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기우제

윤근택 2014. 7. 2. 11:11

 

                     기우제(祈雨祭)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대체로, 시골 농부들은 순박한 편이다. 농사가 풍년인 해에 수고했음에 관해 인사말을 건네면, , 별 말씀을요, 어디 농사를 내가 지었습니까? 하늘이 다 알아서 지어준 건데 . 말하곤 한다. 그리고 농사가 흉년인 해에 위로의 인사말을 건네면, 다 하늘이 한 일인 걸 내가 어떡하겠어요?라고 자위한다. 사실 농사는 하늘이 8,9할대를 좌우하는 편이다. 우리네가 고스톱판에서 항용 말하는 운칠기삼(運七技三)과도 같은 것이다. 대체로, 장마가 긴 해에는 병충(病蟲)이 창궐한다. 또 가뭄이 심한 해에는 수확 자체가 격감된다. 아무리 초현대식 수리시설(水利施設)을 갖추었더라도, 인간의 능력은 여전히 한계가 있다. 예나 이제나 진정한 처결자(處決者)는 하늘이다. 가뭄이 들면, 우리네 농부들은 관개(灌漑)니 주수(宙水)니 양수(揚水)니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보건만, 하느님이 손수 내려주시는 빗물을 당하지 못한다. 빗물은 시쳇말로 한 방의 블루스. 사실 오랜 동안 경험한 바, []를 맞으면 작물들이 쑥쑥 자라곤 하였다. 물조루로 물을 주는 것과 판이하다. 빗물에는 온갖 유효비료 성분이 다 들어있기에 그럴 것이다. 그러한데, 그러한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올 여름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하지(夏至) 무렵에 알맞은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고 했건만. 나의 작물 가운데 한초(旱草)로 알려진 고추와 깨의 농사에는 아직 큰 지장이 없다. 오히려 열대성 식물인 이들 두 작물은 장마가 심하게 든 해에는 흉작을 보기 십상이다. 오죽 했으면, 깨는 포대에 담은 후 자랑하라고 하겠는가. 600여 평 벼농사도 끄덕 없다. 저수지로부터 수로(水路)를 통해 쉼 없이 달려오는 물이 있는 덕분에. 그러나 200여 평 복숭아 농사가 당장 문제다. 살펴본즉,알들이 쭈글어 들어가고 있었다. 어제는 부득이 진종일 밭에다 양수기로 물을 퍼서 뿌려주어야만 하였다. 다들 두루 아시는 바, 복숭아는 무척 물을 좋아하면서도 무척 물을 꺼리는 요상한 습성을 지녔다. 이런 작물 저런 작물을 아울러 생각하자니, 나야말로 우산장수아들과 나막신아들 둘을 함께 둔 어버이의 심정일밖에.

  오늘은 다시 격일제로 24시간 근무를 하는 어느 연수원 사감실에 앉아 있다. 습관인양 벌써 몇 차례씩이나 일반전화기 수화기를 들고 국번 없이 131을 눌러댔다. 기상대가 시간대별로 전하는 일기예보를 생생히 듣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비 소식은 여전히 감감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조금 전 전화기의 벨이 따르릉 울었다. 으레 응대 매뉴얼 대로 예의를 다 갖추어 전화를 받고자 하였으나, 저 쪽 목소리가 거의 나의 말을 막듯 들떠 있었다.

  윤 사감, 경비실 김ㅇㅇ입니다. 윤 사감네 남천면 송백리에 지금 소나기가 퍼붓는대요. 양동이로 마구 퍼붓듯 한대요.

  참으로 감사한 일. 불과 그곳과 승용차로 15분 거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곳은 뙤약볕인데 .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이런 특혜까지 다 받다니! 날이 새기가 바쁘게 맞교대자한테 업무 인계인수를 하고 달려가 보아야겠다. 도구(물곬)도 둘러보고, 미루어둔 들깨묘 이종도 서둘러야겠고 .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농사의 우선 순위는 따로 있으니까. 하여간 이젠 한숨 돌릴 수 있게 생겼다.

  이제 제법 느긋해진 나. 기우제란 제재로 창작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국민학교,중학교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자주 보았던 일이다. 등굣길에 마주친 이 집 저 집 사립에는 금줄(禁줄)이 쳐져 있었다. 그 금줄에는 물병이 조롱조롱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러한 날엔 군수나 읍장이 제주(祭主)가 되어, 어느 신성한 곳에서 주민들과 어울려 기우제를 지낸다고 하였다. 사실 나는 지금이야 천주교인이 되어 있는 터라,그러한 주술적(呪術的)인 제사의 효능(?)을 크게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온 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기우제를 지낸 이후엔 병아리 눈물만큼이라도 비는 꼭 내리곤 하였다. 참으로 용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하느님은 자식 아니 키우시나?가 딱 들어맞는 행사였다. 민심이 곧 천심이니, 하느님도 긍휼히 여기시어 그렇듯 눈물 한 방울이라도 내려줄 법. 실제로 동서고금 각양각색의 기우제가 있어 왔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인디언의 기우제는 그 성공률이 100%라는 사실. 그럴밖에 없단다. 그들은 비가 내릴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기우제를 지낸다지 않은가. 바꾸어 말해, 그들은 비가 내려야 비로소 기우제를 멈추게 된다. 그러기에 인디언의 기우제는, 성공률이 100%에 달하는 어떤 행위의 대명사로 곧잘 쓰인다. 간절하면, 간절히 기도하면 끝내 이루어진다는 걸 새삼 떠올린다.

  그러했던 기우제는 어느새 주요무형문화재 등으로 남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 차츰 멀어져 간다. 이미 삼한시대에 지었다는 상주의 공검지, 제천의 의림지 등의 저수지를 비롯하여 그 많은 저수지와 그 많은 다목적댐을 지어온 덕분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홈통 대신 PVC파이프의 출현 등으로  손쉬운 수로(水路)를 만들 수 있었기에 . 더 나아가, 정부의 보조로 농업용 지하수 개발도 용이해졌고, 다목적댐 구축 등에 힘입은 덕분이다. 그 무엇보다도 양수기(揚水機)의 등장은 우리네 고정관념 즉,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도 허물어 버렸다. 그래서일까,본디 法은 물[]이 흘러가는 대로[] , 물이 저절로 길을 찾아가듯이란 뜻을 지녔음에도, 마저도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하려 들거나 생억지로 적용하는 일까지 곧잘 빚어진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법 적용 등. 한 걸음 더 나아가, 치산치수(治山治水)야말로 국가 통치자의 고전적 최대덕목이었으나,동양의 어느 나라에서는 그마저도 그다지 중요치 않은 것으로 인식하여 무고한 하천을 마구 파헤친 위정자도 있었다. 이른바, 삽질경영으로 그는 그렇게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모두 다 하늘의 뜻이겠거니 믿으며 속수무책 기우제나 지내던 옛 시절 그 비문명시대로 막무가내 돌아가자고 제안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하늘 무서운 줄 알고, 제발 비를 내려주십사 지극정성 기우제를 올렸던 선인(先人)들의 그 정신을 기린다. 특히, 비가 내릴 때까지 끊임없이 기우제를 지냈다는 인디언들의 그 경건함을 기린다.

   끝으로, 하느님께서는 나를 포함한 우리네 농부들을 위해 속히 비를 내려주십사 애원을 하며 이 글을 접는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