 F단조,op.21>의 제 2악장에다 야릇한(?) 내용을 담는다.
그는 친구인 ‘티투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는다.
‘ 제 2악장은 콘스탄티아에 대한 연정이 물들어 있다네.’
사실 그는 살아생전 딱 두 곡의 피아노협주곡을 적었는데, 이 시기였다. 사실 <피아노협주곡 제 1번 E단조,op.11>은 나중에 적은 곡이다. 다만, 제 2번이 악보가 늦게 출판되어 그 순번이 바뀌었을 뿐. 두 곡 공히 제 1악장은 관현악(오케스트라)으로 시작되며 한참 후에야 비로소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는 게 특징이다.
그는 두 곡의 피아노협주곡을 적으면서, 인간의 목소리가, 특히 이탈리아 오페라에 포함된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 콘스탄티아의 목소리가 그 어느 악기의 음향보다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곡을 지었다. 음악평론가들은 두 곡 피아노협주곡에 관해, ‘야상곡과 시적(詩的) 기교를 보여준다.’ 고 말한다.
쇼팽의 첫사랑은 불발. 그는 그 곡을 적은 후 고국인 폴란드를 떠난다. 정작 콘스탄티아한테 그 곡을 헌정도 못한 채. 정작 그 곡은 후일 ‘델피나 포토츠카’ 백작부인한테 헌정하였다.
후일, 콘스탄티아는 쇼팽 사후(死後)에, 전기작가 ‘모리츠카라소프스키’의 글을 읽고서, 그 곡이 자기를 사모하여 적은 곡인 줄 그제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그녀가 삼십대에 시력을 잃고 말았다는 거.
콘스탄티아는 쇼팽의 첫 뮤즈였던 셈.
2. ‘마리아 보진스키’ 시절
1835년 25세의 쇼팽은 잠시 고국으로 돌아와,폴란드 친구인 보드진스키 일가를 만나게 된다. 그는 당시 16세 소녀인 그 댁 ‘마리아’한테 폭 빠지고 만다. 쇼팽은 밤마다 함께 피아노연주를 하는 등 은밀히 마리아와 약혼을 하게 된다. 쇼팽이 이미 폐결핵 등 건강이 나쁘다는 걸 알아챈 마리아의 모친, 테레사 부인. 그들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게 된다.
쇼팽은 그녀 모친으로부터 파혼편지를 받고 답장을 쓴다.
‘ 런던에서 당신의(모친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것보다 덜 슬픈 편지이길 바랐는데요. ’
그는 그녀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정리하면서, ‘나의 절망(Moja vieder)’이라고 적었다. 그는 그때의 심정을 <녹턴 제 8번.op.27>로 적었다.
3. ‘조르주 상드’ 시절
쇼팽이 26세가 되던 1836년 가을, 당시 바람둥이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의 연인인 ‘마리다구백작부인’이 경영하는 파리의 살롱에서, 리스트의 소개로 어느 여인을 만나게 된다. 쇼팽은 그녀가 처음에는 영 맘에 아니 들었다. 남장(男裝)을 하고, 줄담배를 피우며, 직선적으로 말하던 그녀.
쇼팽은 혼잣말을 해댔다.
‘무슨 눔의 여자가... 저것도 여자야?’
그러했음에도 쇼팽보다 나이가 여섯 살 많은 31세의 그 여인은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함께 한 번 살아보자고 졸라댔다. 그녀는 이혼녀로, 아들 ‘모리스’와 딸 ‘솔랑즈’까지 딸린 여인이었다. 이미 여러 권의 소설책을 낸 여류작가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바로 ‘ 조르주 상드(1804~1876,프랑스)’이다.
잠시 조르주 상드 전력(前歷) 소개. 그녀는 가난한 자기네 친정 측에서 ‘입이나 하나 덜겠다고’ 나이 차이가 많은 지방 귀족한테, 16세 나이에 강제결혼당한(?) 여인. 두 아이를 낳고, 전혀 분위기 못타는(?) 남편한테 질려, 이혼을 강요하며 집을 나섰다. 자유분방하고 진취적이며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녀. 그녀는 위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소설가로 데뷔하였다. 쇼팽을 만나기 이전에도 이미 여러 남자와 동거한 전력도 있다. 후일 그녀를 두고, ‘바람둥이’로 부르는 것은 약과였다. ‘걸레’, ‘쓰레기’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정작 자기 사생활도 엉망진창이었고 <악의 꽃>이라는 적나라한 성애시(性愛詩)로 물의를 일으켰던 ‘보들레르’마저 그녀의 사생활을 맹비난하였다.
‘이런 잡년에게 매혹되는 남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이 세대 남자들이 타락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나는, 수필작가인 나는, 예술가인 나는, 이 글의 완성도를 더하고자 그녀의 그 숱한 남자관계를 읽는 동안 짚이는 게 딱 하나 있었다. 굳이, 내가 체면을 생각해서 점잖게 적을 턱이 없다. 이 자극적인 한마디면 족하겠다.
