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디
‘마디’에 관해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이 연수원 사감실의 근무환경은 나무랄 데가 없다. 숙직실도 딸려 있으며,욕실(浴室)을 겸한 화장실도 딸려 있으며, 전기방열판도 곁에 놓여 있다. 그 무엇보다도 이곳에 내가 선뜻 취직한 것은, 컴퓨터와 프린터기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고, 이를 일과 중에도 남의 눈치 아니 보고 쓸 수 있어서다. 게다가, 나의 맞교대자 ‘장ㅇㅇ’ 사감은 꽤나 ‘깔끔이’인데다가 교양 또한 풍부하다. 한마디로, 수필작가인 나한테 맞춤형 서비스가 이뤄진 곳이다. 그런 점에서도 내 농막보다 훨씬 낫다.
나는 오늘도 출근과 동시에 컴퓨터를 켜고, 곧바로 뉴 에이지 피아노곡을 흘려놓을 참이었다. 그런데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린 사진이 어제와 다름을 알게 되었다. 내 파트너 ‘장ㅇㅇ’ 사감의 감각이 한결 돋보인다. 지난 번에 내가 그에게 한바탕 대나무를 예찬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이 찍은 대나무 군락을 곧바로 올려둔 것이다. 다시 보아도 늠름한 대나무다. 사진은 모니터 전체를 차지하고 있고, 그 마디들이 유난히 두드러져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이번 이야기는 자연스레 ‘마디’다. 내 파트너는 글감이 쪼들린 나한테 이렇듯 새로운 글감까지 은근슬쩍 주고 갔으니 고맙기 한량없다.
사실 대나무가 나에게 보여준 미덕은 꽤나 많았다. 그러기에 ‘대나무에 부쳐’라는 수필을 첫 수필집에 실은 바도 있고,’대숲에서’란 수필을 적어 종이매체에까지 발표한 적도 있다. 물론, 두 작품 다 흔히들 노래했던 ‘매난국죽’ 사군자의 일원으로서 ‘대나무’를 노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한마디로, 색다른 시선으로 대나무를 노래했다. 그랬던 내가 대나무에 관해 마저 들려줄 이야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마디’다.
대나무의 마디는 아주 특별한 존재다. 저 창망(蒼茫)한 하늘까지, 속된 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대나무가 치솟게 하는 원동력은 바로 그 마디에 응축되어 있다. 이 무슨 이야기냐고? 대개의 식물들은 끝에 이른바, 생장점(生長點)이란 게 있고, 그 곳에 응축한 에너지로 식물을 쑥쑥 자라게 한다. 하지만, 대나무만큼은 그러한 메커니즘을 택하지 않는다. 죽순(竹筍) 시절에 이미 한 평생 자랄 바탕을 다 간직하게 된다. 30개 내지 70개 어린 마디를 죽순 안에다 간직한다는 거 아닌가. 그 마디들이 자라고, 그 마디들 사이를 늘리는 것이 바로 대나무를 비대생장(肥大生長)케 하고 수고생장(樹高生長)케 할 따름이란다. 대나무 마디야말로 성장판(成長板)인 셈이다. 그러한데, 그 마디가 응축한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인지 놀랄밖에. 그 마디들이 힘을 합치면, 한창때는 자신들의 주인인 대나무를 하루에 120센티미터씩이나 자라도록 한다고 하였다. 이 대나무의 마디가 단지 그렇듯 생장의 몫만 수행하는 게 아니라는 점. 그 점이 나를 다시금 놀라게 한다. 언뜻 보기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여기기 쉬운 그 얇은 막(膜)과 더불어, 제 주인이 쓰러지지 않도록, 부러지지 않도록 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사실 본디 대나무는 위로 자라기만을 좋아하는 습성을 지녔다. 그러니 여타 수목들과 달리, 속을 꽉꽉 채울 겨를이 없다. 즉, 목질화(木質化)할 틈이 없다. 자연히 허허로워서 부러지거나 쓰러질 위험이 많은 나무다. 이를 보완하자면, 버팀개가 필요한데 바로 마디와 얇은 막의 힘을 보탬음으로써 그렇듯 든든하게 서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얇은 막도 마디 못지않게 원활한 영양공급을 담당한다고 한다. 어쨌든,마디를 빼고서 대나무를 노래한다는 것은, 앙꼬 없는 빵 타령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일단, 대나무 마디 이야기는 여기서 접기로 하자. 대신, 여러 종류의 마디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음악의 마디. 곡의 최소 단위를 일컫는 말로서, 소절(小節)이라고도 부른다. 악보상 세로로 그은 선으로 구획된 걸 이른다. 박자의 도막짓기는 곡 머리의 박자표에 의거, 거의 절대적인 규칙을 따른다. 가령, 4분의 3박자는 한 마디 안에 음표 및 쉼표의 합계가 4분음표 3개에 상당하다. 17세기부터 상용화된 이 마디. 박자와 악센트가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박절적(拍節的) 음악에는 반드시 사용한다. 물론, ‘못 갖춘 마디’니 ‘갖춘 마디’니 하는 용어도 따로 있긴 하지만… .
