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미
빌미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어느 조직이든 어느 사회든, 둘 이상이 모인 곳이면, 크고 작은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그 문제들 가운데도, 어떠한 계기로 인해 특정인이 궁지에 몰려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어 결국은 그 조직이나 사회를 떠나게 되는 문화는 매우 안타깝다. 흔히들 그렇게 내몰린 이를 두고, 자기 일 아니라고 여기며, ‘자기관리’를 제대로 못한 이라는 등 쉽게 말하곤 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현명하게 처신을 못한 이로 몰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새로 얻은 이 직장. 모두 합쳐 16인으로 구성된 조직이건만, 이직율(移職率)도 높고, 말도 제법 많은 곳이라고 한다. 그 높은 이직율은, 이른바 쥐꼬리만한 급여와도 무관치 않으리라. 그러나 그 말 많음에 관해서는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다. 저마다 맡은 일이 따로 있으며, 근무장소도 관리실,사감실,경비실,중앙감시실,미화팀 대기실 등 각각 따로 있는데다가 주로 맞교대로 근무하기에, 모두 한 자리에 모일 기회도 적건만… . 오히려 서로를 위로하며 오순도순 지내야 옳건만… . 내가 입사한 지 불과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영문인지 직원 하나가 떠났다. 나는 그 동안 그들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다. 괜한 억측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내가 전직장(前職場)에서 사반 세기 동안 근무할 때 겪었던 두 사례를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한테는 일종의 피해의식 같은 게 남아있어서, 더더욱 안전운행(?)에 신경을 쓰게 된다.
지금부터는 나의 추억이다. 한번은, 자신이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다 거머쥐었다고 여긴 어느 상사한테 참소리 아닌 참소리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인사부서에 요청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나를 유배 보내고자 애썼다. 그러나 그 정보는 온 사무실에 적나라하게 공개되고 말았다. 내가 주임에서 대리로 승진을 할 수 있는 절호의 찰나였으며, 직속 상관인 그가 적극 지원해주어야 할 절묘한 시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큰 낭패를 당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느 부장이 아니다 싶었던지 나를 타일러, 몇 차례 그에게 사과를 드리려고 애썼다. 심지어 자택을 알아내어 꽃바구니를 사들고 갔으나, 거절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굴하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그를 엿 먹이기로 마음 먹었다. 어떻게? 그분보다 직위가 하늘 같은 분이며, 내가 몸담았던 그 떵떵했던 통신회사의 부회장급이었던 나의 대학 선배님께 시외전화 한 통을 하게 되었다.
“선배님, 들리는 정보에 의하면 제가 승진 케이스랍니다. 입사 후 여태 선배님 곁 본사로 오라고 자주 손을 내미셨음에도 사양했는데요, 이번만큼은 선배님께서 직접 나서주셔야겠어요. 단 한번 신세를 끼쳐야겠어요.”
“승진? 흥, 꿈도 꾸지마.” 했던 나의 상사. 그는 일개 주임한테 그렇게 뒤통수를 얻어맞게 되었다. 나는 그의 털끝만한 도움도 없이, 흰 죽 한 사발 대접도 없이, 그것도 전화 통화로 깔끔스레 대리로 승진하였으며, 울릉도로 룰룰랄라 가게 되었으니까. 나는 그곳 울릉도에서 2년 여 소위, ‘유배문학’을 훌륭하게(?) 펼치게 되었다. <<독도로 가는 길>>이란 수필집 한 권을 낼 만치. 기왕지사 꺼낸 이야기. 그때 그 상관을 좀더 씹어대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기가 이끄는 ‘국(局)’ 단위의 직원들 대부분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는 조직의 막내인 나를 자기 방으로 불러, 풀기 어려운 과제를 주었다. 올바른 기업문화를 꽃피우자면, 우리가 버려야 할 문화유산이 무엇이며 갖추어야 할 게 뭐냐에 관해 공개석상에서 발표하라는 과제였다. 그는 주 타깃을 내 차상급자들인 과장들과 차차상급자인 부장들로 삼으라고 특별지시도 하였다. 그들은 승진공부를 한다면서 창고 등에 가 있곤 하였다. 사실 국장 그 양반도 지난 날 똑 같이 했을 터인데… . 나는 아주 성실하게(?) 연구하여, 그가 배석한 가운데 진지하게 발표하고 있었다.
