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음악 이야기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8)

윤근택 2014. 4. 15. 08:40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8)                     

                  - 애국 대서사시를 적은 작곡가들-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내가 알고 지내는 두 작곡가는 각각 자신의 조국에 대한 사랑을 교향시(交響詩;symphonic poem)라는 형식으로 작곡하였다. 그들 양인(兩人)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이야기를 펼쳐가기로 한다. 우선, 교향시 가 어떤 것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나. 표제음악(標題音樂)의 일종으로 시,전설과 같은 문학적 내용이나 풍경 따위의 회화적 내용을 관현악으로 표현한, 자유로운 형식의 악곡을 일컬으며, 대체적으로  하나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정의한다. 낭만파 작곡가 리스트가 창시자라고 한다. 무슨 내용인지 알 것 같은데, 여기서 말하는 표제음악은 또 무얼 말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표제음악이란, 어떤 뜻을 나타내거나 어떤 사물을 묘사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으로, 곡의 내용을 암시하는 표제가 붙은 음악을 일컫는다. 고 되어 있다. 19세기 낭만파 음악가 베를리오즈 등에 의해 발달했다고 한다. 이 표제음악은 절대음악(絶對音樂)에 대응되는 음악장르다. 절대음악은, 음악 이외 다른 예술과 직접 관계를 맺지 않고 순수한 음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음악을 말한다.

 , 이쯤 해두고 그들 양인을 차례로 소개하기로 하자.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핀란드,1865~1957). 그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이미 적어 인터넷 매체에 발표한 수필, 시벨리우스씨 벌목장에서의 일부를 자기표절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가 있겠다.

'(상략)나는 지금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하여 라트비아,에스토니아를 경유하여 핀란드로 온데다가 노르웨이가 아닌, 이곳 핀란드가 삼림강국이니까요. 아무튼, 당신을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요. 본디 내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란 거 당신 잘 아시잖아요. 그건 그렇고요. 대체 이곳이 어디며 무엇 하러 왔는지 궁금할 거에요. 이곳은요, 핀란드 북부에 자리한이나리 호수(Lake Inari)’ 근방이에요. 당신께서는, 지난 날 지리과목을 잘 익힌 당신께서는, 이 나라 핀란드에는 3,000여 크고 작은 빙하호(氷河湖)가 있다는 것을 잘 아실 거에요. 게다가 전국토의 7할 이상이 침엽수 원시림이라는 것도 잘 아실 거에요. 당신께서는,임학도(林學徒)였던 내가 늘 가서 살고프다고 노래하던 나라가 바로 이 나라였다는 것도 아실 거에요. 해서, 때늦은 이 나이에 이곳 벌목장에 온 거에요. 좀 더 젊은 나이에 이곳으로 이주(移住)해서 정착했더라면… . 아마 당신께서는 이 맘 충분히 이해하실 거에요.
 
사랑하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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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풍부한 이들의 삼림자원이 부러워서에요.이미 위에서 이야기하였지만요, 국토의 7할대가 원시림인데다가 경제수종(經濟樹種)인 소나무와 전나무가 대부분이에요. 이들의 총수출액 50% 이상이 임업생산물이라는 거 부럽지 않으세요? 판지(板紙)며 제재목이며 펄프며 온갖 가공품이 저발트해의 여러 항구를 통해 세계 각국으로 팔려나간대요. 내 고국도 국토의 7할 이상이 산이기는 하지만,’삼림(森林)’이 아닌산림(山林)’에 지나지 않잖아요.게다가,고국엔 농업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어서… . 사실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했는데 말이에요. 아무튼, 이곳 핀란드는요,임목(林木)에서 절반 이상의 이들복지(福祉)’가 나온다고 봐야 해요. 온 세계가 부러워하는 그복지천국이 임업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에요. 그러니 내 살아생전 이 나라에 한번은 와 봐야 하지 않겠어요
?
 
