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어떤 보람(4)

윤근택 2014. 9. 18. 21:14

 

 

                         어떤 보람(4)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우선,이 글은 어떤 보람(1),어떤 보람(2), 어떤 보람(3)의 후속작임을 밝혀둔다. 그러기에 지난 번 제 10()에 이어 제 11화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어떤 보람(3) 말미(末尾)에다 창작후기라면서 독자님들께 이미 다음과 같이 밝혔음을 상기해 주었으면 한다.

다음 이야기도 내가 귀인(貴人)을 만난 내용이 펼쳐질 것이다. 오랜 동안 써 왔던 연애편지가 1톤 용달차 한 대 분량은 될 나. 그것이 수필작가가 된 원동력이었으며, 변형된 어떤 연애편지가 내 지난 직장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저력이었으나 .

위와 같이 독자님들께 예고해 둔 바, 나는 어떤 일에 관해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음을 짐작하실 것이다. 한마디로, 나는 그분께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이다.

11. 연애편지를 제대로 썼던 청년

갖은 고생 끝에 드디어 취업시험에 합격했던 나. 나는 1984 2월에 대학 졸업식이 아닌, 대학 실업식(?)을 했다. 그리고 그 해 8월에 국영기업체 공채에 당당히 합격을 했다. 그러니 사실 넘고 쳐진 일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나름대로 그 기간 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다.

그 해 10월말께 고향인 청송전신전화국(KT 청송지점의 옛 이름)에 발령을 받았고, 곧바로 지금 내 아내인 노처녀를 꾀어 와서 동거를 하게 이르렀다. 사실 내가 세 살 위인 그녀한테 거의 일방적으로 줄기차게 연애편지를 썼던 덕분(?)이다.

 첫딸 초롱(현재는 현지로 개명했다.)이가 걸음마를 익힐 때에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녀석은 의자를 붙잡고 일어서서, 책상 위 책꽂이의 책들을 방바닥에 어지러이 흩여 놓았다. 그 책들을 정리하다가 충북대 농과대학 임학과 동문 명부가 눈에 띄었다. 그 해로부터 벌써 수년 전에 발간된 책. 나는 그 명부를 뒤적이게 되었다. 지방대학의 비인기학과를 졸업한 내 선배들이 대체 다들 무얼 해먹고 사는가 궁금하였다. 1회 선배들부터, 학번상 가나다 순으로, 당시 직업까지 소개되었던 명부. 학번상 1번인 분이 바로 OO였다. 그분의 근무처가 체신부 경리과로 되어 있었다. 내가 몇 가지 상상해 보기에 충분했다.

대성한 분 같아! 임학을 공부하신 분이 체신부 경리과라니 . 1982년도에 체신부에서 통신 분야가 떨어져 나와 국영기업체인 한국전기통신공사로 발족했다는데, 처우가 대폭 좋아진 이곳으로 말을 갈아타셨을는지도 모르겠어! 꼭히 그렇게까지는 않으셨더라도 나 쪽 지체 높은 분들과 한솥밥을 드셨을 터이니 .

 나는 취업 인사차 모교 학과 교수님들 방을 돈 적이 있었고, 그때 선배이자 교수님이자 나와 종씨인 OO 교수님께서 흘려주시던 정보를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자네, 축하혀. 우리 선배 가운데도 그 분야에 계시는 분 있어. 전신전화국장 하는 분도 계셔. 아마 청주전신전화국장으로  계셨을 거여. 

내 호기심은 곧바로 기지(奇智)로 이어졌다. 청주전신전화국 민원부서에 전화를 걸어, 내 신분을 밝힌 후 무얼 하나 문의할 게 있다며, 하여간 그곳에서 최고 오래 근무한 직원을 바꾸어 달라고 하였다. 그가 산 증인이기에. 그랬더니, 맨 처음 전화를 받았던 이가 어떤 이한테 전화를 바꾸어 주었다. 그는, 내가 찾는 OO가 자기 당숙이며, 그곳 국장으로 근무한 적은 있으나, 충북대 임학과 졸업자가 아닌 고려대학교 행정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분이라고 알려 주었다. , 동명이인일 거라고 했다.사실 흉보는 것 같지만, 그의 학벌을 짐작할 수 있는 점이었다. 학사 과정은 그랬더라도 석사 과정과 박사 과정은 전공을 달리 할 수도 있는 것이니. 내가 찾는 그분은 내 기대 대로 말을 갈아타고 우리 회사 본사에 계심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분이 자랑스러워 들뜬 맘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여비서가 전화를 받았고, 회의 중이시라며 나 쪽 전화번호를 메모로 남겨 놓겠다고 하였다.