“저는 국장님의 분부에 따라, 국장님이 추천해주신 이어령 선생의<<정보화 사회의 기업문화>>를 토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책 18쪽에는 작은 글씨로 된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기회주의적 한탕주의를 버려야 한다’, ‘잦은 회의와 보고서 남발을 지양해야 된다.’ 우선, 그 책을 썼던 이어령 선생부터 따지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제가 느끼기엔 그분의 그 책 내용은 죄다 엉터리였습니다. 모두 ‘뜬 구름 잡기’식이었습니다. 그분이 우리 회사에 단 하루라도 근무하고 쓴 책이었다면 몰라도… . 그분이 우리 회사의 속사정을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단지, 우리 회장님과 친분이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책을 쓰고, 회장님은 회삿돈으로 그걸 무더기로 사주어 베스트셀러로 만들고… .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버려야 할 기업문화유산 아닐까요?”
내가 이렇게 발표를 이어가자, 좌중은 다들 조마조마해 하는 표정들이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발표를 이어갔다.
“죄송합니다, 국장님! 다음은 국장님 차례입니다. 저 현업에서는 매일매일 하소연합니다. 제발 일반전화 팔 기회를 달라고 아우성들입니다. 이 무슨 아이러니입니까? 일반전화 특판기간에 어떻게 어떻게 팔고 있는지 보고서를 매일매일 요구하는 바람에, 정작 전화를 팔러 갈 시간이 없다는데요. 국장님께서는 저희도 못미더우신지 일일보고서도 부족하여 주례보고서를 요구하십니다. 또 그것도 부족하여 월례보고서를 요구하십니다. 그 책 대로라면 이야말로 보고서 남발이며 버려야 할 문화유산 아닐까요?”
그는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나를 노려 보는 듯하였다. 그러면서도 강평때에는 애써 “허,허!” 헛웃음을 지었다.
회의가 끝나고 모두 자기 자리로 왔다. 그랬더니, 부장들 과장들이 나를 차례로 불러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윤주임, 참 잘 했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우리는 차마 못했던 말인데… .”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길로 온 사무실에 초비상이 걸렸고, 나는 매일송곳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사표를 쓰거나, 강등(降等)을 해서라도 유배길을 자원해서 떠나고 싶었으니까. 그랬던 것이 승진과 동시에 멀리멀리 울릉섬으로 가게 되었으니, 그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그가 평소 사무실에다 심복을, 첩자를, 프락치를 군데군데 심어두고 지낸다는 사실은 꽤나 후일에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비열한 인물이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때는 한여름인 팔월이었고, 출근한 나는 예고 없는 인사발령문서를 받아보게 되었다. ‘영양전화국 고객서비스과장(총무과장 역할임.) 윤ㅇㅇ, 영주광역지사 근무를 명함. ‘ 바로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청천벽력이었다. 딴에는 성심성의껏 고객님들과 직원들에게 봉사하며 근무했다고 생각했건만… . 짚이는 게 영 없지는 않았다. 그 머저리 같은 노동조합분회장 ‘권ㅇㅇ’ 의 경거망동(?) 소행 덕분일지도 모른다는… . 그는 내 부서 소속이며 내 휘하에 있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는 평소 나를 사석에서, “형님!형님!”하면서 따랐다. 그는 몇 차례 나한테 국장의 비리사실에 관해 볼멘소리를 한 적은 있었다.
“형님, 사실 형님이랑 동급인 국장 그 인간 말입니더. 일과 중에도 낚시터에 가질 않나, 직원이 맨홀작업 때 음주운행자 차에 받혀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했음에도 산재처리 문제로 경영성적이 떨어져 자기도 다칠세라 ‘쉬쉬’하질 않나… . 어디 한번 본때를 보여주어야겠어요.”
나는 그를 수시로 달랬다.