사랑하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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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단지 풍부한 임산자원을 보러 온 것만은 아닙니다. 이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나름대로 고난의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니, 그러한 역사를 지녔음에도 슬기롭게 극복하고 복지천국으로 만들었다는 점 때문이지요. 당신께서도 지도책을 펴보시면 알겠지만, 이 나라는 러시아와 스웨덴에 꼽사리 끼어 있어요. 그러다 보니, 스웨덴으로부터 통치를 당한 적도 있고, 러시아로부터 압제를 당한 적도 있어요. 강대국 러시아한테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려고 두 차례나 싸운 적도 있대요. 그로 인해 자원의 1할대를 잃고, 40만여 명이 집과 토지를 잃었대요. 자연, 과부(寡婦)와 고아가 많이 생겨났겠죠? 이것이 바로 복지천국을 이끌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니,놀랍지 않으세요? 이들은 이미 1937년에국민연금법’, ‘모성급여법’, ‘근로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제정하였대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이들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무상교육인데다가 전국민을 대상으로 무료의료까지 한대요. 그 많은 세금부담에도 불평하는 이가 없대요. 이 지구상에서 가장 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라고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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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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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일들이 이곳 사람들의 국민성만으로만 된 게 아니라는 점에 나는 더 놀라워 해요. 이들한테는 정말 훌륭한 리더가 있었대요. 내가 그 많은 벌목장을 두고서도, 하필이면 이 댁 시벨리우스씨 벌목장으로 온 이유를 이젠 눈치챘을 거에요. 이 댁 문패에 ‘Jean Sibelius’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지요. 내가 평소 알고 지냈던 그시벨리우스와 동명이인이라는 사실. 내가 아는 그는 작곡가에요.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이들 민족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었어요. 1899년 그는 핍박 아래 있는 국민을 생각해서핀란디아(Finlandia)’를 적었어요. 민족적 색채가 짙은 애국찬가에요. 대서사시에요. 그는 민족혼을 그렇게 일깨웠어요.그리고 그는 내가 태어나던 해 1957년에 작고했대요. 하기야 내 고국의 안익태도코리아 환상곡애국가를 적긴 했지만, 그의 행적은… . 당신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이들 지도자 가운데는만네르 하임도 있었어요. 그는 구소련과 전쟁시 최고사령관이었어요. 또 한 분의 위인이 이들한테는 있었어요. 바로뢴토트라는 이에요. 그는 1935년 민족주의 정신의 구심(求心)이 되는 <<칼레발라(Calevala)>>를 복원, 편집했어요. 50편의 시가(詩歌), 22,795행의 민족서사시를 이르는 말이에요. <<칼레발라>>영웅의 나라란 뜻이래요. 이들은 지리한 흑야(黑夜)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축제를 열게 되는데, 그때도 꼭 이 <<칼레발라>>를 노래한대요. 지리한 백야(白夜)의 여름이 끝날 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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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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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위에서 이야기했지만, 3,000여 개의 크고 작은 호소(湖沼)가 있는 등 이곳 나라가 아름답긴 해요. 이들 스스로는 이를 자랑하여수오미(Suomi ; 호수의 나라)’라고도 해요. 하지만, 사실은 내 고국보다 좋은 환경이 아닌 듯해요. 북위 60~70도에 위치해 있어, 여름에는 백야,겨울에는 흑야에요. 여름엔 밤 11시가 되어야 해가 진다는군요. 이 겨울날씨가, 두고 온 그곳 고국보다 더 추운 걸요. 그러한 까닭에, 도시는 저 아랫녘 발트해 연안에만 밀집해 있대요. 해안은 내륙보다 따뜻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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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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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댁 주인 시벨리우스씨가 나더러이나리 호수로 얼음낚시나 가재요. 그곳에는 연어가 참으로 많대요. 연어구이 맛이 일품이라는군요. 나는 사양합니다. 대신, 그와 동명이인인 작곡가 시벨리우스의핀란디아나 한번 틀어달라고 부탁합니다. 내 고국의 애국가와는 사뭇 달라요. 안개속에 잠긴 신비로운 호수와 깊은 숲의 정경이 눈앞에 선해요. 그런가 하면 포효하는 애국의 열정이 가득해요. 사실 이런 이야기하면 애국가모독죄(이런 것도 있긴 있나요?)에 저촉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 눔의 애국가가 그게 뭐에요? 장송곡도 아니고. 나는 군대생활 하는 동안에도, 새벽에 일어나서 국기게양식을 할 적마다 어쩔 수 없이 부르곤 했어요. 그저 음울할 따름이었어요. 맥이 하나도 없는… . 차라리 이선희의우리는 이 땅 위에 우리는 태어났고…’가 경쾌하고 생명력 넘치더라고요. 정말로 그 노래야말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노래였단 말이에요. 더욱이, 이제 고국마저다문화 사회로 급격히 바뀐 마당에, ‘백의민족내지단일민족임을 강조하는 애국가의 노랫말은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다는 거. 그런 거 하나 두고서도 그곳 고국에서는 고쳐볼 요량은 않고,정치야바위꾼들이 한바탕 입씨름한 적 있지 않아요? 아무튼, 핀란디아는 이들의 혼이 살아있는 대사사시에요.(하략) ‘

사실 위 작품은, 가지도 않은 핀란드에 관해 마치 그곳에 여행하면서 연인한테 쓴듯한 글이다. 그러나 그 글에서 이미 작곡가 시벨리우스에 관해 죄다 이야기한 셈이다. 그러니 시벨리우스와 그의 곡 핀란디아에 관해서 위 글에서 빠뜨린 부분만 때우면 되겠다.

