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데

윤근택 2015. 7. 19. 14:52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데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우리 쪽 말에, “(저 사람은) 코가 너무 세.”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황소고집이되, 그가 벽창우(碧昌牛)의 고집 같음을 이르는 말이다. 다시, 이 벽창우는 평안북도 벽동(碧潼)과 창성(昌城) 지방의 크고 억센 소에서 비롯된 말이란다. 미련하게 고집이 센 사람을 벽창우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네는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을 즐겨 쓴다. 똥고집이니 꼴통이니 하는 말도 심심찮게 쓰는 편이다.

      문득, 젊은 날 울릉전화국에 근무하는 동안, 입사 후배이자 무선통신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박 아무개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떠오를 게 뭐람? 나는 그와 퇴근길에 회사 앞 우리의 참새방앗간(?)강원도 식당에 들러, 오징어순대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곤 했는데, 그는 입사 전 외항선을 타고 낯선 이국(異國)의 항구에 곧잘 정박해서 그곳 술집 등에 자주 드나들곤 했단다. 그런데 어느 미개한 나라의 술집 보이는 숫자 개념이 없어, 이상한 행동을 보이곤 했단다. 그는 박 아무개네 테이블 곁을 떠나지 않고서, 박 아무개가 맥주병 뚜껑을 호기롭게 병따개로 뻥뻥소리를 내며 따자, 멀리 달아난 그 병뚜껑을 주워 손에 모으곤 했다는 거 아닌가. 박 아무개는 그를 골려줄 요량으로 병뚜껑이 보다 멀리 날아가도록 병을 따곤 했단다. 그러면 그 종업원은 병뚜껑을 찾느라 혼쭐이 났고. 우리 같으면 나중에 손님이 마신 빈 병 개수를 세어보고 술값을 셈할 텐데, 그 종업원은 그렇게 모은 병뚜껑과 손님이 건네는 지폐를 일대일로 교환함으로써 셈을 하더라는 이야기였다. 한마디로, 그 나라사람들은 숫자 개념이 그 정도에 그치고 있었던 셈이다. 그들의 숫자개념은 손가락 열 개에 그침을 미루어 짐작할수 있다.

      내가 왜 위와 같이 장황한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했을까? 나는 어제 참말로 못 들었으면 좋았을 어느 부자(父子)의 언쟁을 듣고 말았다. 그때 나는 내 참깨밭에서 군데군데 빠진 자리에 참깨모를 머들기고[補植] 있었는데, 개울 건너 내 밭이웃 이 아무개노인네 더덕밭에서 그분 둘째아들과 고성(高聲)이 오갔다.

      아부지, 그러게 내 더덕밭에 오지 말라지 않았어요? 앞으로 잡초가 우거지든 말든 들에 나오지 말아요. 그리고 제초제를 치더라도 더덕뿌리가 다치지 않게 뿌리까지 죽이는 약은 섞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 않아요?”

       그러자, 영감님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눔의 자슥아, 이 바랭이풀 꼴이 뭣꼬? 사람 키만치 자랐는데, 제초제를 아니 치고 어쩌란 말이고? 독하게 쳐서 아주 박살을 내야지!”

      사실 거기까지는 내 귀에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니는 윤 과장말만 믿고서... . ‘윤 과장한테 앞으로는 싱겁게시리 막걸리 사들고 가지 마라. 그 사람 제초제 쳐준다고 니는 2만원씩이나 줬다면서? 이게 뭣꼬? 봐라, 친 흔적도 없잖아? 그 사람 말이야, 자기 약을 아낀다고 이 따꾸(따위)로 해 두었겠지?”

      그 말을 듣자, 나는 호미와 참깨모를 던져버리고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서 차근차근 해명하고 싶었으나, 꾸역꾸역 참았다. 본디 그분 부처(夫妻)의 꽁꽁 막힘은 그분 자녀들뿐만 아니라 이곳 마을사람들한테도 소문난 터라, 한마디로 갋을 하등의 가치가 없음을 알고 지낸다.

      사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란 말도 있고,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말도 있어, 그 다음의 그분들 언쟁(?), 대화도 더 이상은 기대치 않았다. 그런데 그 댁 할머니의 남편 편듦과는 달리, 그 아들의 꽥 지르는 말은 듣는 내가 다 속 후련했다.

      제초제 약값만 해도 한 병에 만원인데, 2만원 받고서 두 번 제초제 쳐 준 것만 해도 고맙지요. ”

       나는 내 일을 끝내고, 아무것도 모르는 듯 내 농막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그분들은 더덕밭에서 뙤약볕 무릅쓰고 일을 하고 있었다. 개울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가 영감님 내외분한데, “들에 오셨니껴(오셨습니까)?” 태연하게 인사를 드렸다. 그러고서는 그 아들한테 손짓을 해서 내 농막으로 몰래 오라고 했다. 새참술을 권하며 그를 위로했다.

      아우님, 어르신들 안타깝지만, 한 평생 배운 대로 고집하시니... .”

       그러자 그는 숨이 탁탁 막힌다고 하면서 고개를 연신 가로저었다. 그는 그 댁 둘째아들이자 이곳과 제법 떨어진 울산에 사는 사람이다. 해서, 주말께에나 어쩌다 한 차례씩 자기 부모님의 성화에 마지못해 다녀갈 수밖에 없는 형편. 나는 나보다 세 살 아래인 그가 내 농막으로 새참술을 얻어 마시러 올 때에 몇 차례 당부한 바 있다.

