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집에 다녀와서
톱집에 다녀와서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내가 몸담은 이 연수원에는 나처럼 경비·안내를 번갈아가며 맡은 이들도 몇 있지만, 조경을 전담하는 이도 있다. 조경을 담당하는 그는 나보다 두어 살 많은 이인데, 그는 나한테 수시로 짬을 내어 낫을 갈아달라거나 전정가위를 갈아달라거나 톱을 쓸어달라고 보챈다(?). 그는 내가 농사꾼인데다가 시골에서 자라났으며 대학에서 임학을 전공한 걸 너무도 잘 알기에, 전문가라고 치켜 올리며 그렇게 부탁하곤 한다. 실은, 그렇게 함으로써 직장 분위기를 한껏 띄우고 동료애를 나누고자 애쓴다는 걸 내 모를 리 없다.
이번엔 내가 먼저 그가 쓰는 톱이 영 엉망임을 알아, “양놈 고추를 잘라도 들지 않겠어요.” 진한 농을 하고, 쓸어주겠다며 톱과 함께 ‘줄:’을 가져오라고 제의했다. 그랬더니 찾아보아도 ‘줄’이 없다고 했다. 해서, 퇴근길에 경산시장 안 ‘톱집’에 들고 가서 진짜 전문가한테 맡겨 쓸어다주겠다고 제안했다. 사실 내 농장에서 쓰는 톱은 수시로 손수 쓸어 쓰고는 있지만, 나는 ‘연장이 일을 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에 굳이 그리 하였다.
그 ‘ㅇㅇ톱집’에 녹슬다시피 한 회사의 톱 세 자루를 들고 갔다. 톱집 사장은 단골손님인 나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가 돋보기안경을 끼고 세 자루의 톱을 차례로 줄로 쓰는 동안, 나는 그 곁에 꼿꼿이 앉아 거듭거듭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사장님, 그 뾰족한 쇠망치로 한 치 실수도 없이 한 날 건너 한 날 그렇게 두드려 ‘날어김’을 하시다니 놀라워요. 저보다 대여섯 살이나 위인 육십대 중반이시라는 분이... .”
그랬더니, 그는 겸양조로 답했다.
“무슨 과찬(過讚)의 말씀을요! 나는 바로 이 가게에서 28년째 톱을 실겨(‘쓸어’를 그는 이렇게 사투리로 말했다.)왔으니, 그저 감각적으로 하는 게지요. 참 그런데 조금 전에 ‘날어김’이란 말을 하던데 무슨 말이지요?”
신기하게도, 그는 ‘날어김’이란 어휘는 모르고 있었다. 해서, 내가 설명해주었다. 한 날 건너 한 날이 좌우로 갈라져, 한 쪽 눈을 지긋이 감고 한 쪽 눈으로만, 그것도 실눈으로 톱을 거꾸로 세운 후 보게 되면, 톱날들이 어우러져 평행선을 이루게 되는 걸 이른다고. 그는 겸손되이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여태 마땅한 어휘를 찾지 못하였지만, 이제 잘알았으니, 앞으로 자기도 그 용어를 써야겠다고 고맙게 받아들였다.
숫제, 그는 전문가가 아니라 요즘 흔히들 말하는 달인(達人)이었다. 톱집게, 줄, 망치 등 여러 연장들은 주인과 한 몸체가 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손때가 묻어 있었고, 손에 제대로 익을 만치 닳아 있었다. 한마디로, 그 연장들에는 장인(匠人)의 영혼이 함께 묻어있는 성싶었다. 그는 입으로는 이런저런 나의 이야기에 대꾸를 다 하면서도,손으로는 작업을 태연이 이어나갔다.
“사장님, 톱의 기원을 아세요?”
그랬더니, 그는 그것까지는 모른다고 답했다. 하여, 내가 일러주었다. 중국 노(魯)나라 때 어느 노인이 도끼와 낫을 들고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이상한 나무이파리에 살갗이 베이게 되었는데, 그걸 자세히 살펴보니 잎가장자리가 거치(鋸齒; 톱니)꼴로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노인은 집으로 돌아와 그 잎의 가장자리 즉, 톱니 모양을 본 따 톱을 고안했다는 이야기가 있노라 들려주었다.
