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너를 보내고(2)

윤근택 2024. 8. 6. 14:00

 

 

                                                                  너를 보내고(2)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1. 시내 아파트에서

 

   새벽 다섯 시 반 무렵. 나의 지정된 침소인 아파트 거실 소파에서 일어나 출근신호를(?) 건넌방에서 자는 아내, 차마리아님한테 보냈단다.

   반찬은 된장찌개와 깻잎무침과 고등어조림. 벽시계를 올려다보니, 여섯 시 정각. 나는 나의 바지 주머니를 뒤졌어. 없었어. 14년여 네게 ‘부르릉’ 불을 일으켰던 열쇠 말이야. 때로는 손에 쥐고서도 열쇠의 행방을 찾았던 일도 떠오르더군. 그런데도 웬일로 아내는 설거지를 하는 등 딴전이었어.

   나는 도시락광주리를 들고, 그녀를 독촉할 요량으로 말을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내는 “녜.”로 응수하고, 자기 하던 일을 태연히 이어나갔어.  자기 애마로 나를 근무지까지 태워다 주어야 한다는 걸 깜박 잊은 듯. 하기야 14년 여 익숙했고 습관이 되어서... .

   그제야 아내는 “맞다. 내가 그만 깜박.”하면서 서둘렀다. 애마 ‘투싼 50조 9115’너와 갑작스런 사별(死別)로 빚어진 촌극.

   습관이 얼마나 무서운가. 너무도 익숙해있던 생활패턴을 확 바꾸어야만 하는 이 낯설음이여! 이러한 ‘습관’이 집단으로 나타나면 ‘관습’이겠지. 이처럼 체질화된 습관은 사람을 안일(安逸)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명색이 예술가인 나는, 습관이 타성(惰性)으로 이어진다는 걸 일찍부터 알고 지냈단다. 이러한 타성을 예술가들은 ‘매너리즘’이라고 하지. 참말로, 그랬다. 돌이켜보니, 70여 년 동안, 특히 젊은 날 4반세기 반듯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한 자리에 머무르기를 싫어했다. 1년은 다소 아쉽고, 3년은 길었다. 해서, 대략 2년 주기(週期)로 자원(自願)하여 오지(奧地)로 오지로 전근을 하곤 하였다. 역마살(驛馬煞)이 끼어서 그랬겠지만, 애마 ‘투싼 50조 9115’ 너랑 14년 여 지내는 동안에는 그러하지 않았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다. 주로 시내 아파트와 이 ‘만돌이농장’사이를 20여 분씩 타고 다녔을 뿐.

   하여간, 이 아침  ‘뜻하지 않은 네 잃음’은 ‘잃음’을 더욱 느끼게 하였고, 그 ‘잃음’은 내 아내로 하여금 ‘(깜박)잊음’으로 이어졌다.

 

    2. 근무처 아파트에서

 

  아내가 후문 경비실 앞 도로에 자기 애마를 세우자, 버스승강장 곁에는 경차 ‘모닝 1676’이 서 있었다. 이곳 아파트도 예외는 아니어서, 주차공간이 부족하자, 내가 출근할 걸 대비하여 맞교대자 ‘오 형’이 밤새 자기 차를 세워두었던 주차선을 비워둔 것이다. 아내는 10여분 태워다준 자기 애마를 몰고 되돌아갔다.

   오형의 배려심 고맙지만... .

   “오형, 깜박 잊으신 모양이오. 이제 나 애매가 없지 않소?”

   정말, 그도 그 사실을 깜박 잊은 모양.

   낮 동안에도 비슷한 일이 생겨났다. 정문 경비실을 지키던 ‘김OO 반장’께서 휴대전화를 걸어왔다. 그 특유의 인자한 목소리.

   “근택 씨, 내 구역 101동 분리수거장에 가보시게나. 예쁜 가구가 하나 나와 있어. 자네 차에다 실어다 농장에... .”

   그분도 잊은 게 분명타.

   “형님, 제겐 이제는 입주민들이 내다버린 재활용품 실어갈 차가 없잖아요.”

    섭섭함이여! 애마 너한테 여태껏 얼마나 이런저런 강제노역을 시켜왔던고.

 

   3. 시내버스 승강장에서

 

   며칠 전 아내는 ‘남천1’시내버스 운행 시간표를 문자메시지로 보내왔다. 1시간 간격으로, 내가 격일제로 근무하는 ‘백천 월드 메르디앙’정문 앞 ‘경청로(경산 - 청도)’를 경유하여, ‘만돌이농장’이 자리한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를 지나간다는 걸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아내는 나와 종종 다투다가 1.2Km 걸어서 버스 승강장까지 왔을 터. 종점은 윗 동네 ‘신방리’. 신방리에는 커다란 연못 ‘신방지’가 있고.

   아침 6시 30분. 나는 ‘남천1’을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 애독자들께 공히 아래와 같은 문자메시지를 날렸다, 무료함도 달랠 겸.

   < 리무진 ‘남천 1’타고, 송백리를 향함. 송백1리 마을 초입에서, 자전거 타고 1.2Km 페달을 마구 밟아대면 ‘만돌이농장’. 오늘도 다들 좋은 하루!>

   모기들이 기승을 부리기에, 자전거 페달을 가열차게 밟아댔다. 짐실이에다 내 도시락 광주리를 싣고서. 이러다가 이 늘그막에 사이클 국가대표선수로 뽑히지나 않을지.

