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나의 병력(病歷)'

윤근택 2015. 3. 3. 23:07

 

나의 병력(病歷)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어른들로부터 곧잘 듣던 말이 새삼 생각나는 밤이다.

     나이는 참 못 속이겠어.”

     사실 무쇠도 씹을 수 있을 만치 튼튼했던 아래쪽 양어금니였건만, 차츰 심하게 흔들거리고 있으니, 나도 어느새? 해서, 서글픈 생각 아니 들 수가 없다.

      흔히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하였으며, ‘구창모란 가수는 아예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란 노래까지 열창한 바 있다. 아울러, 우리네는 통과의례(通過儀禮)‘란 말도 즐겨 쓴다. 본디는 한 인간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거치게 되는 탄생, 성년, 결혼, 장사 등에 수반되는 의례를 뜻하나, 한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성숙해 가는 동안 겪게 되는 여러 종류의 육체적, 정신적 병 내지 고통을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 내가 어금니 흔들거림이 계기가 되어, 내 살아온 60여 년 동안 거쳤던 의례(儀禮)를 더듬게 되었으니... .

 

      1. 홍역(紅疫)

 

      속설(俗說)에 의하면, 홍역은 살아생전 한번 겪지 않으면, 죽어 저 세상에 가서라도 반드시 겪어야 한다고 한다. 대개 우리는 어린 시절에 홍역을 앓게 되었는데, 어른들은 홍역을 일컬어 손님이라고도 하였으며, ‘제 구실(자기의 의무)’이라고도 하였고, ‘제 것(자기 소유)’이라고도 하였다. , 제대로 인간 구실을 하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로 본 것이다.

      나는 국민 학교 2학년에 올라가자마자, 그 독하디 독한 열병을 앓게 되었다. 온갖 봄꽃이 시새워 피던 봄날에, 거의 보름 동안 제대로 먹지도, 제대로 자지도 못하도록 괴롭혔던 열병. 온몸에 반점(斑點)이 돋아나기도 하였다. 양친과 형제자매들은 몹시 안타깝게 여겼다. 물론, 본인들 모두도 그 병을 앓은 터. 새로 반()이 갈리고 새 담임 선생님과 새 친구들도 생겨 있었겠지만, 홍역으로 인하여 보름 동안의 뒤처짐이 얼마나 컸던지 모른다. 사실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한글은 거의다 깨쳤지만... .

      홍역, 그것은 내가 무럭무럭 자라기 위한, 내 기억 속 최초의 단련이었다. 요즘 어린아이들은 일찌감치 홍역예방접종으로, 한평생토록 홍역을 앓지 않는다는데, 그래서 인내심조차 그렇게들 약한 것일까?

 

      2. 중이염(中耳炎)

 

     당시 우리네 영양상태와도 무관치 않은 병으로 여겨진다. 또 마땅한 치료약도 없었던 듯하고. 사실 나 말고도 중이염, 귀앓이를 겪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국민 학교 2학년 때부터 귀를 앓았고, 왼쪽 귀에서 고름이 나오고 냄새가 나는 등 불편을 겪어야만 했다. 요즘 아이들 가운데 귀에서 고름이 나올 지경인 아이를 그대로 두고 보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요즘 아이들은 그 병을 모른다고 본다. 대신, 경험한 어르신들은 잘 아실 테지만, 중이염이 심하면 머리가 무거워지고 짜증스러워져 집중력이 현격히 떨어진다. 자연히 학생으로는 대단한 마이너스 요인이다. 그리고 중이염이 아주 심하면, 뇌손상까지 가져온다는 게 통설(通說)이다. 내이(內耳)가 뇌와 아주 근접한 위치에 있으니.

     나는 그러한 상태로 2학년을 꼴딱 넘기고 말았다. 앞서 홍역에 이어 중이염까지 않았으니, 학급 70여명 가운데 10% 상위권 6~7명 학동(學童)에게 주어지는 우등상을 받았을 리 만무하고.

