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보람(6)
어떤 보람(6)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이번엔 제 13화(話)다. 여태껏 이 연작(連作)을 적고 보니, 일종의 ‘자전적(自傳的) 수필’ 같다. 어쨌든 좋다. 힘닿는 데까지, 기억나는 데까지 더듬어 적어보련다.
13. 무식해서 용감했던 청년
미리 말하건대, 나는 문예대학도 다니지 않았으며, 개인교습(?)도 전혀 받지 않았다. 오로지 독학으로 수필문단에 올랐다. 사실 사춘기에 문학소년이, 문학소녀가 아닌 이가 있었으랴! 나도 문학소년이었으되, 좀 별스러웠다. 스스로 시(詩)라 여기며 적어서 이리저리 신인상 내지 신춘문예에 투고하곤 하였다. 고등학생일 적에는 흔히들 명성 있다는 시인이나 원로 대학교수 등한테 편지를 곁들여, “제 시를 한번 봐 주세요.” 또는 “저한테 시를 가르쳐 주세요.” 하면서 보챈 적도 많았다. 그분들은 전혀답해 오지 않았다. 만약에 어떤 이가, 육십을 바라보는 수필가이며 문단경력이 사반 세기 되는 지금의 나한테 수필창작을 지도해 주십사 한다면 차마 그러지는 않을 테지만… . 하여간 나는 무모했다. 무식해서 용감했던 청년이다.
그러했던 나는 장르를 달리 선택했다. 바로 수필이었다. 기왕에 수필은 산문이고, 나는 연애편지를 수 없이 적어왔으니 수필쓰기만은 가능한 일이 아니겠냐고 막연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지나친 감상(感傷)으로 말미암아 창밖에 눈 내리거나 비 내리면, 모든 책을 덮고 연서(戀書)를 마구 써댔으니, 학생으로서 잃어버린 학습시간이 얼마겠냐고? 어렵사리 입사시험에 합격하여 직장에 가보니, 나와 똑 같이 4년제 대학 출신인 이들이 과장급으로 이미 들어 와 있었다. 누적된 학습량 결손의 결과가 그렇게 컸다. 시간이 갈수록 계급 격차는 더 늘어갈 게 뻔했다. 나는 그들을 대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달리 찾고자 하였으며, 니체의 ‘곱사등이 비유’를 생각하였다. 즉, 곱사등이의 혹은 그에게 치명적 약점이지만, 그걸 떼내면 그가 그만 죽게 된다는 비유였다. 달리 말해, 그 혹은 곱사등이를 살리는 힘이라는 것이었다.
1989년 3월이었다. 사무실 창밖에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나한테 50원짜리 관제엽서가 한 통 배달되었다. 발신인은 <<월간에세이>>였으며, 내용은 ‘ ‘우산’ 초회 추천 축하합니다. 천료작을 기다리겠습니다.’였다. 보아하니, 어느 여성이 육필로 적은 엽서였다. 사실 나는 그 잡지사에 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또, 그 잡지사에 원고를 투고했는지 여부도 잠시 모르고 지냈다. 내가 그 잡지사에 초회추천을 받은 사실을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좀 더 거슬러 올라가야 되겠다.
당시 나는 삼 십대 초반이었고, 신혼이였으며, 단간방이었고, 간난아이 여야(女兒) 둘을 두고 있었다. 수필작가가 기어이 되겠다고 벼르고, 정통코스라 여기며 밤마다 글을 적어 문인협회 기관지인 <<월간문학>>에만 투고하곤 하였다. 계절호마다 1명씩 신인을 뽑던 그 제도. 모르긴 하여도 현재까지도 그 제도는 이어질 것이다. 한국 수필가 가운데 나보다 그 <<월간문학>> 신인상에 도전한 회수가 많았던 이도 드물 것이며, 나보다 최종심에 자주 머물렀던 이도 드물 것이고, 나보다 원로라고 하는 여러 수필가들의 심사평(나의 글을 당선작으로 뽑지 못한 이유도 적힌 심사평)을 자주 읽은 이도 드물 것이다. 당시 내가 알기에 <<세계일보>>가 유일하게 수필부문 신춘문예가 있었는데, 그 매체에서도 나의 ‘댓잎편지’란 작품이 최종심에까지 올랐음을 뒤늦게, 그것도 남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하여간, 내리 낙선만 하였다. 연세 지긋한 작가들께서는 두루 아시겠지만, 아마투어한테는 투고한 원고가 일체 반환 아니 되며, 또 다른 매체에 투고하자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다시 육필로 원고지에다 옮겨 적어야만 했다. 내 아내의 수고도 만만찮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낭보(朗報)를 접했다. ‘대구매일신문’의 문화면에 수필 신인상 등을 뽑는 문학잡지 등을 쫘악 소개해 두었던 것이다. 나는 도표를 그렸다. 잡지명,뽑는 주기,주소, 투고 여부, 결과 등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일람표를 그렸던 것이다. 그러고서는 ㄱ사에 투고했다가 낙선한 작품을 ㄴ사에, 다시 ㄷ사에 보내는 식으로 투고를 이어나갔다. 사실 지령(誌齡)이나 잡지사 성향 등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위 단락에서도 소개했지만, 필적이 나보다 나은 아내의 수고가 더 많았다. 그는 나의 원고를 또 다른 원고지에다 베껴 써 주곤 하였다. 여담이지만, 그러다가 그도 반은 수필작가가 되었다. 그러했던 결과, 위에서 밝힌 <<월간에세이>>에 초회추천 받게 되었다. 나는 이내 들떴다. 해서, 아는 수필가한테 어덕하면 좋겠냐고 여쭤 보았다. 발행인은 ‘동양에레베이터(그 회사 고유명사다.)’ 사장인 원종성 수필가이며, 그분은 강원도 횡성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분이고, 자존심이 대단히 강한 분이며, ‘동양에레베이터’에서 문화사업으로 만드는 잡지이고 등등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래도 예의는 갖춰야겠다고 여기며, 그 잡지사이자 그 회사인 곳 여비서한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와 은밀하게 약속했다. 사장님이자 발행인인 그분이 재실(在室) 중일 때를 골라 무작정 상경하기로 하였다. 이 무식쟁이는 감행했다. 열차를 타고 물어물어 그 사무실에 당도했다. 그러기 전 백화점에 문을 열 때까지 초조히 기다려 고급 구두표를 한 장 사 들고서. 사장실에 다녀온 여비서는 매우 난처해 했다.