 

   4. 산길에서

 

   산길에서 마주치는 동네 어르신들. 차례차례 이런 말을 했단다.

   “윤 과장, 웬일? 차는 어떡하고서?”

   나는 한마디로 쪽팔려, 애마 네가 아파서 병원에 보냈다고 둘러대었다. 사실 너는 이미 퇴역마(退役馬)되어 폐차장에 가 있을 텐데... .

   주인을 잘못 만나 억울한 죽임을 당한 너. 네가 이토록 아쉬울 줄이야!

 

   5. 농막 데스크 탑 컴퓨터 앞에서

 

   하더라도, 지금부터 내가 마구 두서없이 지껄이는 말들은 네가 못 들은 척 해다오. 상실(喪失)은 말 그대로 슬픈 일이기는 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상실의 아픔을 크게 느끼는 이들은 아가들. 오죽했으면, ‘엄마 잃은 아기처럼’이란 비유를 하겠니? 그러나 ‘잃음’이나 ‘잊음’이 모두 나쁜 결과만 가져오는 게 아니라는 점. 더러는 사람을 변모케 하기도 한다는 것을. 사실 사람을, 특히 성인(成人)을 고쳐서는 못 쓴다고들 하였다. 그러나 특별한 계기, 이를테면, 벼락을 맞고도 되살아나는 경우에는 더러 버릇 따위가 고쳐진다고 하였다. 신약성경 속 ‘바오로 사도’  행로야말로 우리네 인류에서 가장 좋은 사례. 이스라엘 출신이면서도 명문가 즉,고관대작의 자제로서, 로마시민권까지 지녔던 분. 그분은 대사제의 명을 받들어, 시리아 다마스쿠스로 동족(同族)사냥을(?) 하러 가다가 날벼락 맞아, 사흘 동안 앞을 못 보는 소경이 되었지만, 두 눈에 씐 허물이 벗겨져 되살아났고, 개심(改心)하여 예수님의 증거자가 되고, 후일 순교까지 하였다. 그분의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상략)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중략)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하략)>

    한편, 애마 너를 이제금 떠나보내고서, 중세시대 ‘천동설’에 반기를 들며 ‘지동설’을 주창하여 종교재판까지 받고 법정을 나서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의 명언도 떠올리고 있단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후세사람들은 ‘코페르니쿠적(的)인 대전환’이란 말을 즐겨쓰고 있단다.

    애마, 너를 보내놓고 내가 새삼 깨닫는 게 어디 위에서 소개한 사례들뿐이겠는가. 음악 애호가인 나는, 다국적 이탈리아 팝 오페라 가수그룹‘iL Volo(비행/Flight)’의 ‘il Mondo(세상/세상은)’를 다시 듣고 있단다.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잘만 돌아가고 있다’는 내용의 가사가 들었단다. 사실 그들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이르셨단다. 마태오복음 제6장 제 34절에 적혀 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來日)) 일은 내일(來日)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얼핏 생각하기에,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내일에 펼쳐질 일은 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뜻이 되기도 하지만... . 사실 명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명대사도 예수님의 말씀과 맥을 같이 하는 것 같단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Tomorrow is a new day).”

   노자(老子)의 ‘무위자연 (無爲自然)’ 즉,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도 위에서 주욱 늘여놓은 이야기들과 맥을 같이 하는 것 같고.

   내가 사고를 쳐서 애마, 너를 보낸 다음, 네 누나 ‘요안나 프란체스카’도 이 애비한테 생각깊은 말을 했단다.

   “아빠, 우리도 이젠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 아빠도 앞으로 우리 세 모녀한테 그러기를... .”

 

    6. 성전(聖殿)에서

 

    나는 고해소 신자석에 앉아 있었단다.

    나는 고해성사를 보았단다.

    “ ‘코로나 19’가 창궐할 때부터 성당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

   창호지는 떨리고 있었다. 사제(司祭)는 보속해주셨다. 요지는 한 번, 두 번, 세 번 미사참례를 빠뜨리게 되면, 그것이 습관이 되니 반대로 하라고 하셨다. 즉, ‘습관들이기’를 강조하셨단다.

    내 곁을 떠나간 애마, 너한테 이 이야기만은 꼭 들려주어야겠구나. ‘습관들이기’에 소요되는 기간이 정확히 21일이라는 사실. 나는 이 21일이 달걀이 병아리로 깨어나는 기간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걸 진즉부터 알고 지낸단다. 지난 날 내가 인공 부화기로 병아리를 받아내었던 기억을 환기해보아도 그렇단다.

   좋은 습관들이기에도 21일, 나쁜 습관들이기에도 21일. 해서, 틈틈 성모님께 묵주기도도 바치고 있다. 이 글을 적는 내내 농주(農酒)로 즐겨마시던 막걸리 대신, 비슷한 색깔 지닌 ‘두유’를 연거푸 따라 마신단다.

   이 모두 네가 떠나면서, 나한테 건네준 귀중한 선물이로구나.

 

   나의 오랜 벗이여, 안녕. 샬롬!

 

  * 관련 음악 듣기

https://blog.naver.com/kimback249/223225637774?rvid=85BF421AEEB7908F176859498E28E4722CA9

https://lucianokim.tistory.com/55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