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문예사조를 달리 생각함

윤근택 2015. 9. 11. 21:46

 

 

                        문예사조(文藝思潮)를 달리 생각함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본격적으로 수필계에 입문하여 수필작가로 행세해온(?) 지 어언 26년째. 나는 그 동안 꽤나 많은 수필작품을 적어왔다. 종이책 두 권의 수필집에 수록된 글을 포함해서 1,000여 편은 족히 될 수필작품과 문장이론들. 내 꿈은, 현존하는 대한민국 수필작가들 가운데서 최다작(最多作)의 작가로 역사가 기록하기를 바라는 것인데 ... . 이 즈음에서 과연 수필작가 윤근택만의 독특한 문학세계가 있었던가 고민도 하게 된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문예사조를 문득 생각하게 된다. 문예사조란, 그때까지 지배했던,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대세(大勢)였던 예술의 경향(傾向)을 과감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 새로운 경향의 예술세계를 여는 데서 비롯되었다. 우리네는, “그는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열었다.”등의 말을 즐겨 쓴다. 무슨 큰 자랑이나 되는 것처럼 나는 편편의 글 가운데서 종종 고백한 게 있다. 이날 이때까지 끝까지 읽은 책은 달랑 한 권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뿐인데, 그것도 성인이 된 이후에 읽었노라고. 역설적으로, 나는 남의 글을 전혀 흉내내지 않으려 애써왔고, 따로 글짓기 스승을 두어 그 그늘에서 배운 적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한 일이 과연 온당한가 이 즈음 크게 고민하게 된다. 공자님의 말씀과 순자님의 말씀에 비춰보더라도 크게 고민할밖에. 두 성현(聖賢)께서는 각각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자님의 말씀이다. 후생가외(後生可畏)에 관한 사항이다.

      젊은 후진을 두려워해야 한다. 앞으로 올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만약 그들의 나이가 사오십이 되어도 이름이 들리지 않으면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논어(論語) 子罕(자한)에서.

       공자님 당신이 말씀하신 후생가외, 재주와 덕을 갖추고 학문이 뛰어난 제자 안회(顔回)’를 두고 이른 말씀이라고 전해진다.

       이 고사성어에 필적(匹敵)하는 우리 속담도 있긴 하다. 바로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 가 그것이다. 나는 어린 날 똑똑히 보았다. 우리 집 황소가 남의 집 황소와 싸움질을 하다가 뿔을 부러뜨리거나 아예 뿌리째 뿔이 뽑힌 일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녀석의 뿔의 뿌리(?)를 정성껏 치료해주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날수록 새 뿔이 우뚝하게 자라났다. 우리의 여린 젖니가 빠지고 간니가 돋아날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가늘던 턱수염을 거듭거듭 면도기로 깎다가 보니, 차츰 굵어져 이제는 아예 구둣솔처럼 된 것도 마찬가지 이치다.

      나는, 작가인 나는 공자님이 이르신 위 말씀 가운데서 뒷문장 곧, ‘하지만 만약 그들의 나이가 사오십이 되어도 이름이 들리지 않으면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를 새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작가인 입장에서 그 말씀은 이렇게 들리는 까닭이다. ‘나이가 사오십이 되어도 자기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열지 못한 채, 여전히 자기 글짓기 스승 등의 아류(亞流)로 머물러 있다면 그는 작가로서는 글렀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후생가외에 관해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도 있다. 제자가, 후배가, 후진이 자기의 수준을 능가한 것을 결코 배 아파하거나 해서는 아니 된다는 점. 그것이 진정한 배움의 자세이자 동반성장의 원동력이다. 그러함에도 실상은 그러하지 않다. 그 누구라고 실명(實名)을 밝히기는 곤란하지만, 나한테는 고약하기 그지없는 선배 수필가가 한 분 계신다. 그분은 숫제 밴댕이 속 같아서, 당신의 수필작품 가운데 문장이 뒤꼬이는 등 눈가는 부분이 하도 많아 낱낱이 지적하여 되부쳐 드렸건만,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20여 년째 나를 원수처럼 여기고 있다. 사실 그분이 원해서 그러한 작업(?) 힘들여 해드렸건만... . 그렇더라도 그 일을 계기로 삼아 그분이 심기일전해서 그 이후부터 제대로 된 작품 한 편이라도 세상에 선보인다면 좋겠는데, 안타깝게시리 막상 그러하지도 못하다. 그러한 분이 함량미달의 많은 수필가를 마치 번철에 기름만 슬쩍 바르고 붕어빵 찍어내듯 양산(量産)하고 있으니...

       순자님의 말씀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에 관한 사항이다.

