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수필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취하다(2)- 수메르(Sumer), 찰흙문명 -
윤 수필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취하다(2)
- 수메르(Sumer), 찰흙문명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보름째 문명발상지 메소포타미아 곳곳을 헤매고 돌아다닌다. 유튜브며 ‘나무위키’며 지도책이며 온갖 매체를 통해, 듣고 읽고 보면서 메모한 것만도 A4용지 20매 분량. 그러는 사이 몸살을 앓고 있는 것도 사실. 누군가가 이처럼 마구잡이로(?) 역사기행을 하는 나더러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관해 한 단어로 요약하라면, 주저치 않고 ‘찰흙문명’이라고 말하겠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면 수메르요, 수메르이면 찰흙이다. 그들 수메르인들은 찰흙을 그야말로 떡 주무르듯 이겨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나니! 그들 찰흙문명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
어릴 적 나는 ‘이기기’의 대가(大家)들을 여럿 보았다. 내 어머니는 칼국수를 빚기 위해 엉키지 말라며, ‘안반’에 밀가루를 뿌려가며 밀가루반죽을 잘도 하였다. 그 다음은 홍두깨로 밀어대고. 중씨(仲氏)는 흙담을 치기 위해 짚 썰어 넣은 논흙을 알뜰히 이기곤 하였다. 학교 담장 옆 ‘흙기와 가마’ 김 사장은 황토를 양손으로, 양발뒤꿈치로 참말로 알뜰히 이겨댔다. 읍내 떡집 아지매는 떡메로 두드려 ‘인절미’를 예쁘게도 만들어내고 있었다. 위 사인(四人)은 공히 완성품을 위해 찰지게, 뉘 하나 없는 자잘한 입자(粒子)로 만들어 가는 그 지난(至難)한 공정을 거쳤다.
수메르인들은 타고난 찰흙공예가들이었던 듯. 찰흙공예가들이었으되, 결코 그들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어리석음’만은 범하지 않았음에 주목하게 된다. 결코, 그들 작업은 ‘날림공사’가 아니었음을. 다만, 둘러보아 쓸 만한 재료에 제대로‘꽂혔던’ 듯. 예를 들면,산 속에다 집을 지을 거면 재목을 나무로 쓰면 될 일이고, 이미 내가 20여 년 전 실천했듯, 돌 너덜겅에 농막을 앉힐 요량이면, 둘레에 흔해빠진 돌로 축대며 농막외벽이며 장독대며 이런저런 치장을 하면 될 일. 이를 달리 말하자면, 일석이조(一石二鳥). 아니, 도랑 치고 가재 잡기.
정말로 그들은 슬기로웠다. 저 튀르키예(구 터키)의 고원지대에서 발원하여 2,700여 킬로미터 달려온 유프라테스강과, 마찬가지로 튀르키예 하레르호에서 발원하여 1,900여 킬로미터 달려온 티그리스강이 합류하는 하구(河口) 초승달 모양의 충적토(沖積土)를 터전삼아 촌락을 이루게 된다. 사실 그들 수메르인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추측만 무성하다. 심지어 우리네 조상 설도 있다. 그 ‘수메르’가 ‘소머리’에서 비롯되었다면서까지. 그들이 이룩한 여러 빛나는 문명의 산물들을 두고, 심지어는 외계인의 왕자(王子)들인‘아눈나키’들이 세운 나라라는 설(說)도 있다. 어느 행성에서 우주선을 타고, 그곳 어느 행성에서 중시하는 금 따위 귀금속을 캐러 지구에 내려왔다가, 노예로 부리고자, 유전자 조작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 사실 나는 이미 오래 전 그들의 찰흙판 그림에서, 헬멧을 쓴 사람, ‘뽈록이 컴퓨터’ 앞에 선 사람, 헬리콥터에 오르는 사람 등등 본 적도 있다. 추측컨대, 그 그림들이 허무맹랑한 상상화는 아닐 듯. 다시 유튜브 등을 통해 공부해본즉, 그 이론, ‘아눈나키 설’은 제법 솔깃했다. 우리네 인류보다 빼어난 우주인들이 지구에 ‘불시착’하여, 유전조작 등으로 어느 생명체에 손대어(?) 유전조작 등으로 인간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 그것이 성경에 이르는, ‘진흙으로 빚은 이한테 (하느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시니... .’와도 제법 통한다는... . 오, 미천한 나는 결코 우리네 인류의 역사를 왜곡하려들지 않는다. 나는 자연과학도였으며, 임학도(林學徒)였고, ‘종(種)의 개념’신봉자이며, 진화론을 주창한‘찰스 다윈’의 이론도 굳건히 믿는 사람이다. 아울러, ‘장바티스트 라마르크’가 제안한 ‘용불용설(用不用說)’도 일부 믿는 사람이다.