동물의 마디. 뼈와 뼈가 맞닿은 부위를 일컬으며, 이 마디는 물렁뼈라는 특수한 조직으로 연결된 게 상례(常例)다. 이 마디는 인접한 두 뼈를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는, 없어서는 아니 될 조직이다. 그러함에도 요산(尿酸)의 원활한 흐름을 방해하여 류마티스성 관절염을 유발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아울러, 노인들에게 퇴행성 관절염을 유발하기도 한다. 동물의 마디 가운데도 특히 빼어난 마디는 절지동물(節肢動物)의 그것이리라. 전체동물 가운데 3/4를 차지한다니, 진화적인 측면에서도 체절(體節)을 많이 지닐수록 살아가기에 유리한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마디는 동물한테도 없어서는 아니 될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친족간 촌수(寸數). 나를 기준하면 각각 이렇게 된다. 아버지는 1촌, 형제는 2촌, 아버지의 형제는 3촌(백숙부), 아버지 형제들의 아들딸은 4촌(종형제)… 5촌은 종백숙부, 6촌은 재종형제, 7촌은 재종 백숙부, 8촌은 삼종형제,9촌은 삼종백숙부, 10촌은 사종형제. 아버지의 아버지는 조부. 조부의 아버지는 증조부, 증조부의 아버지는 고주부, 고조부의 아버지는 현조부. 형제의 아들딸은 질(3촌),4촌의 아들딸은 재종질(5촌), 8촌의 아들딸은 삼종질(7촌), 10촌의 아들딸은 사종질(11촌). 사실 그 호칭이 어려운 듯 하지만, 짝수는 무조건 형제 항렬이고, 홀수는 아재비 또는 할애비 항렬이다. 촌수도 헤아리지 못하고, 즉 위아래도 모르고 그저 아저씨라거나 아주머니라거나 하면 ‘돌상놈’ 소리를 듣게 되어 있다. 이 촌수라는 게 곧 ‘마디’를 일컫는 말이다. 대개 식물들의 마디나 잎도 그러한 꼴로 뻗는다. ‘피보나치 수열’에 의거, 1,3,5,8,13,21… 일정한 규칙이 있다고 하지 없던가. 마디[寸數]를 알고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추는 거, 현대인들한테 갈수록 요구되는 바이다.
문장의 절(節). 사실 문장에서 말하는 ‘마디’는 다양한 뜻으로 두루 쓰인다. 우선, 구(句)에 대응되는 말로 절(節)이란 게 있다. ‘구’가 둘 이상의 낱말이 모여 하나의 품사 자격을 얻은 것을 일컫는데 비해, ‘절’은 주어와 술어가 다 들어있는 형태를 말한다. 예를 들어, ‘겨울이 되니 날씨가 춥다.’의 경우, ‘겨울이 되니’도 하나의 절이고, ‘날씨가 춥다’도 하나의 절이다. 이들을 각각 딸림마디(종속절), 으뜸마디(주절)라고 한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절’도 제대로 부려 써야 한다. 글의 내용을 여러 단락으로 서술할 때에 한 단락을 일컬어 절(마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필작가 즉, 산문작가인 나는 이 단락의 개념을 꽤나 중시한다. 기회 있을 적마다 수필작가들한테,일반독자들한테 강조했던 것도 사실이다. 무조건 한 자를 ‘들여쓴다’고 하여 그것이 단락이 되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까지. 단락에는 통일성, 완결성, 강조성, 일관성 등 네 가지 기본원리가 있다고 누차 강조해 왔다. ‘리드(Read,Herbert)’는 단락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표현했다.
“우리는 문장으로써 말하나, 단락으로써 생각한다.”
단락은 통일된 생각의 한 덩어리라고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위에서 밝힌 네 가지 원리를 포괄적으로 밝힌 문장이기도 하다.
이 즈음에서 두서 없는 나의 ‘마디’ 이야기 모두를 정리함이 좋겠다. 실, 새끼, 줄 따위가 엉키거나 맺힌 부분도 ‘마디’라 하며, 24절기도 ‘마디’라고 풀이할 수 있음에 유의한다. 그 어떤 마디든, 그것은 하나의 구획이기도 하지만, 단절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 마디는 면면(綿綿)히 이어가는 그 무엇을 나타낼 때에 적합한 어휘임을 알겠다. 그것은 한 마디로, ‘끊고 맺는 맛이 있어야 한다.’는 말과 통한다. 심지어, 마디는 우리가 흔히 남자 성인의 거시기를 들어 하는 욕, “ㅈ도!”에도 축약되어 있다. 이 무슨 해괴한 말이냐고? 이미 나의 발표작 ‘속어(俗語) 공부(1)’에서도 그 점을 소개한 바 있다. 기왕에 ‘-도’가 ‘강조’와 ‘포함’을 나타내는 접미사이니, 그 욕 “ㅈ도!”도 두 갈래로 생각해 보아야지 않겠나 하면서 적어 두었다. 어떻게? ’ㅈ도 모르는 녀석이 송이버섯 따러 간다고 껍쭉댄다.’하는 냉소적 의미도 있는가 하면, ‘ㅈ도 마디가 있다.’하는 철학적 의미도 녹아있다고. 어찌 되었든, ‘마디’는 ‘끊고 맺은 맛이 있어야 한다’를 대변하는 말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