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澤]에 관해
못[澤]에 관해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지지난해, 지난해에 이어 삼 년째 벼농사를 하고자 한다. 이미 ‘아시써레’ 내지 ‘마른논써레’는 해두었다. 그러나 모내기에 앞서 반드시 행해야 하는 ‘무논써레’를 하자니, 문제가 생겼다. 한마디로 ‘택(턱)도 없다.’ 봇도랑에 물이 전혀 내려오지 않아, 논에 물을 도저히 잡을 수가 없다. 이리저리 알아본즉, 윗마을 ‘신방리’에 위치한 ‘신방지’ 저수지에서 이곳으로 물을 내려 보내는 수문(水門)이 탈났다는 것이다. 사실 농사는 때를 놓쳐서도 아니 되며, 품앗이 등으로 서로 손을 착착 맞춰야 하거늘... . 평소에는 그리 귀중함을 몰랐던 못물이 이처럼 아쉬울 수가 없다.
지금은 다시금 농막. 품앗이 무논써레를 갔다가 낮술에 절인 농부 수필가의 밤이다. 제법 초조한 맘으로, 허탈한 맘으로 못물을 기다린다. 그러고 있자니, 문득 나의 선친(先親)이 떠오를 게 뭐람? 당신은 당신의 형님들이자 나의 백부(伯父), 중부(仲父),숙부(叔父)이신 분들의 뜻을 잘 따랐다. 우리 다섯 형제들의 이름에다 종형(從兄)들과 마찬가지로 ‘돌림자’인 ‘澤’을 모조리 붙였다는 뜻이다. 景澤, 正澤, 榮澤, 根澤(나),水澤. ‘澤’은 ‘못(pond)’을 일컫는다. 농사에, 특히 벼농사에 없어서는 아니 될 물을 가득 간직하는 게 못이다. 당신은 당신의 아들들이 그러한 못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 같다. ‘澤’을 파자(跛字)하면, ‘물[水]’과 ‘睪[못 택;못가 택;엿볼 역]’이 된다. 아울러, ‘澤’은 윤택(潤澤)·은혜(恩惠)·덕택(德澤)·덕분(德分)· 은덕(恩德) 등의 뜻도 지니고 있음을 새삼스레 떠올려본다. 아무튼, 내 선친은 당신의 아들들이 농부한테는 없어서는 아니 될 ‘못’ 같은 이가 되어주길 바랐음에 틀림없다.
우스갯소리인데, 누군가가 “택도 없다.”고 할 적이면, 나는 오른손바닥으로 내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대꾸하곤 한다.
“무슨 소리? 여기 ‘澤’도 있지 않아요?”
사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말이) 근거가 없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걸 이르거나, ‘(능력 따위가 어떤 일에) 수준이나 분수에 맞지 않는’ 걸 일컫지만... .
못은 우리네 조상들의 그 많은 고안품들 가운데서도 아주 빼어난 작품임에 틀림없다. 주식(主食)의 작물인 벼의 재배에서는 없어서는 아니 될 그 고안품. 이설(異說)도 많지만, 기원전 100년~ 서기 300년이던 삼한시대 때부터 못을 지었다고 하지 않던가. 이른바, ‘관개농업(灌漑農業)’을 그때서부터 했다니 놀랍지 아니한가. 밀양의 ‘수산제(守山堤)’,김제의 ‘벽골제(碧骨堤)’, 제천의 ‘의림지(義林池)’, 상주의 ‘공검지(恭儉池)’. 못과 관련된 최초기록은, <<三國史記>> 백제본기로서, ‘다루왕 6년(서기33년) 정월에 영을 내려 남주군에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春正月令南主郡始作稻田).’고 적혀 있단다. 그런가 하면, 같은 책 신라본기에는 ‘일성왕 11년(서기 144년)에 제방을 보수하고 널리 농지를 개간하였다(修完堤防廣闢田野).’고 적혀 있단다.
