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어떤 보람(8)

윤근택 2014. 9. 22. 20:27

                         어떤 보람(8)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자전적(自傳的) 수필  연재물은 이제 15()에까지 닿았다. 우리는 이따금씩 어느 사회에 속한 일원의 힘이 너무 미약하다거나, 어느 조직 내 일개인의 힘이 하찮다거나 하는 말을 하곤 한다. 달리 말해, 일개인이 사회를 바꾸거나, 어느 조직 내 뿌리깊은 관습이나 고정관념을 바꾸거나 하는 게 참으로 힘들다고 믿는 거. 그러나 시절인연(時節因緣)을 만나게 되면, 즉 운때(運때)가 맞으면, 영광스럽고 보람된 결과를 얻는 수도 있다. 마치 물때가 맞으면, 어부나 낚시꾼이 물고기를 엄청 잡을 수 있듯이.

 

15. 자기가 다니는 회사더러 돈을 115천여 만원을 쓰게 한 남정네

 

때는 1991,장소는 울릉전화국. 나는 그곳 민원부서(창구) 과장대리로 재직 중이었다.

어느 날 우리의 밴댕이 속 같은 수장(首長)인 국장은 창구에 내려와서 심술을 부려댔다.

거 말이야, 독도 민원인 이 아무개 전화번호를 컴퓨터가 자동으로 부여하는 번호를 그대로 주고 말어. 그 인간, 괜히 골치 아픈 일만 만들었잖아!

사건인즉, 이렇다. 독도 어로권을 가진 유일한 주민 아무개 노인의 사위인 민원인. 그는 청와대 민원실에다 민원을 제기했다. 요지는 이러했던 모양이다.

명색이,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면서, 이곳에 일반전화가 없어서야 되겠느냐? 불편해서 곤란하니 일반전화 한 대를 놓아주십사.

그 민원이 채택되어, 청와대에서는 당시 국영기업체였던 한국통신(KT의 지난 이름임.) 본사에다 떠넘겨 일반전화 한 대를 놓아주라고 했다. 이에 한국통신 본사에서는 한 대의 전화를 놓기 위해 무려 2억여 원을 들여 가설공사를 발주하였다. 기술도 좋지! 마이크로웨이브(무선) 방식의 일반전화를 그렇게 놓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의 밴댕이 수장이 그렇게 심술을 부린 거냐고? 본사에서 직접 발주치 않고, 예산을 하달하여 자신이 공사 발주책임자가 되었더라면, 떡고물(?) 꽤나 떨어졌을 테지만 .

번호는 그의 지시대로 컴퓨터가 자동으로 내어주는 번호로 정해졌다. 물론 나는 그 업무 담당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말이 되냐고? 거금 2억여 원을 들여, 그것도 국토 막내둥이인 독도에 놓게 될 번호가 그 꼬라지가 되어서야 어디? 며칠이 지나자, 상부기관인 대구본부에서 그제서야 뭔가 짚였던지 의미 있는 번호를 찾아 번호교체부여 하는 게 어떻겠냐며 국장한테 전화를 했던가 보다. 피동적이고 소극적이기는 본부 양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국장은 형식적으로 전직원을 대상으로 번호 공모(?)에 나섰다. 그러나 다들 이구동성으로 국장 자신이 머리를 짜내 창출했다는 1228(개통일 1228)옳소!옳소! 하였다. 멍청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거나하게 술에 취해 퇴근한 나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내가 한걱정을 하였다.

초롱이 아빠, 오늘 사무실에서 안 좋은 일 있었어요?

내가 그 번호 건에 관해 괴로워한다고 하자, 아내조차도 그런 거 남들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두라고 무책임한 말을 했다. 어쩌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모양일까? 그러나 그것은 정말 아니었다. 거의 뜬눈으로 뒤척이다가 비로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바로 1991이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전화번호 부여 담당자한테 1991 결번 여부를함께 컴퓨터 조회해 보자고 부탁했다. 결번이되, 대구전산국에서 특별 번호로 붙들어 둔 번호였다. 나는 즉시 대구전산국 당해 업무 담당자인 입사후배한테 전화를 걸었다.

김 대리, 그 번호 풀어줄 수 없을까? 우리 전화국에서 꼭 필요해서.