 

      3. 말라리아(malaria)

 

      일명 학질(瘧疾)이라고 하는 전염병, 하루는 오한(惡寒)이 들고 하루는 고열을 동반하는 병. 나는 국민 학교 4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내리 3년 여름이면 그 병을 앓게 되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자료를 챙기다가 안 일이지만, 현재도 매년 15,000만 명이 앓고 있고, 5세 미만의 아이들이 매년 100만 명가량 죽는다는 열대지방의 풍토병으로 소개되어 있다.

      바로 그러한 병을 내리 3년씩이나 앓았다면, 그 상황 어떠했겠나? 사실 나는 코에 피가 터져 핏덩이가 목으로 넘어가다가 목이 막힐 지경이었다.

      내 어머니는 그러한 민간요법을 어디서 익혔는지, 환자인 나를 데리고 쥐구멍 앞으로 가곤 하였다. 어머니는 나더러 쥐구멍에다 입술을 대고, 쥐구멍을 불어대라고 일렀다. 그 결과, 내 양입술은 그야말로 당나발처럼 부어오르곤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말라리아 매개자가 학질모기뿐만 아니라 쥐이기도 하다니, 쥐에서 얻은 병이니 쥐한테 돌려주겠다는 처방이었는지도 모른다. 별 뾰족한 약물 투약 등도 않았건만, 면역이 되어서인지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말라리아를 더 이상 앓지는 않았다.

       4. 고막 천공(穿孔)

 

      고등학교 시절, 장난을 치다가 친구로부터 얻어맞아 중이염을 앓았던 바로 그 왼쪽 귀의 고막이 뚫어진 일이 있다. 대학 입시를 목전에 둔 고3 수험생이 그런 일을 당했으니!

      사실 몇 해 전 중이염이 50여년 만에 도져 이비인후과에서 치료를 받고, 고막 재생(이식)수술을 받게 되면서 알게 된 점이지만, 유년시절의 중이염이 고막천공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정상인의 데시벨(dB)이 아닌 상태에서 50여 년 살았다는 말이기도 하여 억울하게 살아왔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았으니! 물론, 지금은 정상인의 청력을 되찾았다.

 

      5. 안면신경마비[구안와사(口眼喎斜)]와 장티푸스 합병증

 

      때는 1977년 여름. 꿈 많던 대학 1학년짜리가 여름방학을 하자, 시골 고향에 내려갔다. 그 해 여름은 왜 그리도 가뭄이 심했던지. 내 양친은 논바닥이 턱턱 갈라진 벼논에 진종일 물을 물지게로 져다 붓고 있었다. “하마나 하마나... .” 하늘만 쳐다보던 불쌍한 노인네들.

      나는 참말로 내심(內心)의 갈등이 심했다. 내 이상(理想)과 양친이 겪는 현실은 그야말로 천양지차(天壤之差). 나는 참말로 방황했다.

      학수고대하던 비가 내리던 밤. 빗소리가 하도 반가워 툇마루에서 자고 있었다. 밤새 소피를 보려고 일어난 내 어머니가 팔을 이끌며 하는 말을 비몽사몽간에 들었다.

       야야, 이런 데서 자면 입 돌아간다카러래이. 어서 에미랑 방으로 들어가자.”

       내 어머니는 신통력이 참말로 대단한 분이었다. 자고 일어나 물누룽지를 먹자니, 자꾸 밥알이 입에서 흘러내렸다. 안면신경마비였다. 그때부터 시작된 내 어머니의 간호와 무수한 처방을 다 적자면, 이 밤을 꼴딱 새워도 다 적지 못하리. 거기다가 체온 40도를 오르내리는 열병인 장티푸스까지 겹쳐 대학에서 첫 여름방학을 초주검으로 보냈던 나.

      그런 연유로 결국은 휴학계를 내었고, 그 휴학계가 빌미가 되어 그 극악무도한 박정희 군사독재정부의 군대에, 신체검사 받던 날 징집영장을 곧바로 받아 쥐었고, 일주일 만에 군대에 붙잡혀(?) 갔다. 당시는 대학생들도 교련이란 걸 했고, ’학적 변동자가 되어 교련을 이수하지 않으면 곧바로 군대에 잡혀 갔던 시절이다.