옛 군주(君主)의 통치행위를, 덕목을 ‘치산치수(治山治水)’로 요약해 표현하기까지 하였다는 사실. 못과 댐을 짓고 관개시설을 확충해서 하늘만 쳐다보며 농사짓던, 이른바 ‘천수답(天水畓)’을 없애나가는 걸 군왕의 최대덕목으로 삼았다. 사실 내가 느끼기에, 우리나라의 관개시설 확충과 도로망 확충은 세계 정상급이 아닐까 싶다. 수리시설(水利施設)을 여하히 갖추었느냐에 따라 그 나라 백성들 삶의 질은 사뭇 다르다는 거. 이는 두말 하면 잔소리다. 그러한 점에서도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게다가, 지금의 나는 전국에서 못이 가장 많다고 하는 이곳 경산에 노후 삶의 터전을 잡았으니... . 못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지역이라는 점은, 이곳이 과우지(過雨地)가 아니라는 걸 시사한다. 사실 십 수 년 이곳에서 농사하며 지내보았는데, 홍수나 태풍 등의 피해를 본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
이제 못만이 지닌 특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내 신실한 독자님들께 아니 전할 수가 없다. 못물은 댐에 가둔 물이나 지하수나 하천수가 따라잡을 수 없다. 못물은 작물 재배에 유용한 양분도 녹아 있다. 못물은 비교적 병충(病蟲)에 오염되지 않아, 농작물의 병충해를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기도 한다. 그 무엇보다도, 못물은 햇볕에 덥혀진 겉물부터 빼 쓰도록 고안된 관계로, 작물의 냉해(冷害)를 줄인다는 거. 우리네 선조들은 마치 구멍이 촘촘 뚫린 피리처럼 생겨먹은 수문(水門;밸브)을 설계했다는 거 아닌가. 지난날 ‘재배학원론’을 강의하셨던 은사님이자 동문이셨던 교수님은 거듭거듭 그 점을 예찬했다. 특유의 감성적이고 호소력 있는 어조로 후배이자 제자들인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말씀.
“여러분, 저를 포함해서 전국의 내로라 하는 수도작(水稻作) 박사들과 토목 전문가들이 새로 건축한 전국의 댐을 일일이 보러 갔어요. 댐 아래쪽 들판마다 벼가 냉해를 입어 원인 조사하러 말입니다. 그랬더니... .”
그래서 당신은 그 원인을 드디어 밝혀내었노라고 했다. 댐마다 거죽 쪽 덥혀진 물부터가 아닌, 아래쪽 차가운 물부터 빼 쓰도록 토목가들이 엉터리로 설계했던 때문이었단다. 해서, 전국의 그 많은 댐의 수문을 모조리 우리 조상들이 설계했던 못의 수문처럼 뜯어고치게 되었다는 일화였다. 그러면서 교수님은 우리보다 수십 년 앞서가는 일본의 선진 농업을 부러워하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봇도랑의 바닥을 까맣게 아스팔트로 바른다고 들려주었다. 그러면 물이 봇도랑을 따라 흘러가는 동안, 햇볕을 받아 덥혀질 것은 자명(自明)하다.
참말로, 못은 우리네 선조들의 얼이 가득 고인 곳이다. 오로지 수작업으로 쌓고 다졌음에도, 누대(累代)를 거쳐 왔으나 거의 온전한 못. 거기 가득 고인 물은 봇도랑이란 젖줄을 타고 다음 세대, 다다음 세대... 계속 흐르고 있다는 걸.
예전에는 모내기철엔 바쁘고 일손이 워낙 필요해서 이런 말이 있었다. 본디 전통적으로 벼농사는 ‘노동집약성’이 강한 관계로.
“모내기 때에는 죽은 송장의 손도 빌려 쓰고 싶다.”
하지만, 내가 다소 조바심을 부리고는 있지만, 곧 저 ‘신방지’ 수문은 수일(數日) 안에 고쳐질 것이다. 그러면 망종(芒種) 전후에는 모내기를 어쨌든 끝낼 수 있으리라. 못의 수문 탈로 말미암아, 나는 무논써레를 못하고 있다. 아니, 탈난 수문 덕분에, 이 밤에 내가 그 동안 잊고 지내 왔던 사실 즉, 조상님들의 지혜와 은덕을 새삼스레 깨우치게 되었다. 그 뜻을 유훈(遺訓)인양 여기며 살아가야겠다. 나아가서, 나의 이름을 ‘根(근; 뿌리)’과 ‘澤’으로 조합하여 지어주신 선친의 뜻도 다시 헤아려 본다. 참, ‘根’은 내 어머니의 태몽에서 비롯되었다고 들었다. 산삼으로 보이기도 하고 도라지로 보이기도 하는 엄청 큰 ‘뿌리’를 꿈꾸었다고 하였다. 그 또한 내 선친의 유훈인양 여기며, 내 이름을 참으로 사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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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 근택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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