      아우님, 90을 바라보는 어르신들인데, 그러다가 일사병 등으로 세상 뜨시겠어요. 점심도 아니 드시고 종일토록 호미질을 하시곤 해요. 그러니 말리시오. 내가 어르신들 몰래 제초제를 쳐 드릴 테니... .”

      제초제 사건(?)은 그리 된 것이다.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는 나한테 아마 이런 반문(反問)을 하실 것 같다.

     "오해에서 비롯되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작가인 양반이 하고많은 글감 다 두고서 이웃의 연세 많은 어르신 험담이나 하다니?”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당사자가 곁에 없다고 하여 험담 한 이는 바로 그 노인이다. 그 험담에 맞장구를 친 이는 할머니인 것이고. 지금 내 심정이야말로 본전 생각이 간절하다또는 물에 빠진 이 건져주니 내 보따리 내어달라딱 그 짝이다. 더더욱 심히 말해 ‘X주고 뺨맞은 꼴이다. 농사로 따지자면, 그분들은 나의 대선배에 해당한다. 역산해본즉, 적어도 6,70년 동안 본격적으로 농사를 하여 왔을 분들이다. 그러함에도 억지를 부리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맹추라서인지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반대로, 내가 제초제값 1만원을 포함해서 품값 2만원을 드려볼까 싶다. 그러고서는 그 댁 밭 크기와 비슷한 200여 평의 내 밭에 제초제를 쳐주시되, 일 년 내내 한 포기의 풀도 다시는 돋지 않게 해달라고 졸라볼까도 생각해 보았다. , 내 애독자들께서도 자칫 놓칠 수 있는 사항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잡초의 생존전략과 맞물려진 사항인데, 풀들은 단 1회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종류에 따라 발생하는 시기가 다르고, 또 같은 종류의 풀일지라도, 이를테면 1기생, 2기생, 3기생, 4기생... 그 발생주기를 거듭한다. 특히, 바랭이풀의 생존전략은 대단하다. 다 잡았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면, 농부를 비웃기라도 하듯 새 씨앗을 촉 틔운다는 사실. 장마가 시작되면, 농부가 손쓸 방도가 없어지는데, 그때를 노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게 바랭이풀이다. 내 경험상, 바랭이풀만은 처서(處暑; 더위를 처결한다는 데서 비롯된 절후임.)때까지 거듭 발생하거늘... . 실제로, 그 노인이 최근들어 본 잡초는 대개가 바랭이풀로서, 맨 처음부터 살아남았던 놈들이 아니다. 나는 적어도 1기생, 2기생은 노랗게 다 잡았던 것이다. 사실 영감님 본인도 오랜 경험으로 그 사실을 알 터인데, 한 두 차례 내 작업의 결과를 보았을 터인데, 그처럼 억지를 부리다니! 어쩌면 그 영감님은 무지렁이인 터라, 바랭이풀이 1기생, 2기생, 3기생... 기수를 달리하며 시간차 공격을(?) 해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지낼는지 알 수가 없다.

      나의 애독자들께서는 내가 이 글을 통해 어떠한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아직은 눈치채지 못하였을 것 같다. 나는,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을 한다는 말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 노인 내외분은 이 마을에서 가장 부지런한 농부이되, 투입된 노동력에 비해 소득은 가장 낮은 분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소득 없는 삽질경영 내지 호미경영을 하기 때문이다. 삽질경영은 막대한 국민의 혈세를 들여 4대강(四大江)을 온통 파헤침으로써 사대강(死大江)으로 만들어버린 동양의 어느 나라 전직 대통령 하나만으로 족하거늘... . 그분들 일머리에 관해 하나만 흉보아야겠다. 그 문제의 더덕밭 가장자리를 놀려놓는 게 아깝다며 둘 내외분이 종일토록 옥수수 씨앗을 넣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옥수수들이 촉을 틔울 무렵, 나더러 제초제를 치더라도 그 자리는 피해서 쳐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사실 그 무렵 이미 1기생, 2기생 바랭이풀이 그 곳에 활개를 치고 있었다. 내가 온 밭에다 살포하고자 했던 제초제는 외떡잎식물 가운데 벼과[禾本科]의 식물만 골라잡는 이른바 선택성 제초제였는데, 공교롭게도 옥수수도 벼과인지라 원망을 들을세라, 조심스레 해서라도 살포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옥수수를 심더라도 그렇게는 심지 않는다. 따로 씨를 부어 일정기간 모를 키운다. 그러는 사이, 옥수수 모를 옮겨심을 본밭에다 제초제 살포 등으로 말끔하게 한 후에 옥수수모를 그제야 옮겨 심는다. 메주콩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행한다. 그런데도 그 노인 내외분은 한평생 익힌 대로를, 그분들 조상으로부터 배운 대로를 고집한다. 이는 지식이라기보다는 지혜에 해당한다. 사고(思考)는 밀가루반죽처럼 말랑말랑 해야 하는 법. 사고가 양생된 콘크리트 같으면 볼 장 다 본 꼴이다. 어디 이러한 사고의 유연성이 농사에만 요구되는 사항이랴? 작가들 가운데도 특히 수필작가들 가운데도 걸러서 받아들이지 않고 전통에만 얽매이거나 전범(典範)만을 그대로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왜 없을라고? 다들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끝으로, 나는 내 신실한 독자님들께 강조하고픈 말이 있다. 이미 위 두 번째 단락에 주기(朱記)해두기까지 하였지만, ‘미루어 짐작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늘 실천해야 할 사항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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