       내가 신체검사를 담당했던 군의관한테 탄원했다.

      이처럼 채 감기지도 않는 왼쪽 눈으로 소총 조준사격을 어떻게 합니까?”

      그랬더니, 군의관 양반은 이른바 ‘FM(Field manual; 야전교범)’을 펼쳐 보이면서 말했다.

      학생의 신경마비는 벨씨형(아직도 그 원어를 모른다.), 즉 일시형마비인 관계로, 2급 판정에 해당합니다. 현역입니다.”

      야속했지만, 나라가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논산훈련소에서 그 혹한에 4주 동안 시쳇말로 빡빡 기다보니까, 차츰차츰 왼쪽 눈이 감기는 것 같았으며, 소총 조준사격도 가능해졌다.

      그리고 장티푸스란 병은 치사율도 제법 높은 위험한 전염병이긴 하지만, 워낙 열병(熱病)인 터라 몸 속 웬만한 병균마저 다 열기로 녹아 죽임으로써 장티푸스를 겪은 후에는 잔병을 앓는 일이 썩 줄어든다는 게 속설(俗說)이다.

 

     6. 불의의 교통사고

 

      제대 복학 후 3년 반가량 나름대로 동분서부 취직시험을 봤으나, 막상 미취업 상태로 졸업장을 받은 나. 내 아버지와 내 백씨(白氏) 내외분의 눈총과 구박은 어지간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애로웠던 내 어머니와 달리, 내 아버지가 그렇게 하실 만도 하였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겠나.

      열 눔의 새끼 가운데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놈 아홉째를 대학에, 그것도 4년제 대학에 보내놓고, 남들한테 4년 내내 전면 장학생이라고 자랑했더니만... .”

      결국은 누가 버려놓은 산골 농가(農家)에 은신하여 취직공부를 하고 있었거늘, 어쩌자고 읍내에서 소 키우고 두부 만들어 파는 그 친구가 찾아왔던고? 그는 내가 불쌍하다면서, 위로한다면서 됫병 소주를 사들고 화물차 몰고 소꼴 베러 왔다가... . 한 잔 더 마시자며 달기약수터 (고향 청송의 약수터)로 음주운행을 하여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가야할 길은 천 리 만 리인 나더러 대체 어떡하라고! 화물차 앞 유리를 머리로 박고 밖으로 튕겨 나왔던 나. 얼굴 곳곳에 살점이 온통 뜯긴 채였고 병원 중환자실에서 2개월여 사경을 헤매지 않았던가.

 

      사실 위 6까지의 이야기 외엔들 더 없겠나. 사랑니가 날 때의 고통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독자님들께서 지칠 테니, 오늘은 이 정도에서 그쳐야겠다. 대신, 나의 신실한 애독자님들께 따로 전할 말만은 꼭히 해야겠다.

      개개인에게도 분명코 역사는 있는 법. 그 길고 일련(一連)인 통과의례. 그것은 고비고비이지만, 굽이굽이이기도 하다는 거. 우리는 그 굽이굽이를 돌 적마다 한 단계 한 단계 더 성숙해졌다는 사실. 마치 영덕 강구 하구(河口)의 은어 치어(稚魚)가 오십천(五十川)을 거슬러거슬러 올라갈수록 몰라보게 부쩍부쩍 커지는 것처럼. 아니, 은어만이 그러한 성장을 하는 게 아니다. 대체로, 물고기들은 홍수를 만나게 되면, 물줄기를 타고 세차게 거슬러 오르는 동안 부쩍부쩍 자란다지 않던가. 어디 물고기만 그러한가. 날개를 가진 존재들 이를테면, (비행기·새 등은 언제고 양력(揚力)을 얻기 위해 바람을 등지고가 아닌 바람을 안고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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