다시 수메르인들 이야기이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두 강 상류에서 씻겨 내려온 유기질비료 등으로 농사짓기와 가축 기르기에는 아주 비옥한 토양. 더군다나 관개농업을 하기에도 만판. 해서, 역사는 그들이 인류 최초로 관개농업(灌漑農業)을 한 민족으로도 기록하고 있다. 사실 종족이니 민족이니 따위가 다 뭣이랴? 피 끓는 남녀 간에 잠자리하면 그들 모습을 닮은 새끼가 태어나는 법이겠거니. 그 눔의 해묵은 논쟁거리로(?) 우리네 인류는 숫제 ‘진흙탕 싸움’을, 유사(有史) 이래 여태껏 자기 칼에 피 묻혀 자랑하며 적을 죽였노라 ‘히히덕’을 이어왔나니! 언제고 핵심 통치자 계급의 몇몇만 바뀌었을 뿐, 그 백성의 삶은 언제고 그대로이거늘, 동서고금 ‘전장에 내몰린 오줄없는 희생자들’이여! 내가 그 오랜 동안 역사기행을 해오는 동안 이 점 늘 마음 아파한다.
그들 수메르인들은, 이미 위에서 밝혔듯, 찰흙을 떡 주무르듯 하였다는 게 새삼 놀랍기만 하다. 그들한테는 찰흙이 구하기 쉽고, 다루기 쉬우며, 제작비용이 아주 값싸고, 잘못 된 글자나 그림을 곧바로 고치기도 쉬운 점 등을 고려하여, “바로 이거야!”하며 그길로 최대한 찰흙을 이용하게 된다. 지난날 군대생활 3년 동안 익힌, “지형지물을 이용하라.”를 그들이야말로 기원전 5,000년 여 전 이미 최대한 이용하였던 셈. 심지어, 산새들도 자기네가 구하기 쉬운, 지척의 거리에서 건축자재를 구해 둥지를 만드는 법이거늘... .
지금부터 간략간략 그들의 찰흙문명 산물들을 하나하나 소개코자 한다.
1. 지구라트(Ziggurat)
(이하는 ‘위키백과’에서, 일부 거슬리는, ‘모국어 부려 씀’ 엉터리 등을 수정하여 따다 붙임.)
< 지구라트는 본래 ‘높은 곳’을 뜻한다. 지구라트는 메소포타미아나 엘람의 주신에 바친 성탑(聖塔)으로, 진흙을 뭉쳐 햇볕에 말려 만든 흙벽돌이나 구워 만든 벽돌로 만들었다. 흙벽돌의 형상과 특성을 살린 아치도 이 무렵에 발명되었다.
지구라트의 원형은 우바이드기(Ubaid 期)의 기단(基壇)을 가진 신전이다. 우르 제3왕조에 지어진 우르의 지구라트는 달의 신인 난나르(Nannar)에게 바친 것이다. 기단은 3단인데 꼭대기에 신전을 떠받들고 있다. 지금은 기단만 남아 있고 상층부는 사라졌다.
‘바벨탑’으로 부르는, 유명한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바빌론 성탑은 7층 기단의 성탑으로 ‘마르두크신’에게 바친 성탑이다. 걸프 전쟁 때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진 적도 있다고 한다.>
그들 민초(民草)들 주택도 모두 찰흙벽돌로, 강변에 옹기종기 지었을 거라는 점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테고.
