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음악 이야기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1)

윤근택 2014. 4. 15. 08:47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1)                     

                 -  바람둥이 작곡가-

 

 

                                 윤근택 (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내가 두루 살펴본즉, 작곡가들 가운데 여럿은 성병인 매독으로 죽었다. ,나는 위대한 여성 작곡가의 이름을 여태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퍽이나 흥미롭다. 위대한 작곡가들은 이성(異性)인 여성으로 말미암아 영감을 얻고, 그들한테 사랑의 징표로 헌정코자 작곡한 예가 부지기수였다. 따라서 그 상대였던 여성은 살아생전 고통을 받은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의 후예들인 여성들 가운데 더러는 그들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거나 노래함으로써 많은 여성들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으니, 이 또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작곡가들 가운데 내가 위 부제(副題)로 삼은, 대표적 바람둥이가 있다. 그가 바로 드뷔시(Claude Debussy, 프랑스, 1862~1918). 그의 생애와 음악세계에 관한 이야기는 일단 뒤로 미루어두겠다. 우선, 그의 여성편력에 관해 좔좔 이야기해보려 한다. 독자님들이 알아보기 쉽게 편집하겠다.

1. 루스탕 부인. 드뷔시의 고모다. 도자기상이었던 드뷔시의 아버지는 수시로 직업을 바꾸고 이사를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한마디로 드뷔시는 음악적 재능은 있었으나, 뒷받침이 아니 되었다. 그런 딱한 사정을 안 고모는 어린 그를 데려다가 피아노 기초를 가르치게 된다. 드뷔시의 첫번째 여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플로르빌 모테 부인. 그녀는 쇼팽으로부터 피아노 수업까지 받은 유능하고 교양이 있는 드뷔시의 피아노교사였다. 모테 부인의 딸 마틸드는 훗날 시인인 베를렌느의 아내가 된다. 어린 드뷔시는 모테 부인과 그녀의 딸 마틸드한테서 막연한 애정을 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드뷔시는 모테 부인으로부터 음악재능을 인정받아 10세 나이에 파리음악원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칸타타 탕아(蕩兒)를 적어 발표함으로써 로마대상을 수상하게 되어 드디어 팔자를 고쳤으니 .

3. 마리 블랑슈 바니에 부인. 그녀는 화려한 사교계의 여인이었으며 가수였고 드뷔시가 17세 되던 때에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여인은 드뷔시한테 파리의 시인,화가,작가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아준 여인이다. 한평생 코드가 맞았던 사이로 추정된다. 사실 드뷔시가 음악인이면서도 시와 회화와 희곡 등을 섭렵하여 이른바 인상주의 음악의 창시자가 되었으니, 바니에 부인의 공로가 큰 셈이다. 그는 바니에 부인이 영감을 주는 여인으로 받아들여 만돌린베를렌의 시 등의 작품을 쓰기도 하였다. 그는 바니에 부인과 치열한 사랑을 함으로써 뒤에 소개할 로잘리 텍시와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바니에 부인과 사랑을 염두에 두고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지장드를 적게 된다. 이 곡은 메테를링크라는 이가 적은 희곡을 기초로 한 것이고, 펠레아스는 드뷔시 자신, 멜리장드는 바니에 부인임을 초연(初演) 때에 많은 이들이 눈치챌 정도였다고 전한다.

4. 폰 메크 부인.  1880년 드뷔시가 18세 되던 해에 만난 러시아의 부호 부인이다. 그녀는 음악 애호가였으며 피아니스트였다. 그녀는 차이코프스키 후원자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여름에 파리를 방문하여 피아노 아르바이트생을 구하고 있었다. 파리음악원은 성적이 우수한 드뷔시를 그녀에게 천거해 주었다. 드뷔시는 여름방학기간에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그녀를 따라 러시아에 가게 된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3년여를 폰 메크 부인 댁에 머무르면서 폰 메크 부인의 딸한테 피아노를 가르치게 된다. 그 딸한테도 빠져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폰 메크 부인은 허락치 않았다. 이마에 난 혹을 감추기 위해 머리카락을 늘여뜨리고, 키도 작고, 가난뱅이인 그에게 딸을 맡길 생각이 없었던지 아니면 자신이 한참 연하인 드뷔시를 더 좋아해서 그리 하였는지는 알 길 없다. 대신, 그녀는 작은 프랑스인이란 애칭으로 그를 부를 만치 아꼈다. 그녀는 드뷔시한테 후기 낭만파의 작곡가 바그너도 소개해 준다. 그러나 드뷔시는 정작 바그너의 음악세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이 시기에 동양적인 음악세계와 무로르그스키의 음악세계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7음계가 아닌 5음계에 대한 이해도 이루어져 새로운 음악사조를 이끄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5. 테레즈 로제. 드뷔시는 작곡가 쇼송의 양녀이자 가수인 로제와 약혼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한 녘으로는 재단사의 딸 가브리엘라 뒤풍과도 사귀게 된다. 이른바, 양다리 걸치기를 한 셈이다. 드뷔시는 약혼을 파기하였고, 충격을 받은 로제는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가까스로 살아난다.

6. 가브리엘라 뒤풍. 5에서 소개한 대로다. 드뷔시는 그녀와도 결별한다.

