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5)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5)
-‘보칼리제(vocalise)’와 ‘스캣(scat)’-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여담이다. 어린 날 내 어머니는 해마다 목화를 재배했다. 당신은 그것으로 무명 솜을 만든 후 물레로 실을 자아내곤 하였다. 한편, 누이들은 누에 고치를 냄비에다 넣고 쏼쏼 삶으며 고치에서 비단실을 뽑아내곤 하였다. 그분들이 자아내는 실은 끝이 없었다. 지금의 나야말로 그러하다. 내가 새로 시작한 연작 수필,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는 언제 끝날지 감히 장담을 할 수가 없다.
1.보칼리레(vocalize)
사전적 의미는 몇 가지가 된다. (자음을) 모음화 하다, 모음으로 노래하다, 모음으로 발성연습을 하다, 가사 없이 모음만으로 이루어진 성악연습곡을 말한다 등. 프랑스어로 표기하면 ‘vocaliser’가 된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러한 정의를 통해서도 음악에서 ‘보칼리제’가 어떤 장르를 일컫는지 금세 아실 것이다.
이 보칼리제를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작곡가가 있다. 그가 바로 라흐마니노프(Rachmanimov, 1873~1943)다. 1912년 그는 ‘작품번호 34의 제14번째 곡’을 적게 된다. 그의 13개 가곡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그 작품을 그냥 쉽게 ‘라흐마니포프의 보칼리제’라고도 부른다. 그는 그 곡을 당시 유명했던 자기 조국 러시아의 소프라노 가수인, ‘안토니나 네츠다노바’에게 헌정코자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6년 그 곡은 모스크바에서 초연(初演)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 곡은 여러 형태의 기악곡 등으로 변주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여성에게 헌정하기 위해 그러한 곡을 적은 셈이다.
보칼리제를 이야기하자면 진짜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과 사건(?)이 있다. 바로 ‘카치니(Giulio Caccini, 이탈리아, 1545~1618)’와 ‘이네사 갈란테(Inessa Galante, 구소련 라트비아, 1954~)’와 ‘아베 마리아(Ave Maria)’다. 1995년 이네사 갈란테는 자신의 데뷔 앨범, ‘데뷔(Debut)’에다 ‘아베 마리아’를 실어 발표한다. 그 노랫말 전체에는 ‘아베 마리아’와 ‘아멘’ 두 단어밖에 없는 성악. 사실 그녀는 세상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소프라노 가수였다. 그녀가 ‘아베 마리아’를 발표하자 숫제 세상을 뒤흔들었다. ‘천상의 소프라노’라는 찬사를 받게 되었으며, 그녀의 출세작이 되었다. 심지어 ‘카치니 신드롬’이 일었을 정도다. 그 곡 또한 세상에 500여 년 동안 알려지지 않은 카치니의 곡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사가(好事家)들은 갈란테가 부르는 ‘아베 마리아’의 작곡자 진위(眞僞)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현재까지는 대체로 러시아 음악가 ‘블라디미르 바빌로프’가 1970년에 개작(改作)한 것으로 보는 쪽으로 기울여져 있다. 그는 1925년 작곡가 미상의 악보를 보게 되었고, 그 악보를 기초로 ‘아베 마리아’를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그 곡을 ‘카치니의 아메 마리아’로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어쨌든, 그 곡은 아주 특별한 보칼리제다. 그녀를 일약 스타덤에 올렸을 뿐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숨어(?) 지냈던 카치니까지 세상 밖으로 불러내었다. 사실 슈베르트와 ‘구노’도 제각각 ‘아베마리아’를 작곡하였지만,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는 그 작품들과 사뭇 다르다. 그들 곡에 면면히 흐르는 사랑, 경건, 포근함에다 애절함까지 더한 것이 특징이다. 사실 나는 이네사 갈란테가 부르는 그 곡을 밤새껏 거듭거듭 틀어놓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 아니다. 또,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소프라노 아무개씨도 그 곡을 부른 적 있지만, 죄송하지만 갈란테한테는 새 발의 피였다. 한마디로’ ‘아베 마리아’는 갈란테의 대명사다. 위에서도 밝혔지만, 가사가 ‘아베 마리아’와 ‘아멘’ 둘뿐인 관계로, 나도 애절하게 그 노래를 따라부를 수 있을 지경이다.
라흐마니노프, 카치니 외에도 보칼리제를 작곡한 이가 있다. 브라질 작곡가 ‘빌라 로보스(Villa Lobos)’다. 그의 보칼리제는 ‘브라질풍의 바흐 제 5곡’ 가운데 ‘Air Cantilena’다.