위 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듯, ‘지구라트’는 수메르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공히 지었던 신앙의 산물.‘우루크 왕국’제 5대 왕 왕좌(王座)에 올랐던 실존인물,‘길가메시’도 예외는 아니어서,꽤나 그 신전을 지었을 법. 뒤늦게 내가 천주교인이 되기는 하였지만... . 정말, 양심적으로 고백하겠는데, 성경‘창세기’ 및 ‘구약성경’은, ‘길가메시 서사시’이후에, 적어도 2,000여 년 지난 다음에 적은 글들이다. 대어보라면, 그 당시 성경을 졸속으로(?) 각각 집필한 성직자들 성함도 금세 밝힐 수는 있지만... . 어쨌든, 인류의 최초 서사시인‘길가메시 서사시’가 성경에서 이르는‘노아의 방주’의 모태임을 부인하는 이들은 차츰 줄어들었을 거라고 믿는다.‘길가메시 서사시’를 적은 점토판의 잇단 해독들. 살펴본즉, 과학적으로는, 제 1해빙기, 제 2 해빙기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해수면 급격 상승이나 ‘오랜 홍수’ 등 천재지변을, 그제나 이제나 ‘하느님의 노여워하심’으로 여기기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고. ‘쪼대[(‘찰흙’의 경상도 사투리임.) 판떼기(찰흙판; 粘土板)]’에 여러 버전으로, 필사본까지 수없이 조각 형태로나마 쏟아져 꿰맞춰 해독되는 터에... . 부득이,‘길가메시 서사시’에 관해서는 다음 호에 따로이 소개하여야겠다.
핵심은 기록이다. 문헌이다. 이미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3,000년 ~ 기원전 2,000년에 그 말랑말랑한‘찰흙인절미’에다, 갈대를 펜 삼아, ‘V자 꼴’음각으로, 인류 최초로 문장(文章)들을, 수 만 장 남겼나니! 그 작품들이 허구든, 설화든, 사실기록이든 무슨 상관이랴? 어쨌든, 그 많은 점토판들이 인류 최초의 기록물들이지 않은가?
먼 뒷날, 1,000년여 역사를 지녔던 수메르 쇠망 2,000여 년 후, 수메르 일대를 정복 통일하게 되는 이민족(?)‘함무라비’도 고작 18세 소년에 불과했으며, 그 많은 지구라트만은 함부로 해치지는 않았던 듯. 하기야 정복하는 데 혼이 팔려서 그러한 문화적, 문명적 유물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을 수도 ... . 요행스레, 그러한 함무라비에 관해서는 크게 나쁜(?) 기록은 없다. 다만, 그 수많던 지구라트는 강의 범람 등으로 수몰(水沒)되었거나 허물어져버렸다는 기록은 있지만... . 참고적으로, 현 이라크는 그를 대단한 인물로 평가한다.
그러했던 찰흙문명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근현대에 이르러, 영국의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 경’ (Charles Leonard Woolley, 1880 ~ 1960)’은 그의 아내, ‘캐서린 울리’의 보챔에(?) 힘입어, 그들 수메르인들의 유적지를 기어이 발굴하는 쾌거를 이룬다.
그 일화는 다시 생각해보아도 참으로 감동이다. 여담. 사실 나는 이미 ‘우르’에 관한 글도 십 여 년 전에 적은 바 있다. 울리 경, 그는 유적지 발굴을 위해 연구대원 일행과 함께 토사(土砂)를 1미터 파고 내려가 보아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 더 파고 내려갔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허탕이라고 낙담한 그이한테, 아내 ‘캐서린’이 이런 식으로 독려한다.
“여보, 아니, 존경스런 울리 박사님! 성경에 분명히 적혀 있었다고요. 제발 일 접지 말고 좀 더 파보도록 합시다. 용기내세요. ”
그러자 존경스런 나의 울리 경, 그는 아내 캐서린의 독려에 힘입어, 지하 3미터가량을 더 파내려간다. 울리 경은 그 노력 덕분에, 우리네 인류를, 수메르의 도시국가 가운데 하나였던‘칼데아 (Chaldea) 우르 (Ur)’의 숨겨진 진실에 한 걸음 더 성큼 나아가게 하였다. 그와 그의 부인은, 수메르(현 이라크)의 전설적인 도시,‘우르’를 세상에 낱낱이 밝혀주게 되었다. 정확히 1923년부터 시작된 그의 작업. 그가 이끄는 발굴팀은 성경에 언급된 ‘우르’를 발굴하며 환호하는데, 그곳에서 수백 개 무덤이 있는 묘지가 발견된다. 수십, 수백, 수만의 기록문과 유물이 발굴되었으니... . 기원전 5,000여 년 전부터 시작된 수메르 문명. 이제금 천주교인이 된 내가, 이 점 꽤나 하느님께 불경스런(?) 이야기이긴 하지만, 성경 창세기부터 구약까지 내용이, 그야말로‘빼박’으로, 그들 수메르 ‘찰흙 문명의 산물’에 논박증거로(?) 