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드가의 안경

윤근택 2015. 9. 9. 21:59

 

 

 

                         

                                      드가(De Gas)의 안경

 

 

 

                                               윤요셉(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이 밤 몹시 심심하다. 밤마다 슬피 울던 소쩍새도 오늘밤엔 어디로 갔는지 기척이 없다. 구애(求愛)를 하느라고 무논에서 개골대던 수개구리들도 이젠 볼 장 다 본(?)’ 것인지, 오늘밤엔 다들 요란 떨지 않는다. 인터넷도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등 영 신통치가 않다. 막상 검색해볼 만한 꺼리도 별로 없는 것 같지만. 본디 이 농막에도 텔레비전이 있었지만, 위성 안테나 월 사용료 1만원도 낭비인 것 같아서 끊은 지 오래다. 밤에는 라디오를 왕왕틀어 두기도 하지만, 그 목적은 다른 데 있다. 내 콩밭에 몰래 와서 새순을 훔쳐 따먹는 고라니 녀석을 놀래주기 위함이다. 또 몇 그루 심어둔 여름사과 아오리열매를 가지째 부러뜨려 따가는 멧돼지를 쫓기 위함이다. 며칠 전부터는 이 라디오마저 틀지 않는다. 방송 출연자들의 요란 떠는 소리가 잡음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일반전화와 휴대전화가 있긴 하여도, 꼭히 전화를 걸 만한 상대도 없다. 설령, 목소리를 듣고픈 이가 한 둘 있다손치더라도, 깊은 밤에 문안을 핑계 삼아 전화를 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리고 본디 남의 책, 남의 글이라고는 거의 읽지 않는 이가 새삼스레 남의 책을 펼칠 리 없다. 어쨌든, 무료하다.

앉은뱅이책상 위에 얹힌 돋보기안경을 막 낄 태세다. 낮에 일을 하다가 손가락에 가시가 박였기에, 바늘로 그 가시라도 뽑으면 덜 무료할 것 같아서. 그러다가 문득, ‘드가를 떠올린다. 아니, 그가 낀 안경을 떠올린다. 아니 아니, 그가 깨진 안경알을 철테 메우듯 주워 모아 고무줄로 안경다리를 만든 그 안경을 떠올린다. 참말로 그랬다. 영화 빠삐용에서 빠삐용의 절친한 감옥 동기(?) 드가(더스틴 호프만 )는 강제노역을 하던 중 안경알을 깨뜨렸고, 그걸 꿰맞추어 끼고 여생을 악마도(惡魔島)’라고 하는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형기(刑期)를 채운다.

여기서 잠시, 영화 빠삐용의 내용을 소개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아직 감상하지 못한 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함이며, 이미 감상한 분들한테도 환기를 돕고자 함이다. 게으름 피우느라고, ‘위키백과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왔음에 관해 용서를 구한다.

가슴에 나비(빠삐용)의 문신이 있는 앙리 샤리엘(스티브 맥퀸)은 빠삐용으로 부르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죄수다. 혹서와 가혹한 강제노동, 그리고 자기에게 워진 살인죄란 누명을 벗기 위해 남미 프랑스령의 악명 높은 기아나형무소에서 탈옥을 꾀하나 실패하여 공포의 조셉 섬 형무소의 독방에 2년간 갇히고 만다.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아무도 살아 나오지 못한다는 지옥의 독방에서 그는 바닥에 기어다니는 지네나 바퀴를 잡아먹으며 겨우 연명한다. 온갖 고초 끝에 독방형을 마치고 다시 상 로랑 형무소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채권 위조범 드가(더스틴 호프만) 등과 다시 탈주하지만, 동료들은 모두 살해되거나 잡히고, 고초 끝에 빠삐용만은 독화살을 맞아 바다에 빠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콜롬비아의 해안이었다. 여기서 수도원 원장의 밀고로 다시 체포되어 이번에는 5년의 독방형을 받는다. 지옥 같은 형벌까지 견뎌낸 후 이번에는 상어와 험한 파도로 둘러싸여 탈출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이른바 악마도(惡魔島)로 이송되어 비교적 편안한 형기(刑期)를 보낸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인생을 체념하여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이 고도에서 보내려는 드가를 외면한 채 빠삐용은 매일 절벽에서 야자 열매를 바다로 던져 해류의 흐름을 연구한다. 머리는 이미 백발이 되고 이도 몽땅 빠진 몰골에 발은 고문 끝에 뼈를 다쳐 절룩거리는 빠삐용은 드디어 결행의 날, 수십미터의 절벽에서 야자 열매를 담은 푸대와 함께 바다로 뛰어내린다. 빠삐용은 멀리 수평선으로 차차 멀어져 가고, 단 하나의 동료였던 드가는 이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쓸쓸히 발길을 돌린다.’

 

영화에서는 드가가 그 악마도에서 깜둥돼지들과 닭들을 치는 걸로 나온다. 주인공 빠삐용은 뒤늦게 그곳에 당도하여, 드가를 만나게 된다. 드가는 닭 모이가 든 바가지를 들고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물론, 드가는 그 깨어진 안경을 여전히 끼고 있었다. “이게 누구야?” 하며 빠삐용을 반갑게 맞이하던 드가. 그 안경은 퍽이나 인상적이다. 빠삐용은 끊임없이 자유를 갈구하며 그곳을 뜨자고 했으나, 드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 자유란 게 다 늙어빠진 마당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듯. 드가는 그곳에서 눌러 살기를 원한다. 내가 느끼기에는, 그것이 위키백과의 소개와 달리, ‘체념같지가 않다. 조각조각 깨어진 안경알을 접합하여 그런대로 초점을 맞춘 채 사물을 바라보던. 그것은 일종의 적응이다. 그 곳의 삶 자체도 그런대로 의미롭다는 것으로 비쳐진다. 아니, 그냥 하루하루 알뜰살뜰 살아가겠다는 의지로 여겨진다. 제법 적막하지만, 가축과 벗하며 적적함을 달래던 드가. 꼭히 인간들과 살을 부비며 아웅다웅 살아가는 것만이 삶은 아니지 않은가. 그 안경알이 웅변 이상으로 이러한 사실을 나한테 전해준다.

사실 뭐라고 속 시원히 설명할 수는 없으되, 지금의 나도 자의반타의반 드가와 같은 유폐(幽閉)’를 겪고 있다. 그는 가축을 치고 채소를 가꾸고 화초도 심고 있었다. 나는 가축 사육을 제외하고는 그와 똑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도 내가 드가보다 나은 점이 있기는 하다. 나는 멀쩡한 돋보기안경을 지니고 있으니까. , 그러고 보니 또 하나 더 있다. 성모님의 석고상을 모시고 왔다는 거.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어느새 성에 끼고 물기로 얼룩진 나의 안경알. ‘호호입김을 불어 안경타월로 정성스레 닦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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