“권 분회장, 남을 그렇게 긁어서 이로울 게 뭣 있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대신, 자네 맘 알아주는 내가 곁에 있지 않은가?”
그러했음에도 그는 일을 결국 저지르고 말았다. 노사간에 체결한 ‘가협상안’에 대한 찬반 투표를 조작하고 만 것이다. 23명 노조원에 불과했던 그곳. 그는 ‘혼자 투표, 혼자 개표, 혼자 집계,혼자 보고 ‘를 통해 전국 최고 투표율,반대표 전국 최고(사측에선 그 반대의 결과를 원했다.)를 만들어 놓고 만 것이다. 그의 곁에 나이께나 먹은 노조원들도 참관인 등의 자격으로 있었을 터. 그러함에도 그 누구도 달래지 못했다는게 말이 되냐고? 다들 나이만 먹었지 ‘헛 먹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이미 팩스로 보낸 결과물이라 달리 돌이킬 수도 없었다. 본디 그런 일일수록 남들 눈에 띄게 곧바로 단죄(斷罪)하지는 않는 법. 나는 나름대로 마음 속으로 고추장을 담그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제법 잠잠해졌다고 생각되던 그 여름날. 나는 그처럼 인사발령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노조분회장은 국장을 타깃으로 삼은 짓을 그렇게 하였건만… . 나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는 않았다. 모두 나의 업보이려니 정도로만 여기고 보따리를 싸서 영주로 갔다. 당시 나의 애창곡이었던 ‘천년바위’가 흘러나오면 아직도 슬퍼진다는 그쪽 후배들도 있긴 하다. 만약, 당시 내가 상부의 인사부서에다 대고 뭐라 뭐라 항의를 했더라도, 그들은 할 말이 더 많았을 것이다. 이른바, 누적관리(累積管理)를 하여, 이런 거 저런 거 온갖 시시콜콜한 핑계를 다 들고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블랙리스트에도 빼곡히 뭐라뭐라 적혀 있었을 것이다. 당시 영주광역지사장은 고맙게시리 예천전화국 총무과장으로 재발령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나는 그저 수평이동에 불과한 것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랬는데,그랬는데… . 그런 일이 곧 나의 족쇄가 되었다는 것을. 마치 낙인(烙印)이라도 되는 듯,나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영주광역지사장이란 양반도 단물(?) 다 빨아먹고(당시 각종 상품판매 실적 등은 예천전화국에서 여러 전화국을 먹여 살렸으니까.), 과장 보직을 박탈하는가 하면, 한직(閑職)으로 한직으로 자꾸자꾸 밀어내는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의 내 직장생활은 숫제 말이 아니었다. 하기야, 나는 그때 눈물께나 흘리며 휴대전화를 한해 동안 500여 대 팔았고, 그 판매수당만 하여도 무려 일천 오백여 만원이나 되었다. 그 눈물 젖은 휴대폰 판매수당을 의미롭게 쓰고자 지금의 ‘만돌이 농원’ 농토를 장만한 것도 사실이다. 그때도 ‘되로 받고 말로 갚았다’고나 할까? 당시 내가 동료들에게 즐겨 썼던 말 아직도 기억난다. “일이 꼬이면 나는 더욱 행복해진다.”가 그것이다. 북한에서 곧잘 쓴다는 ‘벼랑 끝 전술’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프로야구에서 자주 쓰는 ‘위기 다음에 찬스!’와도 크게 다르지 않는 말이기도 하였다. 아니, 나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를 너무도 잘 알고 지냈다. 나아가서, ‘남이 나더러 엿 먹으라고 할 때 나는 늘 그것이 엿이 아니라 꿀임’을 알았다.
