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근택 2015. 12. 30. 21:16

 

 

 

                                    문장수련(72)

 

        

                                                                                   윤요셉(수필가/문장치료사)

 

    이번 호에는 재미교포이자, 수필작가이자, 칠순의 연세인 분의 글을 텍스트로 삼는다.

    우선, 그분 글을 함께 읽어보기로 하자.

 

                                                 엄마의 믿음 앞에서

                                         

                                                                                                                     이00

   둘째 여동생으로부터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다그치는 목소리다. 엄마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말씀드렸더니(말씀드렸더니,) 며칠째 식사도 아니 하시고 누워만 계신단다. “오빠가 불교를 그냥 믿어도 된다고 했다.”막무가내고 있으니,(막무가내이시니,) 오빠가 엄마에게 말 좀 해 달란다.

   어머니는 불교를 믿는 막내 남동생 집에서 십여 년을 함께 사셨다.(살았다. * 일반인들한테, 독자들한테 존칭 사용 문제!) 남동생이 명퇴(名退)를 당하고, 그 후 시작한 몇 가지 일에 실패하면서 제수씨가(오빠가제부는애비야,’아범아.’ 관련해서 글쓴이의 정체성은? 즉 남성? 혹은 여성?)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동네에서 효부로 이름이 나서 효부상까지 받은 제수씨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폭탄선언을 하게 되었다.

 “더는 어머니를 모실 수 없으니(없으니,) 원주를 떠나서 서울 딸네 집으로 올라가세요!”

   그 후, 서울에 사는 둘째 여동생이 어머니를 모셨다. 제부는 교회 장로이고 동생은 권사로서, 성경 공부 반을(공부반을) 인도하며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있었다. 당신은 언제부터 불경을 읽기 시작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글로 된 반야심경과 금강경은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했다. 새벽이면 몸 단정하시고( 단장하시고몸을 단정히 하시고)매일 묵상을(불경을 외우셨단다. * 불교의식에 관한 용어 찾아보시길... .)했단다. 싫어하는 눈치를 피하여, 기도와 암송은 아파트를 돌면서 하셨다. “어쩌다, 구역예배나 다른 모임으로 교인들이 집에 오면 어떻게 해요?” 하고 전화로 물으면, “밖으로 돌면서 눈치껏 조심조심한다. 애비야, 걱정 마라.”고 하셨다. 그것이 조심한다고 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었으리라 짐작하고도 남는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동생의 어려운 하소연을 들어야 했고, 어머니의 불편한 심사를 위로해 주어야 했다. 이제 구십을 바라보며, 누가 절에 모시고 가는 것도 아니고, TV나 인터넷으로 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도 아니다. 원주에 계실 때 조그만 절에 갔다가 스님이 주신 경전. 한글로 토만 달아 놓은 책이다. 뜻이나 아시는지 읽고 또 읽어서 웬만한 구절은 암송까지 하셨다.

돌이켜 보면, 39살의 젊디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 당신의 남편을 원망하며, 셋방살이에 물려받은 재산 하나 없이, 각박하던 그 시절에 채소 장사, 보따리 장사, 문전 장사 등등 온갖 궂은일을 하며, 우리 오 남매를 키워오셨다. 18살에 시집오셔서 시어머니 따라 한번 절에 가서 불공드린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 그 후에도 별다른 불도(佛徒) 생활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기억된다.)‘끼니는 걸러도 제사는 정성껏 지내야 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불교를 잘 믿는 것으로 아시며 살아오신 분이다. 구십 평생에 손가락으로 세일(* 자동형과 수동형에 관한 문제임.) 정도로 밖에( 정도밖에)절에 가보지 못하고, 공양도 제대로 한 적 없이 어려운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그런데도, 금강경을 읽고, 반야심경을 암송(暗誦)(암송 * 오히려 위 암송은암송((暗誦)로 고쳐야 할 것임.)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있는 듯 했다.

그러기에, “이제 그만, 나랑같이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 할 수가 없었다. 예수를 믿으면, 조상이나 불교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혹여, 본인에게나 자식들에게 크나큰 재앙이나 내리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이런 미신적 불안감으로 괴로워하실 것이 염려되어, “좋아하시면 그냥 계속 믿으세요.”라고 한마디 한 말이 그동안 크게 힘이 되었던 모양이다.

   이렇듯, 종교적 믿음은 이성과 감성을 초월하는가? 오직 자식을 위하여 살아왔다고 하면서, 곁에서 십수 년(십 수 년) 수발을 들어오는 딸의 간절한 소망 하나 들어주지 못하는 엄마. 부처님을 믿는다고 투덜대며 진정한 마음으로 엄마를 대하지 못하는 듯한 동생. 이념, 신념, 종교를 향한 인간의 꿈은 현실 속의 자신을 상실하게 하는가. ‘부처님을 믿는 옆집 노인을 전도하여 기독교로 전향시켰다면, 아마도, 지금 자신의 엄마를 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정성껏 그분을 모실 것 아니냐!’라고 혼자 투덜거려도 본다. 가족을 떠나 미국에서 40년을 살아온 내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

이렇듯, 서로의 관계가 불편스러워지면서 양로원을 권해 보았다. “자식이 다섯이나 되는데(되는데,) 내가 왜 따로 나가 살아야 하니? 내가 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 하며 눈물이 글썽거리곤 (눈물을 글썽거리곤)했단다. 지난번 내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간신히 당신을 설득하여 동생 집 부근에 따로 방을 마련해 드렸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서운해하는 듯하시더니, 얼마 후에는 신방을 차린 것처럼 좋아하셨다. “아범아. (아범아, * 가벼운 부름 다음에는 쉼표를 친다.)내 생전에 이렇게 편안하기는 처음이다!” 하는 전화 목소리에 구속됨이 없는 자유로움의 환희가 전해졌다.

