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근택 2015. 4. 12. 23:18

                                                                                     깃발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는 사극(史劇)이나 전쟁영화를 보노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있다. 바로 깃발이다. 동서고금 어느 전장(戰場)에서든 이른바 기수단(旗手團)이 선봉에 선다. 그런가 하면, 장례 때에도 만장(輓章/挽章)이 늘 앞장서게 된다. 그 또한 깃발임에 틀림없다. , 샤머니즘이 성()한 티베트 같은 나라에서도 가는 곳곳마다 형형색색의 깃발이 펄럭인다. 사실 그 깃발은 리본이라고 해야겠지만. 심지어 어부들은 회항(回航)하면서 만선(滿船)의 깃발을 달기도 한다. 우리네 서낭당에도 깃발 내지 리본은 늘 펄럭댄다. 참말로, 깃발 다는 일은 우리네 생활 가운데 흔히 볼 수 있는 의식(儀式)이다. 깃발은 하나의 상징물인 셈인데, 왜 그처럼 즐겨 쓸까에 관해 오늘은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내가 나름대로 알아낸 그 이유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밝히기로 한다.

       그러기에 앞서, 잠시 뜸을 들이고자, 깃발을 남달리 바라본 분부터 소개해야겠다. 바로 유치환(柳致環) 시인이며, 그분은 깃발이란 시를 남겼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永遠)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사실 수필작가인 나는 시()에 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 없을뿐더러 시인이 과연 무얼 말하는지도 거의 알지 못하는 편이다. 한마디로, 어렵고 헷갈릴 따름이다.

        다시 내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 ‘깃발을 상징물로 삼는 이유로 돌아온다. 우리네 시선(視線)을 쉽게 끄는 게 정지된 물체가 아닌, 흔들리는 물체 내지 움직이는 물체이기에, 인간들은 일찍이 깃발을 상징물로 삼았으리란 생각. 참으로, 정지된 물체보다는 움직이는 물체가 눈에 잘 띄는 법이다. 바람에 나부대는 물체일수록 남의 눈에 잘 띈다. 천 조각은 비교적 여느 재질보다는 가볍고 바람에 잘 나부끼는 편이다. 그리고 각종 문양을 그려 넣기도 용이한 편이다. 나아가서, 지니기에도 편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깃발을 동서고금 널리 사용해 왔으리라.

       이번엔 깃발과 관련한 나의 추억담 한, 둘을 소개코자 한다. 나는 초··고 시절을 군사독재자 아니, 결코 ‘18년 연임제(連任制)’가 아닌 ‘18년 단임제(單任制)’ 대통령 치하에 지냈다. 그들은 구호에 꽤나 능했다. 해서, 그러한 문화에 익숙했던 학교 당국자들은 학생들의 교복 상의 호주머니 위에다 리본달기를 아주 종종 강요했다. 우리는 불조심 강조기간이니 나무심기 주간이니 쥐잡기 강조기간이니 하는 리본을 수시로 달아야만 했다. 어쩌다 실수로 리본을 달지 않은 채 교문을 들어서는 날은 규율부 선배들한테 잡혀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세상이 바뀌어서인지 요즘은 가슴팍에다 획일적으로 그처럼 리본을 다는 문화만은 사라진 듯하다.

       사반세기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국기(國旗) 달기국기 내리기를 손수 종종 한 일이 있다. 주기적으로 당직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당직근무자의 임무에 국기 게양과 하강이 들어 있었다. 입사 초년 시절,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새벽에 눈을 비비며 국기봉(國旗奉)에 다가가, ()에서 태극기를 꺼내 펼쳐, ‘건곤감이(乾坤戡夷)’ 가운데 쪽 모서리에다 밧줄을 묶었다. 그리고는 깃대 끝을 쳐다보며 밧줄을 당겼다. 깃봉 맨 꼭대기엔 도르래가 달려 있어, 밧줄을 살살 당기면 국기가 올라가거나 내려오도록 되어 있는데... .

       사택(社宅)에서 출근하던 국장(局長)이 당직실을 지나며 하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윤근택, 자네 태극기 거꾸로 달았더군. 태극 문양 붉은 쪽이 아래쪽에 있어. 어디 한번 나가서 쳐다봐.”