다시 돌이켜 본다. 시시콜콜하게시리,내가 학벌을 내세우고자 함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만난 책임자들 가운데는 고등공민학교 출신이거나 중학교 출신이거나 한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게다가, 공채가 아닌 ‘야메’로 들어온 이들이 많았다. 나와 학력의 차이, 그것은 대단히 중요했다. 왜? 그들은 줄곧 위만 보고 치닫는 성향이 강했다.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 그러기에 하나같이 ‘집념’이 아닌 ‘집착’이 강했다. ‘조직관리’라는 미명(美名)으로, 그들은 군데군데 ‘첩자’를 심어두는 등으로 직원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손금 들여다보듯 하였다. 그 비열함을 나는 알고는 지냈다. 윗사람한테는 간이라도 빼줄 듯하면서도 정작 아랫사람들한테는 냉혈동물처럼 처신하던 이들. 그런데 그 ‘첩자’라는 인간들의 행태는 더욱 비열하였다. 거두절미하고 침소봉대하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이런 풍파 저런 풍파 다 겪고 명예퇴직까지 감행했던 나. 그때부터 시쳇말로, ‘편한 백성’이 되어 지냈다. 그리하였던 내가 다시 직장을 잡았다. 이 무슨 변덕이냐고? 하지만, 참 좋다. 쾌적한 환경 등 내가 노후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자리다. 나는 앞으로 직원 그 누구도 헐뜯지 않을 것이다. 말을 하되, 가급적 그를 좋은 사람으로만 또 다른 직원한테 말할 것이다. 빌미, 서로에게 빌미가 되지 않는 행동거지만 보일 것이다. 내 이야기를 여기서 맺는다면, 이 글이 일종의 푸념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다음 단락을 후식(後食)인 양 덧붙이기로 한다.
빌미, 그 어원을 살펴보았다. 빌미의 어원은 ‘빌미’ 자체였다. 다들 아시다시피, 재앙이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기게 되는 동기나 원인을 일컫는 말이다. 대신,’崇’의 원자(原字)가 날 ‘出’ 머리에 보일 ‘示’라고 소개한 이가 있었다. 즉, ‘崇’은 ‘出’ + ‘示’이고, ‘신이 나타나다’란 풀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모든 재앙이나 탈은 ‘신’이 내리므로, ‘빌미’야말로 ‘神’의 어원이라고 주장한다. 이 ‘빌미’의 유의어(類義語)로는 ‘핑계’, ‘꼬투리’,’ 구실(口實)’, 탁사(託辭), 탁언(託言), 명분(名分)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서도 ‘꼬투리’는 퍽이나 흥미로운 말이다. 주로, ‘꼬투리를 잡다’로 쓰이는데, 살펴본즉, 꽤나 설득력 있게 풀이한 이가 있었다. 꼬투리가 콩,팥, 완두 등 콩과식물의 모태(母胎)인 점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것이다. 즉, 꼬투리를 잡기만 하면, 콩이든,팥이든,완두든 그 알갱이들이 튀어 달아날 수 없게 되듯 꼼짝없이 어떤 이가 말려드는 걸 이른다고 보아야겠지.
이제 내 이야기를 슬슬 정리해야겠다. 남한테, 특히 직장 내에서 남한테 섣불리 빌미를 주어서는 아니 된다. 상하간도 문제이지만, 동료간에는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경쟁자인 그는 언제든지 본인의 약점을 파고들어 제삼자한테 퍼뜨릴 수가 있기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사실 나야 이제 그 좋았던 직장에서 훌쩍 나왔으며, 곧 회갑을 맞을 나이다. 남들을 일부러 헐뜯어서 얻을 것도 없는 사람이다. 더욱이, 한 때 나는 피해자 아닌 피해자였던 사람이다. 그러나 아직도 장래가 구 만리 같은 나의 독자님들, 당신들은 이 이야기를 그저 시시껄렁한 이야기로만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 무엇보다도, 남에 관해 제삼자에게 말하되, “그는 참으로 이러이러한 장점이 많은 이더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 한층 돋보일 것이다. 그러함에도 당신이 애꿎게 어떤 이로부터 어떤 빌미로 ‘찍힌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위에서 그 어원을 풀이하면서도 밝혔듯,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神)의 몫인 까닭이다.
(2104.2.22. 어느 연수원 사감실에서.윤요셉)
작가의 말)
경험보다 좋은 교과서는 없다. 또 경험보다 더 좋은 글감도 없다. ‘어떤 경험을 현재화(現在化)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는 거. 그것이 글이다.’ 위 작은따옴표 속 이야기는 수필작가 오창익 교수가 주장한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