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음악 이야기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30)

윤근택 2014. 12. 25. 20:31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30)            

-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비화(秘話)-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어제 이브 저녁미사 시간. 전례에 따라 신부님의 강론이 시작되었다. 신부님의 강론은 퍽이나 이채로웠다.

“사랑하는 교우(敎友) 여러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발간한 우리의 <<수정판 가톨릭 성가>> 제99번곡,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 관한 이야깁니다.”

그렇게 시작된 신부님의 강론. 그것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신부님이 전해주는 이야기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찰스부르크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인구 3천 명가량 되는 작은 마을 ‘오베른도르프’가 있다. 마을의 큰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왼쪽에 작은 성당이 있는데, ‘고요한 밤 성당‘이다.

1818년 크리스마스 때 일이다. 이 ‘고요한 밤 성당’은 당시 ‘성 니콜라우스 성당’이라고 불렀는데, 크리스마스트리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성가대원들은 벌써 2주일째 지휘자 겸 오르가니스트인 ‘그루버(Franz Xayer Gruber,초등학교 교사로 지냄,1787~1863)’의 지도로 성탄음악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 오르간이 탈나버렸다. 사실 그 당시에는 성가대를 위한 반주로 오르간이 절대적이었다. 잠시 여담이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한 평생 교회를 떠나지 않고 오르가니스트로, 칸토르(cantor)로 지내면서 그 많은 종교음악 ‘칸타타’를 적었다. 칸토르란, 성가대 지휘자를 일컫는 말이다. 하여간, ‘성 니콜라우스 성당’의 오르간이 탈나 낭패를 맞게 된다. 형편상 새로 살 형편도 못 되었고, 고치기까지도 제법 시간이 걸리는 등.

‘요셉 모어’ 신부는 큰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토록 애써 연습한 성가대의 성탄음악회가 무산되었으니... . 신부는 새로운 캐럴을 만들기로 작정하게 된다. 단순하고 쉬운 멜로디면 기타반주로도 가능할 것이고, 성가대원들도 짧은 기간에 배울 수 있으리라고 믿게 된다. 그는 하얀 종이를 책상 위에 펼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얼마 전 갓난아기를 축복하기 위해 방문했던 집의 광경이 떠올랐다. 가난한 그 어머니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아가가 추울세라, 옷으로 감싸 안고 있었다. 모어 신부는 그 성스럽던 모습을 떠올리며 한 자 한 자 노랫말을 적어 내려갔다.

모어 신부는 그렇게 적은 노랫말을 들고 성가대 지휘자 ‘그루버’를 찾아갔다. 그루버는 그 노랫말을 읽는 동안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옴을 느끼게 되었다. 그루버는 모어 신부가 건네준 노랫말을 들고, 눈 덮인 들판을 뚜벅뚜벅 걸으면서 떠오르는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금세 곡이 완성되었다.

그날 밤 저녁미사에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기타 반주에 맞춰, 모어 신부가 테너를, 그루버가 베이스를 맡아 부르고, 성가대가 후렴을 불렀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이 지구상에서 최초로 부른 순간이었다.

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외부에 알려진 것은, 오스트리아 서부 ‘티롤’ 자방의 오르간 제작업자였던 ‘칼 마우라커’ 덕분이다. 그는 ‘성 니콜라우스 성당’에 오르간을 고치러 왔다가, 이 노래의 악보를 들고 가서 널리 전하게 된다. 이번에는 그 노래를 들은 장갑 순회판매업자들인 티롤 지방의 ‘슈트라서’ 일가의 형제자매들에 의해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한편, 1893년 티롤 지방의 또 다른 음악 그룹이 대서양을 건너가 뉴욕의 ‘해밀턴 모뉴먼트’ 앞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열창함으로써 전 미국을 강타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그 노래는 본디 가사 일부가 변경되었다고 한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이 본디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조용하고 환한 밤’이었다는데, 일제치하였던 1931년에 우리나라에 이 곡이 소개되었으므로, 암울한 시대상을 은유적으로 번역하여 표현했다는 거 아닌가.

이브 저녁미사 때 신부님의 강론으로 전해들은 위 이야기는 감동 이상이었다. 사실 신부님의 강론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세계대전 때에 독일군들이 참호에서 전나무로 성탄트리를 세우고 촛불을 밝힌 후 일제히 독일어로 부름으로써, 대치하고 있던 영국군들이 이에 영어로 또 다른 캐럴을 불러 화답하는 등 화해의 기적을 이루어냈다는 일화까지 들려주었다. 사실 이미 내가 적은 수필작품 가운데 ‘알비노니 아다지오 G단조’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소개한 바 있다. 1992년 5월, 보스니아 내전에 22명의 양민이 죽어간 것을 애도하며,사라예보 필하모닉 첼로주자 ‘베드란 스마일로비치’가 검은 옷을 입고, 포탄이 쏟아지는 거리에서,그 곡을 내내 연주함으로써 세르비아 민병대도, 보스니아 저격수도 하 한 동안 총성을 멈추었다는 이야기였다.

위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하나의 예를 통해서도,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음악의 위대한 힘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음악을 전술전략으로 쓴 예도 있다. 역사적으로 그 유명한 사면초가(四面楚歌). 초(楚)나라의 패왕(覇王) 항우(項羽)와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이 천하(天下)를 다투던 때, 항우에게 마지막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항우 군대는 해하(垓下)에서 한나라의 명장 한신(韓信)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빠져나갈 길은 좀체 보이지 않고, 병졸은 줄어들며 군량미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한군과 제후의 군사는 포위망을 점점 좁혀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왔다. 가뜩이나 고달픈 초나라 병사로 하여금 고향(故鄕)을 그리게 하는 구슬픈 노래였다. 한나라가 항복한 초나라 병사들로 하여금 고향(故鄕)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다.

이제 나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 숨겨진 위 이야기를 통해, 또 색다른 것을 느끼게 된다. 이른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니 ‘궁여지책(窮餘之策)’이니 ‘야구게임에서 대타(代打)’니 하는 것들. 나는 이러한 어휘들을 뭉뚱그려 “나는 일이 꼬이면 행복해진다!”라고 곧잘 말해 오곤 한다. 실제로, 위에서 소개한 ‘요셉 모어’ 신부는 병약한 분이었고, 보좌신부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한 분이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발상의 대전환’을 꾀했던 결과는 엄청났지 않은가. 그분 역시, 일이 꼬였던 관계로 발군(拔群)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긍정적 에너지를 지녔던 분임에 틀림없다. 기량이 우수한 선발(選拔) 선수가 뜻하지 않은 부상 등으로 결장(缺場)하였을 때, 여태 후보선수로만 등록되었던 대기석의 선수가 대신 출전하여 큰 성공을 거둔 예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그런가 하면, 위대한 과학자들 가운데도 무언가 실험하다가 부주의 등으로 일을 그르쳐 오히려 새로운 걸 발견하거나 발명한 예도 있다. 프레밍의 푸른곰팡이가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내가, 수필작가인 내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통해 새롭게 깨닫는 게 있다면, 그것은 고정관념 내지 매너리즘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굳이, 사족(蛇足)을 하나 붙이자면, 명색이 작가라면 예수님이 이르셨던, “늘 깨어 있으라.”를 실천해야 한다는 거. 해서, 나는 미사참례 때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서도 이렇듯 한 편의 글을 거뜬히 적긴 하였다.

아무튼, 나는 어젯밤 성당에서 성탄절을 맞아 기쁜 마음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교우(敎友)들과 함께 불렀다. 이번엔 그 숨겨진 사연까지 생각하면서 그렇게 불렀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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