백일하에 다 드러났으니... . 왜? ‘빼박’. 위에서도 소개하였지만, 읍내 떡 방앗간 아지매가 인절미를 만들었듯, 그들 수메르인들은 인절미처럼 생겨먹은‘찰흙 절편[粘土板]’에다 글씨로, 자기네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원 전 2,000여 년 전부터 꼬박꼬박 다 새겨 넣었으니까. 그 점토판은 깨어져 파편이 되거나, 핵 폭격을 받거나 하여도 영원히 지속되고 복원되는 형편이니... . 모질게 이야기하자면, 성경 창세기만이라도 더 이상 변명 없이 다시 고쳐 써야 할 판. 다 진실로 밝혀진 걸 이제 와서 어떻게 더 이상 왜곡하거나 감추냐고? 설령, 그 수메르인들의 그 수많은 기록물들이 편편 조각이 되어있을지라도, 꿰맞추면 수 천 년, 수 만 년 후에도 판독이 가능할 거라는 걸 그들 수메르인들은 어찌 진즉에 다 알았던고? 여기서 긴급사항. 성경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진 ‘아브라함’의 본명은 ‘아브람’이었고, 수메르의 ‘우르’ 태생이다. 하느님의 이르심에(?) 군소리 한마디 않고, 서너 번씩이나 식솔 이끌고 이사를 하였다는데... . 나는 이 글을 적기에 앞서, 자료를 챙기다보니, 당시 수메르의 사정이 그리 만만찮았다. 그렇게 1,000여 년 번성했던 수메르인들이 크나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 여러 사정 가운데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컸던 것으로 요약된다. 그 비옥했던 메소포타미아 하류의 토양이 오염되었다는 거 아닌가. 토양에 소금기가 늘어나, 곡식 수확량이 급격히 줄어들고, 인구수는 늘어나고, 가뭄이 들고, 그들 젖줄이었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잦은 변덕으로 홍수가 생겨나고... . 해서, 기근이 들자 주민의 3/5이 수메르 북부로 이주하고, ‘우르’를 비롯한 남쪽 도시국가는 숫제 공동현상(空洞現像)에 이르렀을 거라는 거. 기원전 5,000년 무렵 정착한 수메르인들의 역사에 비추어, 기원 전 2,166년 무렵 수메르 도시국가, ‘우르’에서 태어났다는 아브라함. 그의 삶도 그리 녹록치 않았을 듯. 더군다나, 본댁, 작은댁과 각각 배다른 자식까지 두었던 터이니... . 그러한 사회 분위기로 인하여 그도 고향을 버리고, 두세 번 이곳저곳 떠났을 듯도 한데... . 뒷받침되는 내용은 이러하다. 더해서, 그때 기술(記述)한 인물들의 나이가 요즘 식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100세 이상으로도 기록되는 점 등을 감안하면... .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분부대로가 아닌, 먹고 사는 문제로 식솔들을 이끌고 이곳저곳 이주했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를밖에... . 그의 본향이었던 수메르가 딱 그러한 환경이었으니까. 설혹, 신앙인인 내가 하느님한테서 벌 받더라도, 말은 바로 해야겠다. 다음은‘믿음의 종’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에 관해 뒷받침되는 사항이다. 다시금 이야기하지만, 당시의 나이 계산은 요즘과 달리, 아주‘개판’이었음을 감안하고 훑어보시길. 아래 ‘위키백과’ 에 의하면, 수메르 패망시기 기원전 2,000년 쯤 - 아브라함이 수메르 우르에서 태어난 때 2,166년 쯤 = 166세(두 배 튀겨서 60세가량. 사실 이 나이 계산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그 당시는 ‘뻥튀기 나이 계산법’?.
‘위키백과’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 후 기원전 2,000년 쯤에 유프라테스강 서쪽 즉 아라비아에서 온 셈족 계통 아모리인이 수메르 지방을 점령하고 고대 바빌로니아를 세웠다. 고대 바빌로니아 건국으로 수메르 문명의 국가 형태는 완전히 사라졌다.(이하 생략)>
‘인절미처럼 빚은 무른 찰흙판에다, 갈대의 대궁을 칼로 쐐기 형태로 썩뚝 베어, 펜촉삼아 ‘V꼴’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음각(陰刻)하고... . 그것도 못 미더워서, 후대에 길이 물려줄 내용의 점토판은 섭씨 1,500도가량의 불에다 구운 그 지혜여! 당시 청금석(靑金石)이 귀하자, 자연산 석유 분출물 역청(瀝靑; 아스팔트 성분)이나 코발트나 재[灰)] 로 숫제 인류 최초 세라믹을 만든 그 예지력이여, 통찰력이여!