       입사 초년생이었던 나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사실 두 가닥의 밧줄가운데 어느 쪽을 당기느냐에 따라 실수를 자칫 할 수 있는 게 국기 게양이었다. 잘 한 짓인지 못한 짓인지는 알 길 없으나, 어느 전직 대통령이 재임시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극기를 항시 게양해 두도록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람에 당직근무자의 임무 가운데 국기 게양,하강도 사라졌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라의 상징인 태극기를 그렇게 항상 달아두는 것은 온당치 않은 듯한데... .

        깃발은 아니지만, 우리를 감동케 한 리본 이야기가 있으니... . 다음부터 펼치는 이야기는 나의 수필 ‘Going home’에서 일부분 옮겨온 것이다.

 

    <<무대는 플로리다 주의 포트 로더데일로 가는 시외버스 안. 한 무 리의 여대생들이 여름 바캉스를 가면서 깔깔대고 있다. 어느 자리에 모자를 눌러 쓴 사내. 그는 텁수룩하기 그지없다. 그는 말이 없다. 그 여대생들 가운데 호기심이 많은 하나가 그에게 다가가 음식물을 건네주는 등으로 말을 붙인다. 어디까지 가시느냐, 댁은 어디시냐 하면서. 그러자 사내는 굳게 다물었던 입을 그제야 열기 시작한다. 다음은 그가 들려준 이야기 요지다.

     자기는 3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가석방 허가로 막 출옥한 사람이며, 이젠 마땅히 갈 곳도 없다. 고향에는 아내가 있고, 그녀는 면회도 계속 오곤 하였다. 그러나 언제 출옥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좋은 사람 생기거든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떠나가도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면회를 오지 말라고 하였다. 대신, 언제 출옥할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나를 맞아주겠다면 집 앞 참나무 가지에다 노란 리본을 그 징표로 달아 달라고 하였다. 그러면 자기가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가 그 노란 리본이 아니 보이면 그냥 지나쳐 가겠다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 여대생. 자기 자리로 돌아가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들려준다. 여대생들은 모두 제발 노란 리본이 그곳에 달려있기를 기원한다. 심지어 내기까지 한다. 다들 숨을 죽인다. 시외버스가 그 사내의 집 앞을 지나갈 즈음, 사내는 아예 지긋이 눈을 감고 만다. 그러나 금세 온 시외버스 안이 떠나갈 듯 환호성이 터진다. 그 참나무 가지엔 노란 리본이, 하나도 아닌 리본이 노랗디노란 꽃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사실 피트 헤밀의 그 글 Going home, 우리가 아는 모든 노란 손수건 이야기의 원전(原典)에 해당한다. 그 그        칼럼을 쓴 이후 미국 ABC에서는 그 이야기를 각색한 드라마를 곧바로 방영하는가 하면, 1977년 일본에서는 행복의 노란 손수건이란 영화로 각색하여 개봉했 다고 한다. 한편, 1973어빙 레빈이란 이와 러셀 브라운이라는 이 가 지은 Tie a yellow ribbon(round the old oak tree)란 노래는 크 게 성공하게 된다. 이에,헤밀은 이 곡은 자신의 칼럼을 토대로 제작된 것이라고 소송을 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레빈과 브라운은, 자신 들이 군에 복무할 적에 이런저런 유사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등 헤밀을 패소케 했다는 일화도 위키백과는 함께 전한다.>> (이상 본 인의 수필 ‘Going home’에서 인용함.)

노란 리본애타게 기다림을 상징하는 것으로 발전해 왔다. 지 난 해 세월호침몰로 수많은 학생들이 수장(水葬) 되었을 적에 거의 온 국민이 항구에 빨랫줄처럼 줄을 매어 노란 리본을 달거나 가슴에 노 란 리본을 달았다.

나는, 수필작가이며 농부인 나는, 앞으로 그 무엇을 내세우고자,상징 코자 깃발을 한 장 내달 수 있을까? 사실 나의 농장 입구에다 만돌이 농원이란 표지판도 설치해 두었고, 석공(石工)한테 의뢰하여 커다란 바 윗돌에다 만돌이농원이라고 음각(陰刻)을 해 두기는 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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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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