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나의 집'의 여자(1)
‘즐거운 나의 집’의 여자(1)
윤근택(수필가)
큰딸애가 휴대전화로 지난 밤 예매 등을 통해 잡아준 스케줄(?)대로 움직여, 동대구역에서 KTX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그 녀석이 단단히 일러주는 대로 또 다른 KTX로 갈아탄 후 잠시 후 내가 사는 경산의 경산역에 내렸다. 옷을 근무복으로 갈아입는 등 출근을 서둘러야겠기에, 택시승강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저기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여기!”
그 이른 새벽에, 자기도 출근준비를 해야 할 텐데, 녀석이 내 승용차를 몰고 마중 나와서 비상깜박이를 넣고 기다렸던 것이다. 이 애비가 피곤할 테니, 자기가 차를 몰겠다고 하였다. 거기서 고작 7분여 걸리는 귀갓길. 부녀는 사건의(?) 줄거리만 대화로 나누었다.
“아빠, 많이 슬프지? 많이 울었어? ‘발인제(發靷祭)’는 참석하고 왔어?”
이에, 나는 고인(故人)의 맏딸이자 내 생질녀(甥姪女)이자 간병인이자 임종인(臨終人)이였던 이로부터 들은 사항만 겅중겅중 들려주었다.
내 막내누님이자 녀석의 막내고모인 이는, 이승에서 마지막 날 병실(病室) 벽에 걸린 시계를 때때로 들여다보며 묻곤 했단다.
“ 오늘 며칠이지? 지금 몇 시가 되었지? 네 조상들 제사는 모두 정월 또는 이월에 있는데... .”
본인도 그 댁 귀신(?)이 될 터이니, 가례(家禮)에 따라 제삿날이 정월 내지는 이월이었으면 좋겠다고 그처럼 갈망했던 것일까? 나아가, 마침 영안실의 수요가 넘쳐, 까딱하면 또 다른 병원으로 시신을 옮겨갈 뻔 했다는데, 유가족들에게 편의를 제공코자 그렇게 시간까지 설계하고 있었던 걸까? 게다가, 문상차(問喪次) 몰려든 고인의 손위 남매들이자 내 형제자매들인 분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장일(葬日)인 오늘이 음력으로 그믐날이라, ‘손 없는 날’이고, ‘주 오일제 근무’ 금요일이니, 우리가 ‘딸꾹(모두)’ 모일 수 있었잖은감?”
내 승용차를 대신 몰고 있던 딸애도 그러한 전언(傳言)을 듣다가 놀라는 모양이었다.
“아빠, 하여간 막내고모는 저승으로 갈 때까지 ‘계산적’이네?”
해서, 나는 고인의 맏딸이자 내 생질녀이자 임종자였던 ‘정실이(鄭室이;그의 신랑이 정서방이란 뜻임.)’한테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더 보탰다.
“어디 그뿐인 줄 아나? 니 막내고모는, 니 둘째 고종사촌언니 ‘김실이’가 결혼할 때 입었던 한복차림의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해 달라고 주문하더란다. 내가 봐도 그 영정사진은 한창 좋은 나이 때, 가장 고운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찍은 사진 같더라구.”
그러자 딸애는 다시 한 번 말했다.
“하여간, 고모는 죽을 때까지 자로 잰 듯해.”
문득, 어젯밤 영안실에서 소복(素服)한 생질녀가 이 외삼촌 앞에 쓰러져 울며 하던 말이 떠올랐다.
“외삼촌, 입관(入棺) 때에 그때 입었던 한복도 넣어줬어요. 괜찮죠? 제가 참 잘 했죠?”
그 여자의 집 전화 (02-863- 75XX)에다 전화를 걸면, 전화벨소리가 색다르다. 수십 년 째 그 벨소리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집 내 집뿐이리
그랬던 그 여자는 우리 나이 66세,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러한 자기 집을 두고 홀연히 떠났다. 위암으로 시작된 암이 전이되어 발병 2년여 만에 온갖 내장 다 들어내고 약액으로만 견디다가 떠났다. 그 여자는 이승에서 마지막 날 말없이 뜨거운 눈물만 흘리다가 숨을 거두었단다.
삼가 막내누님의 명복을 빌며... .
(다음 이야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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