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음악 이야기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47)

윤근택 2015. 8. 28. 22:43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47)

                                               - 레퀴엠(requiem)을 바침-

 

                                                                        윤요셉(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레퀴엠(requiem), Requiem ateranam dona eis Domine(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의 첫 말이다. , 레퀴엠안식을 .의 뜻을 지닌다. 이는 본디 성당에서 장례미사에 쓰인 곡이기도 했다. 후일, 이 레퀴엠은 독립적인 음악 장르로 자리잡게 되었고, 진혼곡(鎭魂曲)으로도 풀이된다. 모차르트, 케르비니, 베를리오즈, 베르디, 가브리엘 포레 등을 5대 레퀴엠 작곡가로 꼽는다. 이들 다섯 작곡가들이 레퀴엠을 작곡한 동기도 제각각이다. 하나하나 소개해 보기로 한다.

모차르트. 그는 말년에(사실 말년이라고 해봤자, 그 젊은 서른 일곱으로 일생을 마감했지만.) <<요술피리>>를 적고 있었다. 그는 궁핍했고 건강이 꽤나 아니 좋았다. 어느 날 어떤 이가 누구의 부탁이라면서 그에게 와서, 레퀴엠 작곡을 청탁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후란쯔 폰 발제크 슈투파라 백작의 청탁이었다. 그 백작은 죽은 아내를 위한 진혼곡을,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그렇게 청탁한 것이었다. 당시는 유력인사들이 작곡가들을 부려 써서(?) 곡을 적은 다음, 자신이 적은 걸로 유세 아닌 유세를 떨던 분위기였다고 한다. 하기야, 요즘 우리의 문학계에도 그런 일이 전혀 없지 않다고 들었다. 특히, 자서전이라고 시중에 나오는 책들이 . 내가 그걸 시비 삼을 일은 없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몫이니까. 어쨌든, 모차르트는 저승의 사자(使者)가 왔다갔다 하는 가운데 그 곡을 작곡해 나갔다. 그는 죽기 전날 절친한 친구 등이 와서, 그 동안 적은 곡을 노래하는 자리에서 탄식한다.

곡은 이제 겨우 반쯤만 작곡된 채 제3부의 제 6, 라크리모자(눈물의 날) 8소절에 그치었다.

그리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제자 쥐스마이어를 불러, 나머지 부분을 어떻게 꾸려가야 될지에 관해 지시를 한 후 눈을 감게 된다. 그러기에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미완성곡이다. 나머지 부분은 제자 등이 적었다고 보면 옳다. 그의, 남을 위해 쓰여진 진혼곡이 자신의 진혼곡이 되었다. 사실 위 다섯 작곡가들의 레퀴엠 가운데 가장 애송되고 애연되는 곡이 이 모차르트 레퀴엠이다.

케르비니. 사실 나는 그에 관해서만은 자료를 챙기지 못하였다. 다만, dieslrae(분노의 날, 이상한 나팔소리, 눈물의 날)만은 기억한다.

베를리오즈. 당시 프랑스 내무장관, 아드리안느 가스빠렝은 18307월혁명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베를리오즈한테 레퀴엠 작곡을 청탁했다. 그래서 적은 것이 베를리오즈 레퀴엠이다.

베르디. 그는 평소 시인, 알레산드로 만초니를 좋아했다. 1873년 그 시인이 사망에 이르자, 베르디는 그를 추모하며 레퀴엠을 적었다. 나는 제 2진노의 날 을 즐겨 듣는다. 그 가운데서도 4번째 주제(?) 가엾은 나(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테너)9번째 주제, 눈물과 슬픔의 그날이 오면(독창과 합창)을 자주 듣는다.

가브리엘 포레. 그는 레퀴엠을 적을 당시 부친이 2년 전 작고한 상태였다. 작품 창작 중에는 모친까지 작고했다. 1885년 착수해서 1887년에 완성한 레퀴엠. 그의 레퀴엠은 온화한 레퀴엠이란 별칭을 지니고 있다. 양친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들 한다. 사실 그도 살아생전 양친의 죽음을 음울하게 묘사할 수 없어, 그렇듯 온화하게 작품을 적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단다.

내가, 음악평론가도 아닌 내가, 이들 다섯 작곡가들의 레퀴엠에 관해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도 무리다. 사실 더 알지도 못하는 형편이고. 그런데 왜 이렇듯 장황하게 적어야 했을까? 나는 독자님들께 그 누구라고 감히 밝힐 수는 없지만, 고인(故人)이 된 그들을 위해 레퀴엠을 바쳐야 한다. 그들의 영혼을 달래 주어야 한다. 설령, 그 일이 부처님이 이르신 연기법(緣起法)에 의한 것이고, 윤회법(輪廻法)에 의한 오랜 죄업일지라도. 그렇더라도, 애연되고 애송되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왠지 싫다. 모차르트 또한 그 젊디 젊은 나이에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베르디의 그것도 왠지 그들한테만은 들려드리고 싶지 않다. 웅장하기는 하여도, 그 착하디 착했던 고인들의 가슴을 다독이기에는 나무 우렁차서. 대신,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을 그들에게 거듭거듭 들려드리고 싶다. 가브리엘이 시사하는 바, 그는 성모님께 날아와서,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시여, 성령으로 아기(예수)를 잉태하셨나이다.하며 알리고 간 천사가 아닌가. 그래서인지 그의 곡은 참말로 온화하다.

사랑스러웠던 그대들! 이 곡, 포레의 레퀴엠을 들려드릴 테니, 이 어리석은 이를 이젠 제발 용서해 주시구려. , 죄를 너무 많이 지었어요. 정말 죄송해요. 다들 편히 쉬시구려.

그리고 주님께 간청하기로 한다.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Requiem ateranam dona eis Domine).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비나이다. 아멘.

끝으로, 성모님께도 전구(傳求)한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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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종합문예지이며 계간지인 <<自由文學>>에 뒤따라오며 시리즈물로 실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