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수필가,시래기를 엮다
윤 수필가, 시래기를 엮다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모든 일에는 때가 있게 마련이다. 농부한테도 놓치지 말아야 할, 절후(節候)라는 게 있다. 무서리가 몇 차례 내리자, 내가 직장에 출근한 낮 동안에 농부의 아내인 내 아내는, 밭에 심겨진 무를 뽑아 갈무리해두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무는 밭에 선 채로 얼면 못 쓴다. 사실 첫얼음 등으로 약간은 얼어도 다시 원상회복되기는 하지만… .
오늘은 절기상 소설(小雪)이건만, 볕이 참말로 좋다. 무밭에 자리를 깔고 앉아, 내 몫으로 남겨진 무청으로 시래기를 엮고 있다. 아내는 제법 요령 있게 무청을 잘라두었다. 무의 청이 낱낱이 떨어지지 않게, 무의 머리부분 살갗까지 제법 싹둑 자르다시피 하여도 겨우내 무에는 별 탈이 없다. 오히려 그렇게 잘라야 무 간수에 좋은데, 아내는 그렇게 해 두었다. 내가 무청으로 시래기를 만들어 거는 일은, 지난 날 내 아버지에 비해 ‘거저 먹기’다. 나는 내 아버지와 달리, 무 하나마다 숱이 거의 다 달린 무청의 가랭이(?)를 마치 바짓가랭이처럼 벌려, 미리 헛간에 걸쳐 놓은 긴 대나무 장대에다 거꾸로 걸쳐두면 되니까. 이미 몇 아름씩이나 되는 무청을 감쪽같이 그렇게 하였다. 실은, 그렇게 하여 무 시래기를 거의 다 만든 다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무청조차 아까워 그것들을 간추려 모아 엮는 중이다.
지난 날 내 아버지와 달리, 참으로 쉽고 편리한 ‘시래기 엮기’다. 내 아버지는 산에서 칡을 걷어다 ‘엮는 끈’으로 쓰거나 짚을 치려 엮는 끈으로 삼았지만, 나는 힘들이지 않고 공장에서 나온 ‘결속 끈’을 그대로 쓰고 있으니까. 그러나 엮는 방식만은 아버지의 고전적인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세 가닥의 끈이어야 한다는 거. 세 가닥의 끈 가운데 두 가닥은 앞이, 한 가닥은 뒤가 각각 되도록 벌여야 한다. 그 사이에 무 청을 한 ‘춤’씩 넣고, 끈을 교대로 넘겨 바짝바짝 당겨야 한다는 거. 마치 갯가 여인들이 굴비 등 어물을 엮듯이. 헐겁게 끈을 조면, 뒷날 시래기가 말라가면서 훌쭉해지면 술술 빠져 달아나가기 일쑤다. 또, 세 가닥이 아닌 두 가닥의 끈이면, 시래기가 군데군데 틀어져 빠져나가는 등 괴상망측한 일이 발생한다. 하여간, 무 시래기 엮기 하나라도 제대로 배워둔 걸 다행으로 여긴다.
이렇게 시래기를 엮고 있노라니, 문득 내 어린 날이 떠오른다. 아버지를 비롯한 온 식구는 꼭 이맘때 시래기를 엮어 달았다. 한 발씩이나 엮은 그 많은 시래기들. 언제고 사랑채 외벽에 달았다. 그곳은 하루 종일 볕이 아니 드는 곳이었다. 실제로, 시래기는 볕이 아니 들고 통풍이 잘 되는 곳에서 말려야 한다. 데칠 때에는 굵은 소금을 쳐야 살이 연해지고 영양소가 파괴되지 않는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다. 겨우내 더러는 세찬 바람에 시래기 엮음이 떨어져야 제 맛이었다. 그리고 더러는 시래기가 바스락바스락 부셔져 내려야 제대로 겨울맛이 났다. 어쨌든, 그것은 우리 온 가족이 삼동(三冬) 내내 반찬거리로 쓸 시래기였다. 사실 시래기 하나면 거의 아니 되는 반찬이 없었다. 멸치 몇 마리를 넣고 끓여도 온 식구가 먹을 시래기국으로, 시래기된장찌개로 변모하였으며, 맛이 그저 그만이었다. 나의 선친(先親)은 살아생전 시래기무침을 퍽이나 좋아했다.
