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55) - ‘아다지오(Adagio)’가 그에게 -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55)
- ‘아다지오(Adagio)’가 그에게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이번에는‘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08)’의 일부를 따다 붙이고 이야기를 마저 하려한다.
<(상략) 4. 사무엘 바버(Samuel Barber, 1910~1981, 미국)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op. 11.
그는 미국의 대표적인 서정적·낭만적 경향의 작곡가로 오케스트라, 오페라, 합창곡, 피아노곡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다.
그는 이탈리아 유학 중인 1936년,26세 나이일 적에 <현악 4중주곡> op.11을 적는다. 그러고는 제 2악장을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하게 된다. 그는 속된 말로, 임자를 제대로 만나게 된다. 1937년 그가 27세 되던 해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자신이 적은 <교향곡 제1번>을 올리면서다. 그 공연을 보고 있던 불멸의 지휘자 ‘토스카니니(1867~1957, 이탈리아)’가 감명이 깊어, 바버한테 청탁을 한 것. 토스카니니는 새로 창립한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장을 맡게 되었고, 첫 시즌 연주곡을, 미국인 작곡가인 바버한테 의뢰하였다. 이에, 바버는 자신이 적은 <현을 위한 아다지오> 악보를 포함해서 두 곡의 악보를 부쳐주게 된다. 웬일로, 며칠 아니 되어 그 악보들은 되돌아오고... . 바버는 아버지뻘(43세 위)되는 토스카니니가 자기의 곡이 영 맘에 아니 들어서 그렇게 퇴짜놓은 걸로만 알았는데... .사실 이미 이 연재물 토스카니니 편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토스카니니는 근시안이라서, 악보를 통째로 외우고, 보면대에는 아예 악보를 올려놓지 않은 지휘자로도 유명하다.
1938년 11월 5일.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초연은 미국 전역에 라디오 생중계되었고, 대성공. 토스카니니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바버의 악보를 다 외워, 전 유럽을 순회공연함으로써 가는 곳마다에서 바버를 홍보하게 된다.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후일 루즈벨트, 아인슈타인 등 유명인사들 장례식에 진혼곡으로 연주되었다. 한편, 명화(名畫) <플래툰(Platoon), 1986 제작> OST로도 흐르는 곡. 물론, 바버의 장례식에서도 진혼곡으로 쓰였다.(하략)>
두루 아시다시피, 아다지오란, ‘악보에서, 안단테(andante)와 라르고(largo) 사이의 느린 속도로 연주하라는 말. 또는 그 속도로 연주하는 곡이나 악장’을 일컫는다.
바버, 그는 14세가 되던 1924년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해 피아노·작곡·성악·지휘를 배웠다. 졸업 후 작곡에만 전념했으며, 현대음악 기법 중 일부를 받아들이면서도 독특한 개인 양식을 이룩했다. 특히, 그는 정작 음악이 아닌 여타장르인 문학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작품이 많으며, 그 가운데에서 영국의 시인 셸리의 시에 기초해서 만든 〈셸리의 한 장면을 위한 음악〉 작품 7로 명성을 얻었다. 이 점은 수필작가인 내가, 문우(文友)인 여류시인한테 매양 잔소리하는 점과 겹쳐진다. 나는 그녀한테 문학 외적인 장르에도 관심을 기울여 거기서 많은 영감을 얻으라고 충고하곤 한다. 사실 나의 수필창작 에너지원은 ‘세상의 모든 음악’이다.
이미 위 첫 단락에서도 소개했지만, 그는 26세가 되던 1936년에 <현악 4중주> op.11을 적게 된다. 그 가운데에서 제 2악장을 1937년에 〈현을 위한 아다지오〉로 편곡하게 된다. 사실 그 작품은 당시 세계적인 지휘자였던 토스카니니의 의뢰로 개작(改作)된 작품. 사실 토스카니니는 미국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장’을 맡고 있었으니, 그 작품성 정도보다는 인지상정(人之常情), 예의상 미국 작곡가의 곡을 소개하고픈 맘 왜 없었겠는가. 사실 우리는 당시 최고의 여류 피아니스트였던 슈만의 부인 ‘클라라’의 사례도 익히 알고 지낸다. 클라라는 자기 집 한낱 기숙생(寄宿生)에 불과했던 20대의 브람스의 곡을 연주회에 종종 소개함으로써 청중들한테 브람스를 광보(廣報)하였다. 마찬가지. 토스카니니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 연주여행 레퍼토리에서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를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바버한테는 불후의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은인이었던 셈. 바버가 26세 때 적은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그의 대표곡이 되었다.
바버, 그는 그 이후 오페라 〈바네사〉와 〈피아노 협주곡〉 op.38로 퓰리처상을 두 번 수상했다. 여담. 퓰리처상이란, 매년 미국에서 언론과 문필 분야에서 뛰어난 대중적 공로와 업적을 지닌 사람을 선정해 수여하는 상. 미국의 언론인 퓰리처가 기증한 기금으로 1917년에 제정되었다.
하여간,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그의 대표작이다. 나이 불과 26세에 적은 곡이다. 정확히는 27세 개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 탄생비화를 좀 더 적어볼까 한다.
바버는〈현악 4중주〉 Op.11을 쓰고 난 이듬해에 2악장만을 따로 뽑아서 현악 합주를 위한 곡으로 다시 만들고, 〈현을 위한 아다지오〉라는 새로운 제목을 붙였다. 사실 이렇게 원래 있던 곡 가운데서 한 악장을 뽑아서 쓰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당시 토스카니니는 자신이 이끌고 있던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새로운 시즌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었다. 그는 짧은 길이의 미국 작곡가의 작품을 시즌 프로그램에 넣고자 했고, 동료 지휘자였던 아르투르 로진스키에게 누구의 곡이 적합할지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바버의 〈교향곡 1번〉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연주하여 큰 갈채를 받았던 경험이 있던 로진스키. 그는 토스카니니에게 바버를 추천했고, 그 결과 〈현을 위한 아다지오〉가 새로운 버전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때 바버가 토스카니니의 요청에 의해 쓴 곡은 두 곡이었다. 이 중 한 곡은 완전히 새로 작곡한 작품인〈오케스트라를 위한 에세이〉. 나머지 한 곡이 바로 〈현을 위한 아다지오〉였다. 바버는 토스카니니에게 이 두 곡 악보를 보냈다. 이미 위에서도 이야기하였듯,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무런 메시지 없이 이 두 곡의 악보는 바버에게 다시 돌아왔다. 바버는 자신의 곡이 거절당했다고 오해하였다. 이후 바버의 친구이자 작곡가였던 메노티가 토스카니니를 배알하러 함께 가자는 요청을 바버는 거절했다.
그런데 토스카니니는 메노티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버는 나한테 화가 났어. 하지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지. 나는 그가 보낸 두 작품 모두 연주할 예정이거든.”
요컨대, 예술가한테도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매우 중하다. 클라라 슈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과연 브람스가 <현악 6중주> op. 1의 제 2악장 <브람스의 눈물(후일 붙은 별명)>을 지을 수 있었을까. 토스카니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토스카니니가 미국 NBC 오케스트라 단장으로 부임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바버가 <현을 위한 아다지오>로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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