   동생의 부탁을 이모저모 생각하다가, 편지를 쓰기로 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그냥, “내가 예수 믿겠다.” 하고 함께 교회에 나가면, 이번에도, 좋은 일이 생긴다고 시작했다. 동생에게 대접받으며 마음 편히 지내실 수 있다고. 자신의 신변을 남에게 의지하게 되면, 그 사람의 처지를 따르는 것이 편하다고……. 편지로 조목조목 적어 보냈다. 회개, 구원, 천당 등에 관한 설득은 없이, 아주 인간적인 말로, ‘하면 이롭고, 하지 않으면 해로운 점들을 나열하며, 당근과 채찍을 흔들어 회유하고 위협하는 글들로 채워졌다. 이 편지를 읽으시면 내 말을 들으실 것이라고 오만스럽게 자신했다. 동생들은 중학교도 마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어머니의 힘겨운 생활력으로 그나마 굶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중학교 때부터, 장학금으로 아르바이트로 어머니의 재정적 도움을 벗어나서 홀로 해결하며 살아왔기에, 나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편지를 부친 후, 며칠을 기다려 동생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오빠 편지는 뜯어보지 않겠다.”고 했단다. 슬며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온밤을 지새우며 간절히 쓴 사랑의 편지를 뜯지도 않고 돌려보내야 하는 사람. 읽지도 않고 그것을 차곡차곡 간직하며 눈물 적시는 사람. 이러한 이별의 장면들이 오버 랩 되었다.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괴로움을 덜기 위함인가? 아니면 자신을 더욱 고문하는 것인가? 읽어 보기만 하면 마음을 바꿀 수 있을 텐데. 아니, 읽어보고도 마음을 바꿀 수 없는 그 절박함 때문이리라 싶기도 하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다. 오랜 세월 불경을 읽으며 그렇게 지내 온 것이 편안하기만 하고, 새로운 것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귀찮고 어렵게 느껴져서, 개종하지 못하는 줄로만 생각했다.

   어쩌면, 시장 안 노점 판에서 땅거미가 질 때까지, 마지막 남은 고추 몇 개, 시들어가는 배추 한 포기마저 팔고 저린 다리를 끌고 비틀거리며 일어설 .(,) 속초 부둣가에서 눈보라 속에, 얼은 손으로 마지막 남은 명태 속을 손질하고 몇 푼 품삯을 받을 .(,) 오직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간절한 소원을 부처님께 빌며 살아오셨으리라. 믿음을 위한 순교자의 삶보다도 더 혹독한 삶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 믿음을 마지막 끈으로 붙들며 살아왔는지 모른다. 오 남매를 굶기지 않으려고 맨손으로 살아오신 그 처절함 속에는, 생명만큼이나 소중하게 지켜 온 나름대로 믿음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좋은 옷 깨끗하게 입고 그럴듯하게 헌금하며 추앙받는, 거창한 믿음 생활은 상황에 따라 쉽게 버릴 수도 있겠지만, 절망과 고통의 고비를 넘기며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린 처절한 조각들이 모인 믿음은 저버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앞뒤 잘라 버리고 지금 형편으로만 가볍게 판단하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리라. 무엇을 믿느냐보다는 어떻게 믿느냐가 그 사람의 삶을 이루어가는 가(이루어지는가) 보다. 나를 되돌아본다. 머리로 생각하는 종교가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믿음이 절실한 자신을.

  2주 동안이나 일부러 전화하지 않은 자신이 부끄럽다. 자식은 이만하면이라는 잣대로 부모를 공경한다. 하지만 부모는 그렇지만하는 잣대로 자식을 사랑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반기는 엄마의 전화 목소리에 분별없었던 자신이 쑥스러워, “I love you”로 피식 웃고 말았다. .

 

문장치료사인 윤쌤의 지적)

1. 문장은 꼬임이 없다.

2. ‘모든 국민은 신앙의 자유가 있다.’는 사실. 가족 구성원간에도 이는 행해져야 한다고 보는데, 노모한테 막무가내 본인들의 종교로 개종하기를 강요한 듯하여 씁쓰레하다. 이 윤쌤은 종교적 편협함이 없는데... . 이 글 참고하시기 바람. 클릭하시면 글 열려요. 2013.02.04

참고적으로, 이 윤쌤이 믿는 종교는 가톨릭(Catholic)인데, ‘Catholic’‘catholic’으로 쓰면, ‘(인류)보편적인이란 형용사라는 거. 하오니, 친정 모친의 신앙은 설령 미신일지라도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글쓴이는 뒤늦게야 친정모친의 신앙에 관해 이해하였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청상(靑孀)의 몸으로 슬하의 자녀 다섯을 길러내셨으며, 그 인고(忍苦)의 세월 동안 부처님께 치성을 드림으로써 버틸 수 있었을 거라고 헤아려 본 글쓴이의 모습 엿보인다.

3. 다만, 이야기를 더욱 간추리고 압축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도록 했으면 좋겠다.

4. 세부사항은 본문 사이사이에 표 처리하여 두었다.

5. 건필(健筆)을 바라마지 않는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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