시벨리우스는 9세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베를린, 빈 등지에서 음악공부를 이어갔다. 그는, 위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제정 러시아의 통치 아래서, 다행히도 예외적으로 핀란드어를 가르치는 학교에서 모국어를 배웠다. 그는 문학작품에 심취했다고 한다. 특히, 위 글에서도 소개하였지만,민족대서사시 칼레발라에 몰입했단다. 그것이 바로 그의 음악 자양분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유학 중 민족적 정체성에 관해 깊이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34세가 되던 1899년부터 시작하여 1900년까지 개정을 하는 등 핀란디아를 완성하게 된다. 조국의 자연과 문화를 음악으로 고양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여 국민주의 음악을 세우게 된다. 그는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로 알려져 있고, 91세까지 드물게 장수한 작곡가다. 그가 말년에 40여 년간 살던 통나무집은 자작나무 숲 속에 아직도 보존되어 있음을 인터넷을 통해 보게 되었다.

스메타나(Bedrich Smetana,체코의 보헤미아 지방, 1824~1884). 그는 체코 음악의 창시자이며 첫 보헤미아 민족주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마투어 바이올린 연주자인 아버지 아래서 음악을 공부하게 된다. 그는 6세 때부터 공개연주회를 가질 정도였다. 그는 리스트로부터 격려를 받아, 프라하에서 피아노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전문적인 교사로부터 음악공부를 정통으로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49세가 되던 1873년부터 1880년까지 약 7년간에 걸쳐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Ma Vlast)’을 적게 된다. 6개 곡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1비세흐라트(Vysehrad), 2몰다우(Moldau)’ 3곡 샤르카(Sarka),4보헤미아 숲과 초원에서’,5타보르(Tabor)’, 6블라니크(Blanik)’등이 그것이다. 그가 이 교향시를 적게 된 데는 그의 가슴에 민족주의가 불타오름에 기초한 것이다.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었고, 여러 방면에서 민족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특히 좋아하는 곡은 제2몰다우. 그가 그 곡을 적을 때에는 이미 매독으로 인하여 청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고 알려진다. 그러한 악조건에서도 그 곡을 지어 프라하시(-)에다 헌정했다고 한다. 나는 그 사실을 더욱 주목한다. 어느 음악평론가는 그 곡에 관해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몰다우의 수원지(水源池)로부터 시작하여 사냥과 농부들의 춤이 나온다. 잇달아 달빛과 요정의 춤이 나오고, 이윽고 강은 프라하시로 흘러들어간다. 강은 옛성 비세흐라트를 우러러 보여 유유히 흘러간다.’

음악에 관해 문외한인 내가 더 이상 어떻게 적을 수도 없고, 적어서도 아니 된다. 사실 그들 양인 음악의 깊은 향기도 나는 잘 모른다. 다만, 그들 양인은 투철한 민족정신을 지녔던 작곡가였으며, 그러한 까닭에 많은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우러름을 받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들의 조국이 당시 처했던 그 어려움으로 하여 그들을 더욱 빛나게 하였으리라 믿게 된다.

요컨대,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너무도 사랑하였으며, 조국의 동포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준 작곡가들이다. 그들은 참애국자였다. 이로써 그들 양인에 관한 이야기는 일단 접기로 하자.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 폴란드, 1810~1849)도 그들 양인과 동시대를 살았던 작곡가이며 참애국자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학을 떠나는 이들을 앉혀놓고 신신당부했다.

너는 폴란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의 음악학교 교장도 유학을 떠나는 쇼팽한테 일렀다.

어디를 가든지 우리의 조국 폴란드를 잊지 말게나. 이 한 줌의 흙을 자네한테 선물로 주노니, 늘 따뜻한 맘으로 간직하게나.”

 교장은 흙을 은잔에다 담아 건네주었다.

 쇼팽은 서른 여덟 젊은 나이에 갔다. 그는 유언했다.

 폴란드의 한 줌 흙을 내 무덤에 넣어주오.”

 이제 다시 수필작가로 엄연히 돌아온 나. 나는 나의 조국에 대해 어떠한 글도 여태 쓴 적이 없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심지어, 고향 청송에 관한 글도 그리 쓰지 않은 것 같다. 이 또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 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