“에미야, 이렇게 찬바람이 일 때는 ‘며루치 간쯔메(멸치 젓갈)’로 시래기를 무치면 최고대이(최고다)!”
나는 멸치젓갈에 무친 그 시래기 맛을 여태 잊지 못한다. 오일장이 서던 시장에서 꼬부랑 할머니가 가마솥에다 술술 끓이던 그 시래기국 맛도 여태 잊지 못한다. 고향 그곳 전화국이 첫 발령지였던 나. 우리는 퇴근길에 파장(罷場)에 이른 그 할머니 포장마차에 들러, 그 시원한 시래기국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곤 하였다. 물론 그 시래기국에도 멸치 몇 마리나 다슬기 속 몇 개가 들었을 뿐이었는데도… .
시래기 엮기가 거의 끝났다. 우리 쪽 어른들은 곧잘 “(손에 흙) 묻힌 김에… .”라는 말을 쓴다. 나야말로 ‘묻힌 김에’ 시래기를 더 엮을 요량이다. 해서, 아내가 알이 굵지 않다는 이유 등으로 밭에다 남겨둔 무조차 모조리 뽑는다. 실은, 지금껏 작업한 것만 하여도 우리 가족이 먹고도 남을 양이거늘, 욕심쟁이처럼. 심지어 가을 늦게 심은 열무조차도 알뜰히 뽑는다. 그러고는 그것들을, 작은 무가 달린 채로 엮어댄다. 내가 이번엔 작은 무가 달린 채 엮는 이유가 따로 있다. 그저 엮기 쉬워서만은 아니다. 작은 무도 후일 시래기를 삶을 적에 함께 넣어 삶아도 맛있더라는 거. 실제로, 일전 아내조차도 시래기용 무청을 손질하면서 웬만한 크기의 무도 그렇게 달아 두었다. 이처럼 작은 무가 달린 채로 시래기를 엮다가, 느닷없이 콧잔등이 시큰해질 줄이야! 아마도 새참으로 두 대접 연거푸 따라 마신 막걸리 탓도 있을 것이다. 나의 큰형수가 갑자기 떠오를 줄이야! 어느새 칠순 할머니가 된 분. 형수가 우리 집에 시집왔을 때, 우리는 조무래기들에 불과했다. 그 추운 겨울, 새댁은 우물가에 큼지막한 옹기 버지기(항아리)를 이고 갔다. 그 옹기에는 보름가량 대식구가 먹게 될 삶은 시래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형수는 맨손으로, 그 차가운 물을 두레박으로 길어 시래기를 우려내고 있었다. 우리들 조무래기들은 굴렁쇠를 굴리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아, 우물가 형수한테로 가곤 했다. 그러면 형수는 시래기에 달린 그 작은 무를 ‘뚝’ 떼서 우리한테 건네 주었다.
“되련님(도련님), 이 거 자셔요.”
주전부리가 넉넉지 않았던 우리는 그 삶긴 무를 간식인양 얻어먹곤 하였다. 지나치리만치 풍족해진 터에, 내가 이처럼 작은 무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시래기로 엮는 진짜 이유다.
이래저래 시래기 엮기를 끝냈다. 아울러, 지난 시월 초부터 시작한 감 따기도 끝냈으며, 벼 타작도 끝냈다. 이제 멸치 한 포대만 사면, 안온한 겨울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시래기만치 두루 쓰이며 만만한 반찬거리도 없다. 각종 미네랄이 들었으며, 비타민이 풍부하고, 식이섬유가 많이 든 식료품이라지 않던가. 특히, 칼슘분이 풍부하다고 한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웰빙 식품’이다.
나는 오늘 낮 동안 무 시래기를 엮었다. 그것이 겨울 반찬거리를 엮은 행위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의미도 있었다. 내 유년시절,소년시절,성년시절,초로시절, 그리고 먼 훗날까지 세 가닥의 끈으로 그렇듯 야무지게 엮고 있었던 게다. 참말로, 면면(綿綿) 이어져 가는 우리의 전통을, 양속(良俗)을, 계절을 그렇듯 엮어 매듭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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