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세판
삼세판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천하장사’ 이만기씨가 심심찮게 텔레비전에 출연한다. 그의 부인도, 장모도 그의 명성에 힘입어(?), 돋보이기도 한다. 시원시원한 가족이다. 씩씩하다. 최근 그가 무슨 광고 멘트에 날린 말 퍽 인상적이다. 대충 이런 멘트.
‘씨름판에만 삼세판이 있는 게 아닙니더. 인생도 삼세판.’
그는 ‘삼세판’을 힘주어 말했다.
삼세판,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세 번 안에 끝내는 것. ‘위키백과’는 이에 덧붙여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다.
‘ 한국인들에게 친근한 표현. 한국인들이 3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일의 승부를 세 번 도전으로 결정짓는 이 삼세판 문화와 연관이 아주 깊다. ‘삼’과 ‘세’가 같은 것이므로, 겹말이다.’
연상작용이 빼어난, 아니 수필작가로서 40~50년 연상작용에 훈련된 나. 이를 감히 놓칠성싶은가.
참말로, 인생은 삼세판이다. 우선, 삼심제(三審制). 신원(伸寃),곧 ‘원통한 일이나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풀어 버림’을 위해, 삼심제를 택하고 있다. 지방법원>고등법원>대법원으로 이어지는 삼세판. 이 삼심제의 역사는 꽤 오래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고려조에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삼도득신법(三度得伸法)’이 생겨난다. 삼도득신법이란, ‘송사(訟事)의 판결에 대해 불만이 있을 때 소청(訴請)을 세 번까지로 허용하는(제한하는) 제도’를 이른다. 법전 <경국대전 (經國大典)>에 수록된 내용이다. ‘삼도득신법’ 하나만으로도, 우리네 조상들께서 삼세판을 중시해왔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삼세판, 씨름을 비롯한 여러 경기에서는 ‘삼판 양승제’니 ‘3세트제’니 등으로 곧잘 쓰인다. 우리 민족한테는 각종 경기에 못지않게 ‘3’이란 숫자가 지닌 의미는 자못 크다. 월력으로 3월3일을 ‘삼월삼짇날’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삼짇날은 설날· 단오· 칠석· 중양절처럼 양수(陽數)가 겹치는 좋은 날. 삼짇날은 봄을 알리는 명절로,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고, 뱀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나오기 시작하는 날. 또 나비나 새도 나타나기 시작하는 날. 이 날 전해오는 세시풍속도 많다. ‘3’의 배수(倍數)인 6월 15일은 유두절(流頭節; 유둣날)이고 ‘물맞이날’로 부른다. 그런가 하면, 9월9일은 양수(陽數)인 9가 겹쳐진다 하여, ‘중양절(重陽節)’로 부르고 각종 세시풍속이 있다. 이날은 제비들이 강남 가는 날로 알고 지내왔다.‘3’의 배수인 ‘21’도 결코 빼놓을 수 없지. 바로 삼칠일. 아이를 낳은 지 스무 하루째 되는 날로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기간. ‘세이레’라고도 한다. 이 삼칠일은 병아리 부화기간과 정확히 일치하며, 우리네 인간의 ‘(올바른, 나쁜)습관 들이기 기간’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어쨌든, 인생은 ‘삼세판’이다. ‘3’과 관련이 많다. 그러한데 ‘삼세판’이 결코 통하지 않는 사물이 있으니... .
우선, 내 왼쪽 귀의 ‘고막’에 관한 사항이다. 국민 학교 이학년 때 중이염을 앓아, 오래도록 고생을 하였다. 귀에서 고름이 나왔고, 코에서 고름내음이 늘 떠나지 않았으며, 머리가 무겁기 그지없었다. 어찌어찌하여 낫기는 하였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한 차례 다시 중이염을 앓게 되었다. 아주 친절한 이비인후과 선생님. 그분은 적외선 치료기 등으로 치료를 해주는 동안, 내 고막이 천공(穿孔)되어 있음을 알려주었다. 사실 그때까지도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내왔다. 그러면서 그분은 고막재생수술을 해주었다. 그 재생수술이란, 친화력이 있는 ‘트라거스(귀 연골 일부의 명칭임.)’를 얇게 베어내어 고막을 때우는 작업. 마치 자전거튜브 펑크를 때우듯 하는 시술. 그러면 그 얇디얇고 작디작은 고막이, 멀쩡하게 세포분열로 이어져 새롭게 재탄생한다고 일러주었다. 사실 귀 고막은 두께나 재질면에서 계란의 속껍질과 유사하다. 고막이 찢어지면,이비인후과 전문의들은 계란의 속껍질로 반창고를 바르듯 때워 새살이 나올 때까지, 아물 때까지 두기고 한단다. 자, 그런데 아주 경미하나마 문제가 하나 남게 된다. 어머니로 물려받은 고막은 본디 세 겹으로 되어 있다는데, 재생된 고막은 중간층이 없는 두 겹이 된다고 하였다. 물론, 듣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지만... . 하여간, 재생 고막은 세 겹이 아닌 두 겹. 그러니 고막은 ‘삼세판’이 아니 됨을 알 수 있다.
다음은, 도마뱀의 꼬리 이야기. 우리네는 ‘꼬리자르기’란 말을 종종 쓰고 있다. 시치미 떼거나 발뺌하거나 오리발 내밀기하거나 하는 행위를 일컫는 이 말. 도마뱀, 게, 지렁이, 오징어, 여치 등의 생존전략과 관련된 말이다. 아무래도 대표적인 동물이 도마뱀. 그들은 포식자 따위로부터 위기에 처하면, 이를 벗어나기 위해 몸의 일부를 스스로 잘라, “예있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하고 달아나는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 ‘꼬리 자르기’따위를 ‘자할(自割)’혹은 ‘자절(自切; selfamputation)’이라고 한다. 도마뱀의 경우, 자기의 꼬리를 포식자한테, 그야말로 눈물 머금고 ‘썩뚝’ 끊어준다. 잘린 꼬리는 신경이 살아있어 한 동안 ‘팔딱팔딱’ 한다. 그러면 포식자는 “웬 떡?”하며 만족해한다. 대신, 도마뱀은 그 이후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긴 꼬리는 곧추설 적에 하나의 다리 역할을 해왔으나... . 방향전환에도 불편해진다고 한다. 일정기간 시간이 지나면, 잘린 부위에서 꼬리가 재생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평생토록 그러한 ‘꼬리자르기’를 연거푸 할 수만 있다면, 생명을 이어갈 수는 있을 터인데... . 불행히도, 도마뱀한테는 ‘삼세판’이 허락되지 않는다. 단, 일생일대 일회의 기회밖에 없다지 않은가. 설혹, 도마뱀은 그 단 한 번의 기회인 ‘자할’을 행했더라도, 뼈는 재생되지 않고 연골로 대체되어 불편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고 한다. 도마뱀과는 달리, 도롱뇽은 자할을 행하더라도 꼬리에서 뼈까지 재생되고, 살아생전 회수 제한 없다고 한다.
이제 나는 생각한다. 늘 고등동물이라고 뻐겨왔던 나는 생각한다. 참말로, 삼세판을 생각한다. 술김에, 불쑥 정제되지 않은 말로 ‘술주정’을 부려대 왔던 나. 절제력 없이 뱉은 말로, 술김에 무슨 말을 했던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래서 소중히 여겨왔던 이들한테 하나하나 상처입혔던 기억들. 그들이 나한테 ‘삼세판의 기회’를 주기를 바라면서... .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