이 지구라트는 하느님한테로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 손을 잡으려는 수메르인들의 염원을 담은 피라미드이다. 수메르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패망하고, 위에서 언뜻 소개대로, 그때부터 2,000여 년 후 수메르 여러 나라를 통일한‘함무라비’는, 자기 업적으로 인류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알고 지내왔던‘ 함무라비 법전’을 편찬하게 되는데... . 그것 또한 ‘우르남무(Ur-Nammu)의 법전( - 法典, 영어: Code of Ur-Nammu)’을 기초로 한 것에 불과하다. ‘우르남무의 법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법전으로, 찰흙판(점토판)에, ‘V꼴’갈대 대궁을 펜촉삼아, ‘쐐기꼴[楔形]’로 음각(陰刻)해 나간 ... .그것이 기원전 2100~2050년 일인데, 함무라비 당신이 어디다가 감히?
그들 수메르인들의 ‘찰흙문명의 산물’ 가운데에서 특히 ‘지구라트’는, 함무라비 이후에도 계승이 된다. 파괴가 아닌 계승, 그 점은 대단히 인류학적으로도 고마운 일. 지난 호에 이미 소개한 ‘신바빌로니아의 제 2대 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 그는 함무라비가 세웠던 ‘고바빌로니아 제국’을 승계하겠다는 의지로, 굳이 나라 이름을 ‘신바빌로니아’로 정한다. 아울러, 약탈과 정복을 일삼았으되, 고맙게끔,‘수메르의 정신’만은 끝끝내 버리지 않았다. 사실 위 함무라비와 마찬가지로, 순수 혈통도 아닌 수메르의 방계(傍系) 후예였으나... . 그는 수메르 패망 이후 1500여 년 이후에 나타난 인물(재위: 기원전 604년 ~ 기원전 562년)로서, 신바빌로니아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다. 그는 정복왕이기도 하였지만, 건축왕이기도 하였다. 수도 바빌론에 ‘바빌론의 문’, ‘(최고의 신)마르두크 지구라트’, ‘(메디아 출신, 메디아를 위한)바빌론의 공중정원’ 등 여러 건축물을 세운 왕으로도 유명하며 구약성서 다니엘서에서는 유대와 예루살렘을 정복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윤 수필가가 다시 주목하는 점. 신바빌로니아의‘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자기로부터 4,000여 년 전에 살다간 수메르인들의 눈부신 문명을 승계, 재현하고자 애썼다는 거. 그 점 참으로 가상하다. 그는 위에서 소개한 지구라트를 재현하는 한 한편 결혼동맹으로 정략결혼한 ‘메디아 왕국’의 ‘아미티스’ 왕비의 향수를 달래주고자 지었다는‘바빌론 공중정원’을 건축했다는 점.
잠시. 나이 일흔에 이른 나도 ‘네부카드네자르 2세’같은 정열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 싶다. 하기야 인도의 무굴 제국의 5대 황제인 샤 자한의 아내 뭄타즈 마할이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g라자 무려 22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공들여 흰 대리석으로 ‘타지마할’을 건설하였다. 하기야, 최근‘주식회사 00민국’의 왕은 자기 아내를 너무도 사랑하는 나머지 국민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비상계엄령도 선포했다고 하더라만... . 다시 ‘네부카드네자르 2세’. 그는 그야말로 ‘꽂혀서’의 정도에 그치지 않고, 청색의 흙벽돌로 최고의 신(神)인 ‘마루두크’를 기리고자 계단계단 테라스로 꾸민 지구라트의 최상단 을 마감하는 대역사(大役事). 그 규모만 하여도 기단(基壇)이 가로 세로 120미터가량 되었다니... .
인류사 가운데에서 유일무이 ‘찰흙문명’ 위업을 이뤘던 수메르인들. 이제 그들은 가고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고운 밀가루’를 다루듯 하였던 ‘찰흙 문명’은, 인류 최초 문자인‘점토 쐐기문자’로, 지구라트 벽돌로 영원히 남으리. 설령, 그것들이 파편으로 남았더라도, 금세기에 들어 꿰어 맞추어 거지반 해독을 하였다니... .
‘문자여, 영원하라. 기록이여, 영원하라.’
다음 호 계속)
작가의 말)
아직 제 ‘메소포타미아 역사 기행’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길가메시 서사시’를 비롯해서, 그들 수메르인들이 우리네 인류한테 ‘문자(文字)’로 끼친 영향은 아주 대단하거든요.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