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내 농장은 개판

윤근택 2015. 7. 17. 23:12

 

 

                            내 농장은 개판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평소에는 성가시다거나 번거롭다거나 거치적댄다거나 여겼던 존재가 시나브로 고운 정, 미운 정이 다 들어 더 이상 곁에 없으면 견디기 힘들 때가 있다. 해서, 일찍이 우리네 조상들은,“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하였던가 보다. 바로 내 농장의 개들 여섯이 그러한 존재다. 산골 외딴 데에 농토를 두고 그 농토 한 켠에 농막을 지어 수년째 홀로 지내고 있는 나. 나의 농장은 참말로 개판이다. 본디 내가 그처럼 식구를 늘린 것이 아닐뿐더러 즐겨 데려온 바도 없는데, 일이 그렇게 되었다. 이곳에는 무려 여섯 마리의 크고 작은 개들이 있는데, 밭이웃들의 불평불만도 있고 해서, 천방지축 뛰어놀던 녀석들 가운데 세 녀석은 기어이 붙들어 조치를 해두었다. 목테를 둘러 묶은 다음, 각각 뒷동산 상수리나무 사이에 10여 미터씩 빨랫줄을 묶듯 하여 왕복달리기를 허락하였다. 해서, 녀석들도 어느 정도 산골의 자유를 누리는 편이다. 그러나 나머지 세 녀석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도무지 잡히지 않아 묶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 가운데 한 녀석은 겨우겨우 붙들어 목테를 둘렀으나, 그것마저도 빠져 달아났던 게 벌써 여러 달째다. 그 천방지축의 세 녀석들 곧 막내이(막내)’흰둥이주워온 깜둥이는 그야말로 대략난감이다. 참말로, 나는 한, 둘 정인(情人)들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아끼던 반려견과도 사별(死別)의 아픔이 컸던 터라 더 이상은 사람이나 동물한테 정을 주지 않으려 했다. <<法句經>>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과도 만나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음은 괴로움이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남도 괴로움이다.’라고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그러고서는 산골 외딴 농막에서 홀로 살다시피 했다. 그러했던 나한테 순전히 작은딸애의 마음 씀씀이로 말미암아 개가 생겼던 것이다. 녀석은 자기 친구 세정이가 결혼을 하면서 자기 친정집에서 기르던 강아지 한 쌍을 대신 맡아서 이 애비의 쓸쓸함을 달래주려 내 농장에 데려다 주었다. 그것들은 애살스러웠다. 내가 눈길을 보내지 않았음에도 어찌나 애교를 떨던지! 그것들은 남매지간이었을 터인데, 일을 저질러 새끼를 낳고 말았다. 그랬던 그것들은 이미 몇 해 전 게걸스런 미식가들한테 끌려가서 결국은 그들 입으로 들어갔지만, 그것들 후손은 다시 동기간도 모르고, 부모자식지간도 모르고 거듭 일을 저질러 완전히 개 족보를 만들게 되었다. 내가 지금 거두고 있는 여섯 마리의 개들과, 점박이인 막내가 자기 생질(甥姪)흰둥이하고 붙어먹어 곧 8월이면 낳게 될 강아지까지를 보태면 이곳은 그야말로 개 세상내지 개판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많은 개들 가운데서도 위에서 언뜻 소개했던 막내’, ‘흰둥이’, ‘주워온 깜둥이셋이 하는 짓을 집중적으로 소개코자 한다. 우리네 인간의 가청주파수가 16Hz~ 20,000Hz인데 비해, 개의 그것은 50Hz~ 45,000Hz라고 하였다. 녀석들의 청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혀가 내둘릴 지경이다. 나는 격일제로 농장을 비우고 직장에 다니는데, 이른 새벽에 승용차를 몰아 개울가 농로(農路)로 오게 되면, 세 녀석이 마치 달리기 경주라도 하듯 달려오곤 한다. 하도 무분별해서 반가움은커녕 차바퀴에 뛰어들세라, 경적을 빵빵울리기 일쑤인데 도대체 무서워하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은 보름 전쯤 불행한 일을 겪게 되었다. ‘흰둥이가 자동차 바퀴에 받히었던지 깨갱대며 맥을 못 추는 게 아닌가. 어찌 할 바를 몰라 죽든 말든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했건만, 절룩대던 다리가 자연치유 되었다. 그 이후부터 녀석은 다행스레 나의 승용차 경적소리에 조심하는 눈치다. 내가 위에서 두 차례씩이나 개판이란 말을 쓴 데는 그만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녀석들은 내 농막 앞 잔디뜰에 놓아둔 원탁에 올라가 포개서 자는 예가 많다. 더 이상 말릴 재간도 없다. 그러니 판[]이되, 사람이 그 앞에 둘러앉는 판(원탁)이 아닌 개의 판인 셈이다. 녀석들 셋의 자발없음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흰둥이녀석은 덩치가 중개 수준을 넘었는데, 자기 고모이며 체구가 작은 점박이 막내를 범했다는 거 아닌가. 사실 자기 생질인지도 모르고 몸을 허락한 막내가시내가 더 문제아일 테지. 그것도 나이가 어린 생질한테 첫 팬티를 그렇게 홀랑 벗어댔으니... .