‘ 조르주 상드, 그녀는 바람둥이였긴 하지만, 아무런 놈 앞에서 함부로 팬티를 벗어주지는 않았다. 살펴본즉, 그녀의 상대는 늘 예술가였다.’
이 무슨 해괴한 논리냐고? 그녀는 예술가 상호간 영감을, 그러한 정신적, 육체적 사랑으로 주거니 받거니 했다는... . 비록 그녀가 ‘이상적 성욕자(異常的性慾者)’ 곧, ‘비정상적 성욕자’였긴 하지만, 그녀의 회고록을 보면, 이해되는 점 영 없지가 않다.
‘ 나에게 사랑 없는 섹스는 죽을 죄다.’
‘ 나는 덤불 속에 가시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원하는 꽃을 꺾기 위해서라면, 내 손을 거두는지는 않는다. 나는 원하는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내 영혼의 상처를 감내한다. 덤불 속의 꽃이 모두 아름답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렇다고 해야 그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법. 상처받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받는 것이므로 사랑한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니 .’
이쯤 해두고, 쇼팽과 그녀의 애정행각을 흥미롭게 살펴보자. 류마티스를 앓고 있던 그녀는 폐결핵이 심한 쇼팽을 꼬드겨, 스페인의 포근한 ‘마요르카섬’으로 요양을 가게 된다. 몹쓸병인 폐결핵을 앓는 쇼팽 커플을 그 마을 사람들이 반겨줄 턱이 없었다. 그들은 폐수도원에 기거하게 된다. 일기는 예년과 달리 나빴고, 쇼팽의 병세는 더욱 악화 되었다. 그런 가운데도 쇼팽은 마치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라도 하듯, 작곡에 매진하게 된다.
비가 몹시 내리던 날. 어머니처럼 쇼팽을 보살피던 상드는, 아들 ‘모리스’와 함께 10km 이상 떨어진 곳으로 쇼팽의 감기약 등 생필품을 사러 집을 나선다. 폭풍우에 길을 잃고 상드는 자정이 가까워서야 가까스로 귀가하게 된다. 그때까지 쇼팽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쇼팽은 울먹이며 말한다.
“사랑하는 조르주, 내 앞에 앉아 있는 건 분명 당신 맞죠? 난 당신이 급류에 휘말리는 환영을 봤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내 가슴에도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
상드는 그가 쉬지 않고 그 선율을 거듭거듭 피아노 건반으로 두드리자 말했다.
“ 당신이 왼손으로 두드리는 그 반주는 흡사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같아요. 이 건반에는 당신의 눈물방울과 빗방울도 떨어져 있네요.”
쇼팽의 전주곡 24곡 가운데에서 제15번의 전주곡은 그렇게 해서 탄생되었다. 그 부제(副題) ‘빗방울 전주곡’은 그날 밤 상드가 최초로 붙인 셈.
그들은 9년간의 동거생활을 마감했다. 상드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쇼팽을 홀연히 떠났다고 한다. 상드가 쇼팽의 의붓딸인 ‘솔라즈’와 관계를 의심하게 되면서 그렇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한편, 쇼팽이 그녀가 쓴 소설,<루크레치아 플로리아니>를 읽고 분개해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설도 있다. 그 소설은 부유한 여배우와 병약한 왕자의 사랑을 그린 거라서... . 물론, 그녀는 머무르지 못하는 바람처럼, 그 이후에도 여러 예술인들과 ‘사랑놀음’을 이어갔지만... .
어쨌거나, 조르주 상드는 쇼팽의 영원한 뮤즈였던 셈.
4. ‘제인 스털링’ 시절
상드와 9년여 동거생활 끝에 이별한 쇼팽. 대략 그가 세상을 뜨기 2년여 전 1847년, 그가 37세 무렵. 상드는 그렇게 쇼팽을 떠났지만, 쇼팽은 상드를 결코 떠나지 못했다. 쇼팽의 지인들은 혹시라도 그가 힘들까봐 상드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쇼팽은 입만 열면 상드였다.
쇼팽이 39세로 세상을 뜨던 1849년을 기준하여, 7년 전인 1842년에, 그녀 나이 38세 무렵, 쇼팽으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은 여인. 그 짧은 인연으로 해서, 쇼팽의 제자이며 친구인 아마투어 피아니스트였던 제인 스털링이 자기 고국, 영국으로 불러, 쇼팽은 런던으로 향한다.
제인 스털링은 상드와 동갑으로, 마찬가지로, 쇼팽보다 6세 위. 그때 그녀의 나이는 대략 43세. 그녀는 그때까지 미혼이었다. 그녀는 부유한 가정의 13남매 가운데에서 막내로 태어났고,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었지만, 상속녀였다. 아름답고 예의범절이 고와서, 30여 군데에서 청혼이 있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지냈다. 내가 인터넷에서 본 그녀의 흑백사진도(?) 너무 매력적이었다. 어린 질녀와 나란히 찍은 그 사진. 허리도 잘록하고, 애교스런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늘어뜨린... . 눈부신 미모였던 이, 교도소 개선 위한 일에 나섰던 이, 대체의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이, 개신교 운동을 하였던 이.
