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돌쩌귀
장자(莊子)의 돌쩌귀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내 농장의 농막 옆에 달아낸 창고의 문짝이 떨어졌다. 살펴본즉, 철제 돌쩌귀가 낡아 양쪽 쇠편이 서로 빠진 데서 비롯되었다. 해서, 시내 철물점에서 새로 경첩을 사다가 이내 바꾸어 달기는 했는데... .
돌쩌귀 즉, ‘문지도리’의 역할이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그것이 지탱하는 문을 닫으면, 안팎이 판연히 갈라져 사각의 방에 갇히게 된다. 그 안만이 독립된 한 공간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그 문지도리에 의해 문이 열리면, 안팎 구분 없이 넓디넓은 한 공간이 된다. 또, 아무리 큰 문짝일지라도 그처럼 묘하게 생긴 돌쩌귀의 중심축 곧 비녀처럼 꽂아둔 쇠작대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내 생각이 이즈음에 머무르다가, 느닷없이 ‘장자(莊子)의 돌쩌귀[道樞]’에 닿게 된다. <<莊子>>에 ‘道樞’라는 말이 나온다. 요컨대, 장자는 요즘 흔히들 말하는 ‘경계 허물기’를 ‘道樞’의 개념으로 제시한 것 같다. 道樞를 글자대로 풀이하자면, ‘길[道,도리, 법도]+문지도리[樞]’가 되니, ‘도의 문지도리’가 되는 셈이다. 장자는 ‘문지도리’가 문을 여닫을 때 중심이 되는 축(軸)임에서 착안하여 그러한 사상을 펼친 듯하다.
<<莊子>>에서는 ‘道樞’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是亦彼也(이것은 다른 쪽에서 보면 저것이다).
彼亦是也(저것은 그 쪽에서 보면 이것이다).
果且有彼是乎哉(과연 이것과 저것이 확실히 구분되어 존재하는 것일 까)?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저것과 이것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화해하 는 것, 이것을 도추라고 한다).
道樞始得其環中以應无窮(도추는 다양한 가치의 중심에서 모든 다양 성을 받아주는 축)!
과연 장자답다. 그분도 어느 날 문지도리가 탈나서 나처럼 그것을 고치다가 그렇듯 훌륭한 생각을 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문을 응시하다가 혹은 삐걱대는 문을 여닫다가 그러한 생각을 했을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장자는 사고(思考)의 경계를 허물어뜨려야 함을 ‘도추’로 명쾌히 설명한 듯하다. 사실 장자가 적은 위 ‘도추’에 오버랩 되는 구절이 있긴 하다. 바로 <<반야심경>>의 한 부분이 그것이다. ‘色不異空空不異色 色卽是空空卽是色.’ 그러고 보니 서로 통하는 말인 것 같다. 장자의 ‘도(道)의 돌쩌귀[樞]’ 가운데서도 내가 특히 주목하는 어휘는 ‘樞’다. 이 ‘樞’는 ‘중심’을 나타낸다. 작게는 돌쩌귀 양쪽 두 쇠편을 하나가 되도록 마치 비녀를 꽂은 가로질러 꽂는 핀(pin)을 이르는 말이지만, 크게는 돌저귀 자체를 이르는 말이다. 그 어느 것이 되었든 방과 문을 한 몸체가 되도록 문설주에 박는 물건임에는 틀림없으며 ‘중심’이 된다는 거. 돌쩌귀를 이르는 이 ‘樞’가 ‘축(軸)’과도 통하며, ‘추(錘)’와도 통함을 알겠다. 장자가 마지막 문장에서 밝힌 ‘道樞始得其環中以應无窮(도추는 다양한 가치의 중심에서 모든 다양성을 받아주는 축)!‘에 더욱 주목한다. 그렇듯 포용력을 가지되, ’도도 개도 아니다.’ 또는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 듯.’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된다는 것을.
이번엔 장자의 ‘도(道)의 돌쩌귀’에 관해 색달리 해석한(?) 글 한 편을 소개해보기로 한다. 한때 ‘문화일보’의 기자생활을 하면서 <<도올 담세>>‘새 담론 생산할 수 있을까?’를 썼던 ‘도올’. 그분은 2003. 8.14.자 같은 신문에 ‘도올, 기자생활을 마감하며’란 글을 기고한 바 있는데, 그 글을 통해 당시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여러 신문사에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를 한 고(故)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고언(苦言)을 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비를 내세우는 것은 명지(明智)에 처하는 것만 못하나,이것과 저것을 없애버리는 경지, 그것을 ’도추(道樞)‘라 한다. 도추만이 비로소 그 환중(還中)을 얻을 수 있고, 무궁(無窮)에 응할 수 있다. 환중이란, 직선의 가운데가 아니라 원의 중심 같은 것.
장자는 한마디로 일국의 통치자는 시비의 일각에 서 있는 자가 아니라, 원의 중심과 같은 환중의 자리에서 무궁한 상황적 변화에 응(應)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장자의 돌쩌귀론’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두고두고 새겨볼 만하며, 또 그것을 실천해볼 만하다. 하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아니, 시도 때도 없이 여닫는 문과, 거기 달린 돌쩌귀의 역할을, 작동원리도 거듭거듭 음미해야겠다.
창작후기)
2015.1.1.03:15. 새해, 새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나는 평소 습관대로 냉수를 한 컵 따라 마시고, 담배를 꼬나물고 화장실로 향했다. 좌변기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늘 ‘거 참 신기하단 말이야,언제 보아도 저 돌쩌귀!’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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