       군자는 말한다. 학문이란 중지할 수 없는 것이다. 푸른색은 쪽[;쪽풀]에서 취한 것이지만 쪽보다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차다. 나무가 곧은 것은 먹줄에 부합하기 때문이지만, 구부려 바퀴로 만들면 구부러진 형태가 곡척(曲尺)에 부합한다. 비록 볕에 말리더라도 다시 펴지지 않는 까닭은 구부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게 되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군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거듭 스스로를 반성하여야 슬기는 밝아지고 행실은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줄을 알지 못하고, 깊은 골짜기에 가 보지 않으면 땅이 두터운 줄을 알지 못하는 법이다. 선비는 선왕의 가르침을 공부하지 않으면 학문의 위대함을 알 수 없는 것이다(君子曰, 學不可以已. 靑取之於藍, 而靑於藍. 冰水爲之, 而寒於水. 木直中繩, 輮以爲輪, 其曲中規, 雖有槁暴, 不復挺者, 輮使之然也. 故木受繩則直, 金就礪則利. 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 則智明而行無過矣. 故不登高山, 不知天之高也. 不臨深谿, 不知地之厚也. 不聞先王之遺言, 不知學問之大也.).”

 

      이 글은荀子(순자) 勸學(권학)〉》에 나오는데, ‘푸른색은 쪽에서 취한 것이지만 쪽보다 푸르다.’는 말에서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 나왔고, 이것이 다시 청출어람이 되었다.

      여담이다. ‘靑出於藍 靑於藍에 각각 나오는 어조사 에 관해서는 내가 첫해 도전했던 어느 국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시험에도 나왔던 적이 있다. ‘靑出於藍에 쓰인 ‘~로부터를 나타내는 시발격조사(始發格助詞)이고, ‘靑於藍에 쓰인 ‘~보다를 나타내는 비교적조사(比較格助詞)라는 사실. 물론 입학시험에 낙방하기는 했지만, 그 문제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국어과목 시험문제는 비교적 깔끔하게 풀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위 순자님의 글 하나만을 통해서라도 순자님의 사상적, 학문적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 비유가 얼마나 내 가슴을 꿰찌르는지!

      청출어람에 관한 본보기도 있다.

      북위(北魏)의 이밀(李謐)은 어려서 공번(孔燔)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에 정진했다. 몇 년이 지나자 이밀의 학문이 스승을 능가하게 되었다. 그러자 공번은 이밀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도리어 그를 스승으로 삼기를 청했다. 그러자 동문들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푸른색은 쪽에서 만들어졌지만 쪽이 푸른색보다 못하다네. 어디 불변 고정의 스승이 있다던가. 경전을 밝게 아는 데 있는 것이지(靑成藍, 藍謝靑, 師何常, 在明經).’

       이 이야기는 北史(북사) 李謐傳(이밀전)에 나오는데, 이는 배우는 데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는 뜻의 학무상사(學無常師)’라는 성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자님 제자의 말씀이다. ‘학무상사(學無常師)’가 그것이다.

      <()나라 공손조(公孫朝)가 자공(子貢)에게 물었다.

       중니(仲尼, 공자(孔子)는 어디에서 배웠소?”

       이에 자공이 대답했다.

       ()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도는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남아 있소. 현능한 사람은 그 근본을 이해하고, 현능하지 않은 사람은 그 지엽(枝葉)만을 이해할 뿐이오. 문왕과 무왕의 도가 없는 곳이 없으니 우리 선생님께서 어디선들 배우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어찌 고정된 스승이 있겠소(衛公孫朝問於子貢曰, 仲尼焉學. 子貢曰,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 論語 子張에 나오는 글이다.

       학무상사는 자공의 말, “어찌 고정된 스승이 있겠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요컨대, 공자님은 뿔이나 풀이나 이빨 따위가 새롭게 돋아나는 걸 비유해서 후생가외를 말씀하신 듯하고, 순자님은 쪽풀로 옷감 염색을 하는 걸 비유해서 청출어람을 말씀하신 듯하다. 그리고 공자님의 제자 자공은 자기 스승이 어느 한 군데 매이지 않고 두루 배우려 들었던 점을 학무상사로 표현한 듯하다.

      문예사조란, 그 동안 최고의 가치로 여겨왔던 곧 대세를 이루던 조류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탄생하곤 하였다. 후생가외가 되었든, 청출어람이 되었든 간에 자기 스승을 능가하는 이만이 예술가로 온전히 살아남는다는 거. 거기에 더해 모든 사람을, 모든 사물을 스승으로 삼는, 이른바 학무상사의 자세까지 갖춘다면 그는 아마도 그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지 않을까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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