걸려왔던 첫 전화. 애송이 사원이었던 나는 부회장급이었던 그 선배님의 목소리에 아직도 떨리기만 한다.

OO입니다. 충대 임학과 출신이라고요? 그곳 시골 전화국엔 언제 내려갔어요?

그분은 내가 이제 갓 입사한 직원이며,새까만 학과 후배인 줄을 전혀모르셨다. 전화국장 쯤 되는 줄 아셨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나의 연애편지는, 제대로 된 연애편지는 시작되었다. 여기서잠시 다른 이야기로 쉬어가기를 하자. 사실 나는 국민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공부를 놓친 일이 너무도 많았다. 감성이 철철 넘쳐 창밖에 눈 내리거나 비 내리면, 영어사전도 접어야 했고, 취직영어책도 접어야 만 했다. 대신, 길고 긴 연애편지를 이 소녀, 저 숙녀한테 줄기차게 써야만 했다. 고시를 공부하는 이들이나 학위 공부를 하는 이들보다 외려 잠 아니 들고 책상맡에 앉아 있던 시간은 더 많았고 더 길었으면서도 . 그러한 성향이 학생으로서는 치명적 약점이었지만, 비록 초급사원이나마 일자리를 구한 터라 그 약점을 장점으로 적극 돌려 써야겠다고 벼르던 참이었다. 그리하여 수필 장르야말로 변형된 연애편지임을 깨닫게 되었고, 끈질기게 여러 매체에 투고하여 수필작가로 기어이 문단에 데뷔한 처지였다.

다시 그분에 관한 추억담이다. 선배님은 답장을 친히 적어 부쳐주었다. 가로쓰기가 아닌 세로쓰기 글씨였다. 요지는 다음과 같았으며, 여태 고이 간직하고 있다. 사실 너무도 엄청난 내용이 담겼던 터라 오히려 내가 맥이 풀리고 초라하게 느껴지게 했던 기억 새롭다.

윤형, 내 선친의 친구분이 체신부 본부에 계셨어요. 군말 말고 보따리 싸서 당신 곁으로 오라 해서 마지 못해 왔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중략) 학형(學兄), 올해 뽑은 신규사원은 내규상 2년 전보제한이지요. 그리고 지역본부에 가자면 앞으로 5년 걸려요. 2년 후엔 대구본부에 가 있어야겠고, 그리고는 이곳 본사 나의 곁으로 와야겠지요.(하략)

그분은, 경북 어느 시골마을에서 황소 판 돈으로 청주에 공부 사러 갔던 이 촌놈더러, 단지 학과 후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의 인생항로를 거의 다 설계해 주었다. 충청도 양반이 말이다. 그 한 통의 편지에는 모든 메시지가, 모든 힌트가 다 담겨 있었다. 그분은 길라잡이였으며 징검다리를 놓아준 분이다. 하지만, 여러 차례 서신 교환 끝에 나는 지레 사양하였다.

선배님, 말씀은 참으로 감사하오나,저는 직장인으로서 어느 지위에까지 오르는 것보다는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로 기록되길 더 바랍니다.제 그릇이 종지인데 사발 만큼의 낟알을 담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참말로 그랬다. 계절이 바뀌면 계절이 바뀌었다고, 울릉도 달래와 미역취가 이런 나물입니다. 등 편지 써서 부치고 선물 부치고 그렇게 하였다. 아내와 함께 정성들여서.