“선생님, 저희 사장님께서는 선생님을 만나지 않으시겠다고 하세요. 그냥 돌아가시는 게 낫겠어요. 참으로 죄송해요. 대신, 천료작 부지런히 다듬어 부쳐 주세요.”
같은 해 8월호에 ‘메뚜기’란 작품으로 천료되었다고 엽서를 또 받게 되었다. 이를테면, 커피 한 잔 대접하지 않고, 오로지 작품만으로 천료를 받았다.
그 해 겨울, 나는 색다른 엽서 한 장을 또 받게 되었다. 어느 날 어느 시간에 어디에서 신인상 수상자들 환영회를 겸한 인터뷰(무얼 말하는지 그분들은 그렇게 불렀다.)가 있으며, 동시에 회원들 송년회를 연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의관을 정제하고 그곳으로 갔다. 나는 거기서 바바리코트를 입은 원종성 사장 겸 발행인을 뵙게 되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자리를 옮겨 와인을 마실 때가 문제였다. 옥스퍼드 대학을 나왔다는 남자 박사라는 양반과 서울 어느 명문대학을 나왔다는 얼굴 반반한유한부인과 또 여럿 되는 딸랑이들. 그들은 외국의 어느 낯선 거리 이름을 대면서, 그곳으로 문화기행을 가자는 등 문학여행을 가자는 등 요란을 떨어대기 시작하였다. 사실 그때까지도 그들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있는 우리네 신인들한테 위로와 격려와 축하 따위의 말을 한 마디라도 하는 이 하나 없었다. 명색이 신인 환영회라고 타이틀까지 붙여 두었는데… . 나는 술김에 화가 치밀었다. 앞도 뒤도 가릴 것 없이,”선생님들은 하나같이 ‘브루조아’네요. 저는 곧바로 대구로 내려가야겠어요.” 해버렸다. 그러자 원종성 사장은 나를 향해 크게 노여워하였다.
“윤근택씨, 난 진작부터 당신 싹수 알고 있었어. 초회 추천 받고서 그렇게 덤벙대고 올라오면, 내가 인정에 끌려 글도 아닌 글을 앞으로 뽑으란 말이였어? 그리고 말이야, 우리 회사에 보내온 원고가 사본이더군. 다른 잡지사 등에도 기웃거렸다는 거 아냐? 그게 무슨 글 쓰는 이의 자세냐고? 나더러 남이 버린 쭉정이를 차지하라고 한 거였어?”
그 날 이후 여태껏 내가 그분의 성품 등을 통해 얼마나 부끄러워했는지 모른다. 예술을 돈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절대 아니 된다는 거, 문단 데뷔를 마치 자격증을 사듯 따듯 해서는 아니 된다는 거,인맥 따위로 문제를 해결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 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사실 그 길로 나는 그분들이 말하는 ‘에세이스트(그 잡지 출신자들은 ‘수필가’라고 하지 않고 그렇게 부른다.)’에서 제명되었다는 후문도 접했다. 또 수필가로서 원종성은 그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해, 역량미달의 수필가를 붕어빵을 굽듯 함부로 찍어내지 않으며, 초회 추천을 해주고서도 몇 해가 지나도록 천료를 해주지 않은 예도 비일비재라고 나중에야 남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모지(母誌)라고 불러야 옳을 그 잡지에 단 한 편의 수필도 발표할 기회도 없었으며, 그분께 사죄의 편지를 여러 차례 적어 부쳤으되 용서를 받은 적도 없었다.
남들은 그분에 관해 어떻게들 평하는지 모르나, 그분 원종성 수필가야말로 내가 진정으로 존경하는 수필작가다. 그분은 내가 수필가 자격으로 만난 최초 귀인(貴人)이었다. 그 꼬장꼬장함이, 그 강한 자존심이 그 잡지 출신 수필작가들 몇몇을 대가(大家)로 만든 원동력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부산 부경대 영문학과 교수로 지내는 박양근 수필가 겸 평론가, 대구에서 어느 약국을 경영하는 허창옥 수필가, 광주에서 한 때 대학 문학강좌를 맡았던 최정자 수필가 등이 바로 그러한 분들이다. 그 외에는 내가 아는 이 별로 없어 아쉽다. 물론, 나는 그러한 축에 끼지 못할뿐더러 언제고 수필계 이단자이지만… .
어차피 일이 그리 되었지만, 어느새 지령이 27세쯤 되는 <<월간에세이>>의 무궁한 발전과, 그 잡지 발행을 맡았던 원종성 수필가의 빛나는 문업(文業)을 이 글을 빌어 다시 기원한다. 아울러, 더 이상 나의 글을 뽑아주었던 그분한테 누(累)가 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내내 뼈를 깎는 노력으로 제대로 된 글을 적어나갈 요량이다.
아무튼,두루두루 감사하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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