그랬더니, 그는 누구 부탁인데 감히 거절하겠냐며 흔쾌히 풀어주기로 하였다. 평소 나를 좋아했던 그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는 워드프로세서로 작업하여 A4용지 한 장 분량의 보고서 내지 건의서(?)를 작성하였다. 그 자료를 과장한테 건네줌으로써 국장께 보고토록 한 것이다. 사실 당시 국장은 완고하여 나 같은 과장대리급은 자기 방에 회의를 하자는 등으로 부른 적도 없었으니까.

0566(당시 울릉도 지역번호였음.)- 791(울릉도 유일한 국번호)-1991

나는 굳이 그 울타리번호(첫 번호 숫자와 끝 번호 숫자가 동일한 걸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1991을 부여해야 하는 이유도 낱낱이 타이핑 하였다.

. 역사인식 : 1991년에, 일본이 아닌 한국이, 그 어느 통신회사도 아닌 한국통신이 맨 처음 독도에 일반전화를 놓아주었음.

. 국토 막내둥이에 대한 사랑 : 1991한번 구경, 구경 또 한번 .으로 새김으로써 우리 국토 막내둥이인 독도에 한번 가 보았으면 좋겠다는 애정을 담음.

. 독도의 풍광 등 : 맨 좌측 1는 삐쭉 솟은 바윗섬 동도(東島), 맨 우측 1은 삐쭉 솟은 바윗섬 서도(西島)를 나나태며, 중간의 99는 동도와 서도를 자유롭게 날으는 괭이갈매기의 울음소리임.

명색이 수필작가였던 나는 작가답게 위와 같이 의미부여를 하여 계통도에 따라 건의를 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고? 당시 국장과 함께 같은 자리에 있던 과장을 통해 들은 바다. 그 아첨쟁이 국장은 곧바로 울릉경찰서장한테 전화를 따르르 걸더란다.

영감님, 우리가 좋은 번호를 하나 따냈어요. 가설비 등은 전혀 들지 않으니, 이번에 독도경비대에다  전화 달지 않겠어요?

사실 당시 두 기관 수장의 그릇 크기는 똑 같았다. 한쪽은 그런 수준이었고, 또 한쪽은 자기 휘하에 있으며, 군인이되 경찰복을 입힌 경비대원들이 무절제하게 외부로 전화를 걸면 전화요금이 턱 없이 나올세라 조마조마 했던 이였으니까. 더더욱 웃기는 것은, 그 한쪽은 그 민원인의 수고(?)에 힘입어 예비회선 두 가닥을 얻어 무임승차하려(?) 덤벼들었다는 거. 해서, 1991번은 울릉경찰서 독도경비대에서 가져갔다. 그 번호를 창출했던 나로서는 그런 곡절 끝에라도 그 번호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는지 모른다. 사실 어젯밤에도 그 번호에다 전화를 걸어보았다. 건재했다. 경비대원은 씩씩하게 전화를 받아 주었다.

여기서 잠시 쉬어가기를 하자. 나는 아주 귀중한 정보를 독자님들께 위 단락에서 흘려드렸다. 사실 지금도 독도를 지키는 이들이 울릉경찰서 소속이지만, 내막적으로는 군인들이라는 거. 이 점 국가 이익과 무슨 관련인지는 모르겠으나, 군인이 주둔하면 그곳이 국제사회에 국가간 분쟁지역임을 나타내는 거란다. 이 사실도 내가 여태 못마땅하게 여기는 점이다. 사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한국통신더러 그러한 일을 떠맡기면서도 요란스럽게 개통 축하행사 등 하지 말라고 했다지 않은가. , 우리네 상부기관에서도 가급적 조용조용 일을 추진하라고 했다니! 다들 구더기가 그렇게 무서우면 왜 장을 담그려고 덤벼들었냐고?

진짜배기 큰일은 그 일이 있은 후 몇 해 지난 1996년에 발생했다. 나는 당시 경북 영양군이라는 오지마을 영양전화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1991년도에, 그러한 일이 재발되고, 발생하리라고 예견했다. 나라 밖에서는 일본이 또다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마구 우겨대고 있었다. 나라 안에서는 우리 회사의 경쟁사인 D가 자기네도 우리 회사의 회선을 헐값에 어거지로 빌려 국제전화 002를 하겠다고 했다. 다들 강 건너 불구경하는, 머저리들이였다. 속에 천불이 났던 나. KT 본사 홍보실에다 전화를 걸었다. 당시 홍보실에는 김ㅇ라는 외자 이름을 가진 과장이 있었고,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수필작가였기에 둘은 평소 교류가 있었다. 나는 그 김과장한테 다짜고짜 따졌다.