그분의 후배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우리 직장의 대구경북 총수가 바뀔 적마다 그 어른께 이 후배 자랑을 전화상으로 늘어지게 하여 나한테 곧잘 바쁜 걸음(?)을 치도록 하셨다. 비서실장이 내가 근무하는 부서로 달려와서 서울 쪽 어떤 지체 높은 분의 전화를 받으라는 등. 사실 그분은 어른 말씀 잘 아니 듣는 이 후배를 늘 안타까이 여겼다. 그분의 부인, 즉 형수님께서도 어쩌다 나로부터 문안전화를 대신 받으셨는데, 그분마저 전화를 받으실 적마다 나를 안타깝게 여기셨다.

그 어른은요, 늘 경상도 후배님 걱정이신 걸요. 유능한 인재가 시골에 묻혀 있어서야 되겠냐면서요. 문학도 좋긴 하지만요, 그 어른 뜻을 따르시지 않고서요?

 내가 사우문예(社友文藝) 수필부문 당선자로 본사에 가본 적 있다. 그때 선배님을 딱 한번 뵈었다. 수필 당선 건은 대견스러워 하셨다. 돋보기 안경을 한 개도 아닌 두 개, 세 개 겹쳐 끼고 업무에 열중이시던 분. 나중에 차차 제삼자 등으로부터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분은 학구파여서 행정학 석사 학위수여는 물론이고, 회계사에도 합격하였다고 한다. 나아가서, 당시 KT에서 그분이 호주머니에 자격증과 면허증을 최고로 많이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보일러 기사 자격증까지도 가지고 있었으며, 어느 전화국 국장으로 지낼 때에는 전화국 사옥 개축 설계도 직접 했다고 한다. 그 뿐만도 아니다. 맨 처음엔 우편행낭부터 짊어졌던 양반이라는 거 아닌가. , 우편배달부로 시작했다는 말이다. 하기야 내 모교 충북대는 내가 입학할 때까지만 하여도 단과대학이었고, 농과대학 중심이었다. 그러니 그분의 임학과 재학시절 실력부터도 나의 실력과 현격하게 달랐을 법. 그분은 나한테 한국전기통신공사 정관(定款)이며, 전기통신기본법령이며 각종 약관이며 온갖 근간 마련에 직접 참여했다고 술회하신 바 있다. 그분 부인, 즉 형수님은 술회한 바 있다.

그 어른 대단히 억척이세요. 세월이 야속해서 그렇지 은퇴하신 후엔 서울시립대학에 출강까지 하시는 걸요!

 세월이 너무도 매정하게 흘러가버렸다. 그분 자택은 서울 흑석동이었고,전화번호는 02-XXX-2266이었는데, 중간의 국번호조차 잊어버렸다. KT 직원이었던 나는 그분이 계시어 국내의 그 어느 명문대학 출신자보다도 백 그라운드가 좋았다. 아니, 외국의 명문대학 출신자보다도 백 그라운드가 좋았던 셈이다. 음으로 양으로 나한테 도움이 되어 주었던 분. 그분은 나의 훌륭한 후견인이셨다. 그런데 내가 얼마나 싹아지 없는 녀석이냐고?  내가 더 이상 그 어른의 도움 없이도 자력(自力)으로 직장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깊이만치 그분과 교신 회수도 드물어졌으니 말이다. 심지어, 나마저도 그 직장을 명예퇴직 하고부터는 아예 문안전화도 드린 바 없으니 .  오죽했으면 우리네 속담에도 검은 머리털을 지닌 짐승은 남의 은공을 모른다.고 했을까? 지금 그 어른께서 생존해 계시기는 할까? 문안 여쭤 보자니, 너무 염치가 없는 것 같아서 . 어디에 살아 계시고, 어느 독자께서 이 글을 읽고 그분께 풍문(風聞)이라도 내 소식 전해 드리면 좋으련만 .

끝으로, 독자님들께 덤으로 알려드릴 게 있다. 나는 줄기차게 수필이란 이름으로 글을 적고 있는데, 그것은 아직도 못다 쓴 연서(戀書). 달리 말해, 나는 수필을 쓰는 게 아니라 변형된 연서를 쓴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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