그녀는 오랜 기간 쇼팽을 흠모해오다, 쇼팽이 상드와 헤어진 것을 알고, 마치 기다렸던 듯이 상드를 대신해 그와 결혼까지 생각했으나, 이를 듣고 깜짝 놀란 쇼팽은 단호히 선을 그었다. 그녀는 조용하고 튀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홀로 지내던 쇼팽의 비서, 매니저, 대리인 모든 역할을 도맡아 하였다. 그녀는 쇼팽이 런던에 도착하자, 집과 가구뿐 아니라 오선지나 코코아 같은 소소한 물건들까지 챙겨주었다. 그녀는 빅토리아 여왕한테까지 줄을 대어, 여왕 앞에서 쇼팽이 연주할 기회를 마련해주기까지 하였다. 그 연주 사이사이 쇼팽은 제인 스털링의 품에 안겨 쓰러지곤 하였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내가 본 명화, ‘라스트 콘서트’를 마치 다시 보는 기분.
내가, 내가, 작가인 내가, 이 글을 쓰다가 이 대목에 이르러,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또다시 마구 흘러내릴 줄이야! 그리고 또 혼잣말을 하게 될 줄이야!
‘바보 같은 여인! 어디 송장을 치를 일이 있어? 이 년 저 년한테 혼을 다 뺏기고 그제야 마지막으로 돌아온 남자를? 죽음을 앞둔 그이한테 무슨 눔의 정성을 그렇게까지?’
실제로, 그녀는 그녀 짝사랑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번연히 알고 있었다. 해서, 사례금까지 주어가면서, 1849년(쇼팽 사망 1년 전)에 폴란드 화가인 ‘크비아코브스키(1809~1891)’한테 <침상의 쇼팽>을 그리도록 하였다. 정작 그 그림에는 ‘제인 스털링’ 자신의 얼굴은 없다. 숨어서 사랑한 그녀의 마음일까. 나는 인터넷을 통해, 이 글을 적기에 앞서, 그 그림을 생생히 보았다.
오, 지고지순한 제인 스털링의 사랑이여! 그녀는 정말 차근차근 뒷일을 수습하였다. 쇼팽이 숨을 거두자, 장례식을 자기가 주관했다. 유품을 챙겨나갔다. 고인이 즐겨 입던 옷에서 수첩을 꺼냈다. 거기에는 연적이었던(?) 조르주 상드의 머리카락 한 줌이 들어 있었다. 어느 상자 안에는 200여 통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 유품들을 시누이가 될 수도 있었던 쇼팽의 누나, ‘루드비카’한테 건네주었다. 쇼팽의 누나는 제인 스털링의 정성으로, 아우의 유언에 따라, 심장을 적출하여 고국인 폴란드로 무사히 가져갈 수 있게 되었다. 장례비용과 시누이가 될 뻔했던 루드비카의 바르샤바행 티켓도 끊어주었다. 한편, 그녀는 쇼팽의 유품들을 경매에 붙인 다음, 쇼팽의 피아노 등을 모조리 사들여, 유족들한테 되돌려주었다. 그 나머지 그녀의 선행은 다 생략하겠다.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데다가 돋보기안경까지 성에가 끼어 더는 쓸 수가 없다.
그래도 그래도 아무리 낮술 막걸리 세 병을 마셨더라도, 이 문장은 짓고 끝내야하지 않겠나.
그녀는 일 년 동안, 짝사랑 쇼팽을 생각하며 상복(喪服)을 입고서, 피아노 연주도 아니 하였단다. 그녀를 두고, 많은 이들이 ‘쇼팽의 미망인’이라고 불렀단다.
쇼팽은 마지막 뮤즈였던 제인 스털링한테 <녹턴 작품번호 55> 2곡을 헌정했다. 쇼팽의 진정한 마지막 뮤즈는 ‘제인 스털링’인 듯하다.
정말? 정말? 정말?
5. 세상의 그 많은 여성들 시절
그는 39세인 1849년에 갔다. 위 ‘4’ 내용대로,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심장은 적출되어, 고국 ‘폴란드 성 십자가’에 묻혔다. 대신, 나머지 유골은 프랑스 최대의 정원식 공동묘지인 ‘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A Frer Chopin’이란 글귀와 ‘Jerry stella’와 함께.
그런데 아주 놀라운 일. 2023년 현재 기준으로, 175년 전에 묻힌 그의 묘역에는 세상의 그 많은 여성들이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그 묘에다 생화(生花)를 바치고 있다는 점.
그는 세기도, 남녀노소도 다 뛰어넘어 온 세상에 두루 뮤즈들을 둔 이,
작가의 말)
이 글을, 새롭게 얻은 나의 뮤즈께 바쳐요. 모자라는 부분은 채워 읽어주세요. 실은, 이 글 쓰려고 몇몇 날 집중탐구하였고, 메모한 양만 하여도 A4용지 14매 정도 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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