2. 스캣(scat)
초기에는 재즈에서 주로 쓰였던 창법(唱法)이다. 가사 대신 ‘다다다다다’ 등 허밍(humming)으로 대체하는 창법을 일컫는다. 사실 요즘은 하나의 음악 장르로 자리잡아, 많은 뮤지션이 속출하여 저마다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들려드리기로 하자. 그런데 그 기원이 너무도 흥미롭다.1926년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ong,1901~1971)은 ‘Heebie Jeebies’를 취입하던 중 악보를 그만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다. 그는 임기응변으로, 놓친 부분을 즉흥적으로 ‘다다다다다’하며 부르게 된다. 그것이 스캣의 효시란다. 1940년대가 되어 ‘Bop’이 유행하게 되면서, ‘엘라 피체럴드’ 등이 그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널리 보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의 스캣을 특히 ‘Bop- singing’이라고 한단다. ‘Bop’이란, 모던 재즈로서 율동적이고 복잡한 화음으로 구성된 음악 장르라고 한다.
그렇게 출발한 스캣. 내가 알기에, 아무래도 스캣을 꽃 피운 이는 생프뤼(Saint Preux, 프랑스 작곡가, 1945~)인 듯싶다. 아니, 다니엘 리까리(Daniell Licari, 샹송가수, 1943~)라고 믿고 싶다. 1970년대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다니엘 리까리 음반을 사게 되었다. 나는 레코드 가게 그 점원 아가씨한테 위임한 예가 많았다.
“아저씨, 이번엔 ‘다니엘 리까리’가 좋겠는데요.”
바로 ‘목소리를 위한 협주곡(Concerto pour deux voix)’이 그것이었다. 사실 나의 독자님들께서도 그가 꾀꼬리 같은 음성으로 부른 그 노래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 곡은 다니엘 리까리의 대표작인 동시에 작곡가 ‘생프뤼’를 세계적 인물로 만들었다. 물론, 이 곡도 여러 버전이 있으며 여러 뮤지션이 발표도 하였지만, 다들 다니엘 리까리를 능가하지는 못한 듯한데, 독자님들의 생각은? 1969년 다니엘 리까리는 그 ‘천상의 목소리’로 자신의 앨범을 무려 15백만장 팔게 했을뿐더러 생프뤼마저 스타로 만든 셈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의 예에 속하는 것은 틀림없다.
스캣과 관련해서, 무대이름 ‘스캣맨(Scat-man)’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존 폴 라킨(John Paul Larkin, 1942~1999)이다. 그는 선천적인 말더듬이였다. ‘아에이오우’ 모음을 통한 발성연습을 통해 언어치료를 할 요량이었다. 그러했던 그가 ‘Scatman’s World’란 앨범을 내어놓자, 폭발적인 인기를 거두게 된다. 스캣송으로 언어치료만이 아닌 스타가 된 사례다.
그 이후 스캣송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는 뮤지션이 속속 나타났다. 아일랜드가 자랑하는 미녀가수 엔야(Enya,1961~),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여자 가수 ‘안네 바디(Anne Vada, 1965~) 등이 그들이다. 나는 이들의 음악도 음악이지만, 그 미모에 반하기도 한다.
자, 이제 엄연한 수필작가로 다시 돌아왔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편한 대로 물 끌어다 대기를 좋아한다. 바로 아전인수(我田引水)가 그것이다. 사실 나도 한 때 그 ‘뒷받침문장 없음’을 두고 힐난한 적도 있지만, 피천득 선생의 수필로 알려진 ‘수필’은 정작 수필이 아닌 다른 장르에 속한다. 심지어 그분 수제자이며 서울대학교 교수이기도 한 어떤 분도 사제지간의 회고담을 기초로 그렇게 실토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네 수필가들 가운데 몇몇은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가 소설이 아닌 수필이라고 주장한 적 있다. 또,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마저도 소설이 아닌 수필이라고 주장한 이도 있다. 아쉽게도, 나는 그분들의 주장논리를 잊어버렸을 따름이다. 그 구성방식이 그러하다는 것인지, 문체가 그러하다는 것인지, 내용이 그러하다는 것인지 등에 관해서 기억을 잘 못하겠다. 내가 왜 느닷없이 이런 이야기까지 꺼낼까? 우리는 곧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곤 한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수록 그 예술작품은 더욱 빛난다고 말하고 싶다. 또, 임자를 제대로 만나야 예술작품은 빛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위 사례들을 통해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여태 제대로 된 연주자를(?) 만나지 못한 것 같다. 나의 수필집에 실린 ‘해질녘’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어느 영화감독이 나타나 그 글을 토대로 영화 한 편을 찍고 싶다고 하기를 바랐다. 교만을 부린다고 할는지 몰라도, 그러한 글이야말로 장르의 경계까지 허문 글이었다. 과대망상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줄기차게 빚어대는 글들 가운데 어느 글을 소설로, 시로, 희곡으로 변주하는 이가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 그 무엇보다, 어느 분야든 창시자(創始者)만이 역사에 기록된다는 걸 이번 글을 쓰면서 새삼 깨달았다. 즉, 1등이 아닌 2등은 아무짝에도 쓸 수 없다는 걸.
(다음 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