그의 톱쓸기 요령은 여태 내가 농장에서 해왔던 방식과 판이하게 달랐다. 특히, 나는 그와 달리, 날어김을 제대로 못한다. 그는 톱을 기차철로를 잘라 만든 ‘I’꼴의 ‘쇠모탕’ 위에다 올려놓고, 그 뾰족한 쇠망치로 마치 실로폰을 치듯 경쾌한 리듬으로 두드려 날어김을 정확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전문가인 우리들이 그렇게 하면 톱니를 죄다 부러뜨린다고 일러주었다. 한마디로 ‘따라하지 말기’를 경고했다. 예전 톱은 쇠가 물러 ‘낫끝’으로나 ‘칼끝’으로도 날어김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요즘 톱에 쓰이는 쇠는 워낙 야물어 그렇다고 하였다. 그는 적정한 날어김의 정도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었다. 날어김의 정도가 크면, 나무 베임은 좋으나, 톱이 떤다고 하였다. 반대로, 날어김의 정도가 작으면, 톱밥 배출이 덜 되고 톱날이 나무에 끼기 쉽다고 했다. 그는 날어김 정도도 감각적으로 행한다고 하였다. 그 오랜 동안 고객들의 증언을 통해서, 욕구를 통해서 터득했다고 했다. 그리고 톱을 쓴 후에 톱니마다 그 끝을 쓸어 ‘▲’꼴이 아닌 ‘☗(사실은 사다리꼴임.)’꼴로 만들어야하는데, 일반인들은 자칫 인접한 톱니의 끝조차도 망쳐버리게 된다. 그는 자신이 고안해낸(?) 도구를 덧대, 그 작업을 원활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노하우였다. 그밖에도 그의 경험담 등이 많았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키로 한다.
어쩌자고 내가 그처럼 불쑥 말했던고?
“사장님, 내가 문하생으로,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올 테니 받아주실 수 없을까요? 나이가 차츰 들어갈수록 여태 반듯하게 특별한 기술 하나 익혀두지 못한 게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몰라요. 사무직으로만 사반세기 지내놓고 보니 후회막급인 걸요.”
그러자 그가 타이르듯 일러주었다.
“이 일도 나이가 더 들어 손이 떨리게 되면 더는 못해요. 그리고 눈이 더 침침해지면 뭐가 보여야 하지요?”
지금은 다시금 수필작가의 밤, 수필작가의 컴퓨터 앞. 아침 한 나절 경산 시장 안 톱집 사장과 두어 시간 나누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되짚어보게 된다. 그의 말마따나 요즘은 직업으로 톱을 쓸고, 칼을 갈고, 낫을 벼리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야말로 ‘대량 생산, 대량 공급’만이 있을 뿐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너른 경산 바닥에서 톱을 직업으로 쓸어대는 이는 혼자뿐이란다. 막상 그 기술을 익히겠다고 나서는 젊은이도 하나 없다고 하였다. 우선 돈이 아니 된다고 믿기 때문일 거라고 하였다. 정말 그럴까? ‘사농공상(士農工商)’은 한낱 사치일 뿐, 그는 그 일로 벌어서 자녀들 치송(治送)까지 다 하였다고 술회했다. 아울러, 여태껏 28년 동안 그 한 자리 반경 1km를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앞으로는 자기 부인과 함께 차량을 꾸며 몇 가지 필수 공구만 싣고 경상북도 이 곳, 저 곳 오일장이 서는 곳이면 장돌뱅이로 순회하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맞습니다. 정말 그렇게 하시면 좋겠어요.”를 연발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지금 그 작디작은 한 분야에서 전문가인 그를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저 노후엔 기술이 최고다. 남이야 무슨 말을 하든, 가장 기본적인 공구 하나만 챙기면, 그 어느 곳에 가든 기술 하나로 대접받는다는 것을. ‘도입기 -성장기- 성숙기- 쇠퇴기’라는 사이클이 비단 상품에만 적용되는 원리일까? 쇠퇴기를 맞아 사라져 간 직업들도 얼마나 많은가. 양복쟁이가 갔고, 구두쟁이가 갔고, 대장쟁이가 갔고, 활자인쇄쟁이가 갔고, 도장쟁이가 갔고, 부고와 청첩장을 만들던 광고쟁이가 갔고... 원고지에 육필로 글을 적어대던 글쟁이도 갔고... . 하지만, 끝끝내 그 한 길만을 고집한 이는 오래도록 내내 살아남았다는 사실. 그저 돈벌이 하나로만 논의될 수 없는 그 무엇이, 그 어떤 정신이 우리 곁엔 남아 있더라는 거. 나 자신도, 알게 모르게 영악스레 시류(時流)에 영합할지언정, ‘시루에 따라 떡을 찔지언정’ 마지막 남은 하나의 믿음은 버리지 말아야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말과 함께.
“그는 최고의 기능자였어! 그는 그 분야에 있어서만은 마지막 하나 남은 대한민국의 자존심이었어! “
창작후기)
텔레비전 광고에 당해 상품 사장이 직접 나와서 ‘산수유’가 남자한테 좋다는 멘트가 있었다. 그것을 패러디한다.
“내 신실한 독자들한테 무어라 말은 하고 싶은데, 달리 ‘방뻡(방법)’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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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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