과장님, 도대체 다들 뭣하세요? 사장이 바뀌고 인사파동이 있고 회사가 어수선하니까 다들 잠꼬대하시는 겁니까?

그는 의아해 했다. 나는 1991년에도 본사 홍보실에다 팩스로 자료를 보낸 바 있다며, 위 독도의 일반전화 1991에 관한 자료를 그에게 다시팩스 전송했다. 역시 그는 나와 통했다. 그는 출입기자 등한테 자료를 배포하라고 했던 나의 당부를 튀겨서(?) 받아들였다. 그는 곧바로 기업광고안을 기초하여 나한테 되부쳐 주었다. 팩스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도 곁들여져 있었다.

윤과장님, 검토해 주세요. 이렇게 하면 될까요?

둘은 몇 차례 헤드카피를 의논하면서 수정하였다. 당시 이미 모든 광고 업무는 전문업체에 외주를 하고 있었건만, 광고안 전결권자는 부사장(요즘은 부회장이라고 한다.)이었건만, 일개 시골 전화국 과장을, 그것도 대리급 과장을 결재권자로 여겼던 김과장의 배짱도 놀랍기만 하다.

기업광고는 중앙의 4대 일간지에, 동일(同日),전면광고로 이루어졌다. 아직도 기억 생생한 그 헤드카피는 이러했다.

독도에도 우리 전화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고 그 아래엔 이렇게 되어 있었다.

1991년 당시 우리 전화를 달기 위해 험한 파도를 넘어 독도로 나섰던 윤근택씨(현재 영양전화국 근무)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하 생략)

겉으로는 일본을 겨냥하고 속으로는 경쟁사를 겨냥했던 그 광고. 당신네들은 감히 거금 20억을(2억에서 부풀린 금액이었음.)을 들여서까지 독도에다 전화 한 대를 넣을 수 있겠어?였던 것이다.

기업광고는 당시 1회 전면 광고액이 5천만원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어당팔(어리숙하면서 당수 팔단인 사람)인 내가 4대 일간지에 광고가 나간 것으로 만족해 할 사람인가. 나는 당시도 상상력 풍부한 작가였고 직장생리도 잘 알고 지냈던 사람. 어느 조직이든 딸랑이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 딸랑이들은 P.R.(public relation)에 강하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지냈다. , 딸랑이들은 공통적으로 P, 피할 것은 피하고, R, 알릴 것은 알리는 습성을 지녔다는 거. 마침 장성(將星) 군복을 벗고 들어온 신임 사장이 해외 투자유치를 위해 외국 순방 중이었다. 나는 전국 각지의 나의 팬들을 다 동원했다. 그분들로 하여금 그 기업광고를 접한 진한 감동을 500원짜리 축하전보 등으로 마구 KT본사에다 쏟아 부어줄 것을 요청했다. 착한 팬들은 다들 그렇게 하였다. 그 다양했던 축하전문 내용, 그 다양했던 수신인들 실은 내가 죄다 짜 주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고? 해외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신임사장 집무실 책상 위에는 수북 축하전문이 쌓였을 게 아닌가. 자기 PR하기 위해 부사장, 홍보실장 등은 알랑방귀도 뀌었을 테고 .

사장은 입이 귀에 걸렸을 것이고, 이런 말을 했을 게 분명하다.

그래요? 더 띄워야겠어요.

그리하여 그 기업광고는 전국 21개 지방 유력지에 다시 한번 동시광고가 이루어졌다. 총광고는 미리 광고한 4대 일간지 포함 23개 일간지, 총광고액은 11 5천 만원 (23* 5천 만원=). 한마디로, 일개 직원이었던 나는 회삿돈을 그렇게 한방에 날렸다. 내 살아생전 그만한 돈을 움켜잡을 수도 없을 텐데 .

, 판단은 독자님들 몫으로 남겨둠이 옳겠으나, 이 질문만은 하고 끝내기로 하자. 나야말로 올바른 기업문화를 꽃피우는 데 걸림돌 가운데 하나가 된다는, 기회주의적 한탕주의자였던가?  아직도 국제사회에서는 독도가 한국 땅입네 일본 땅입네 결판이 나지 않은 마당에, 1991년에 한국이 일본에 앞서 독도에다 일반전화를 놓았다는 걸 역사적 사실로 굳혀 놓았다는 점. 나는 앞으로 100,1000년이 지난 다음까지를 진작부터 생각했다는 거 아닌가. 그러한 역사인식을 진작부터 가졌다는 거 아닌가. , 이만하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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