      녀석들 셋의 천방지축은 참말로 끝이 없다. 내가 고추밭으로 향하면, 자기네가 먼저 목적지에 가서 발로 땅을 파거나 이곳저곳에 납작 엎드리거나 뒹굴거나 졸거나 한다. 내가 들깨모를 내러 가면, 자기네가 먼저 또 그곳에 가서 이미 내가 심은 들깨모에 해코지를 하기도 한다. 더더욱 가관인 것은, 내가 한 두 차례 내 농장을 들르지 않고 곧바로 우회로(迂廻路)로 달려 저 금정골들깨밭에 갔을 때에 그 녀석들이 보여준 행동이다. 좁은 산길이라 모롱이를 돌 적마다 행여 맞은편에서 차가 달려올세라, 경적을 울렸을 뿐이데, 녀석들이 어찌 이 할애비의, 의붓 할아버지의 승용차 소리인지를 알았을까? 더더군다나 농장에 천방지축 노닐던 녀석들과 직선거리로 따져 수 백 미터나 떨어졌으며 달리는 차인데, 어찌 따라잡을 생각을 하였더냐고? 사실 한 두 차례는 무척 놀랬다. 내가 승용차를 그 골짝 간이 주차장에 세우고 차창을 닫는 순간, 어디에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비호(飛虎)처럼 달려오는 동물이 있었으니까! 나는 그 동물들이 멧돼지이거나 남의 집 사냥개인 줄 알고 기겁을 하였다. 하지만, 분명 내 어린것들이었다. 사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녀석들한테 마음을 조금씩 열어주게 되었다. 아니, 곁에 있으면 맘이 든든해지는 것 같아, 은근히 속히 달려와 주길 바란다. 배신은커녕 무조건 자기네 주인을 따르고자 하는 그 심성(心性)이 갸륵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녀석들한테 별도의 간식 따위를 건네준 적도 거의 없었다. , 따로 집을 마련해준 적도 없다. 녀석들한테 따로따로 밥그릇을 정해준 바도 없었다. 실은, 나름대로 개집을 갖다 군데군데 놓아두었지만, 녀석들은 그 집들을 팽개치고 집시처럼 보헤미안처럼 내 농막 처마 밑에서 자곤 한다. 녀석들이 한 군데도 아닌 밭 이 곳 저 곳에 갈라 앉아 자리를 뜨지 않고 내가 일을 끝내고 귀가할 적까지 자리를 지키는 이유까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오늘 이 글을 쓰는 동안 비로소 녀석들의 행동거지의 참뜻을 알게 된다. 녀석들 나름대로 그 곳을 자기 담당 초소로 여겨,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는 걸.

      제대로 된 훈련을 하지도 않은 바람에 아직은 말귀를 못 알아차리기는 하지만, 내가 밭일을 하는 동안 그 밭을 맴돌곤 하는 세 녀석을 더 이상은 탓하지 말아야겠다. 설령, 내가 가꾸는 작물 몇 포기쯤 해칠지라도 그걸 크게 탓해서도 아니 될 것 같다. 적막한 골짝에서, 남들처럼 MP3나 라디오를 틀지도 않고 들일에만 분주한 나한테 그것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재롱이라는 걸 왜 여태껏 몰랐던고.

      끝으로, 뒷동산 상수리나무그늘에 묶어있는 녀석들 셋한테서도 전에 없이 고마움을 느낀다. 녀석들은 이 밤사이에도 5미터가량, 10미터가량의 빨랫줄처럼 생겨먹은 줄 사이를 왕복달리기 하며 고라니, 멧돼지들의 농장침입을 막고 있을 터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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