7. 메리 가든.  3에서 언뜻 소개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초연하기 위해 드뷔시는 여자가수를 구한다. 그녀는 스코틀랜드 가수였다. 본디 그 오페라의 여주인공은 희곡을 쓴 메테를링크의 부인이 맡기로 약조가 된 상태였으나, 드뷔시가 그 약조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그녀를 내세웠던 것이다. 메리가 없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없다.고 고집했다니, 그가 메리한테도 시쳇말로 껄떡댔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8. 로잘리 텍시. 1899년 드뷔시가 37세 되었을 때 결혼한 여인이다. 그녀는 위 6의 가브리엘라 뒤풍의 친구였으며 패션모델 출신이다. 결혼생활은 5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드뷔시가 아래 9에 소개할 또 다른 여인한테 홀려 아내를 등한시함으로써 파경을 맞게 된다. 그녀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했으나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그 잘나빠진(?) 작곡가로 인해 자살을 기도한 두번 째 여인이었다. 모르긴 하여도 패션모델이었으니 얼굴은 반반했으나 음악에 대한 감수성이나 지적 민감성이 떨어진 이였던 모양이다. 서양말로 doll은 아니었을까 하고서.

9. 엠마 바르닥 부인. 8에서 소개한 바 있

지만, 결과적으로 가정을 파괴한 여인이다. 은행가의 부인이며 교양 있고 정숙하고 아름다운,프랑스의 전형적인 귀부인이었다고 전한다. 드뷔시와 동갑내기였다고 한다. 1904년 드뷔시가 42세가 되던 해 그는 그 부인 아들의 작곡교사로 지내며 그녀와 애정행각을 벌인다. 20세기 음악계 최대 스캔들로 일컬어진다. 드뷔시의 친구들마저도 다 떠나게 되고, 손가락질이 워낙 심해지자 드뷔시는 배가 불러 오는 바르닥 부인과 함께 런던으로 도피를 하게 된다. 엠마 바르닥 부인한테서 사생아 슈슈(본명 클로드 엠마)가 태어난다.

10. 슈슈. 9에서 소개한 바르닥 부인과 사이에 난 딸이다. 도피생활을 하던 드뷔시한테는 금지옥엽이었다. 그는 이미 결장암으로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하였다. 그는 어린이의 세계를 작곡하여 딸한테 바치고서 모든 여성편력을 접는다. 아니, 모든 바람을 잠재운 채 세기의 바람둥이 작곡가는 눈을 감는다. 그의 향년은 56년이었다. 슈슈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 한 장을 남겨 두고 그렇게 갔다. 슈슈도 병을 얻어 아버지가 죽은 한 해 후 1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내가 좋은 이야기 다 두고서, 그를 한낱 바람둥이 작곡가로 치부하여 글을 적은 듯하다. 사실은 예술가한테 이성(異性)은 모든 영감의 근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성은 창작의 샘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의 오랜 경험으로도 알고 지낸다. 사실 나도 매번 이런 생각을 하며 글을 적곤 한다.

이 글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세상에서 맨 처음 읽도록해야지!

 , 나한테도 늘 모델에 해당하는 여성이 있어왔다는 뜻이다. 드뷔시는  바람이었다. 잠시도 멈추지 않는 바람이었다. 그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바람이기도 하였다. 물론 그때그때마다의 여성을 위해 적은 곡들도 많고, 그 여성이 음양(陰陽)으로 도와줌으로써 음악적 재능을 키워나갔던 게 사실이다. 드뷔시는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목마름을 느꼈으며, 그때마다 여인으로부터 위안을 받았으리란 생각도 하게 된다. 그는 나날 유명한 작곡가로 커나갔지만, 그의 여인들은 하나하나 희생을 하게 되었음을 위의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술가한테 도덕적 잣대를 갖다댄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예술가는 기질적으로 도발적이고 격렬한 사랑을 하는 예가 너무도 많기에 . 그러함에도 내가 아는 몇 몇 수필가들은 여태 그 속 좁음(?)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다. 그들은 수필가라고 하지만, 수필의 언저리만 맴돌고 있는 셈이다.

이 정도로 하고, 미루어 두었던 그의 음악세계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그의 음악세계를 단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전통적인 것들로부터 자유. 실제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음악을 정열적으로 사랑한다. 그러기에 음악을 숨막히게 하는 메마른 전통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음악은 외부로 나아가는 예술이며 소재에도 구속받지 않는다. 바람·하늘·바다를 노래할 수 있는 자유로운 예술인 것이다. 음악은 내부로 차단되고 전통만을 중요시하는 예술이어서는 안 된다.

 이 말로써 그가 창시하여 완성한 인상주의 음악이 어떠한 음악인지 죄다 설명을 한 셈이다.  그는 이러한 말도 하였다.

바람의 말 이외에는 누구의 충고도 듣지 말라.

그는 친구인 폴 뒤카스한테도 이러한 충고를 했다.

작품에서는 시를 추구해야 한다네. 음악은 시와 회화 등 다양한 예술과 관련이 있다네.

 위의 말들은 모두 인상주의 음악의 성격을 너무도 잘 나타낸 말이다. 정작 그는 작곡가였으면서도 음악 밖의 예술장르를 더 좋아하였다. 모네로 대표되는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였다. 말라르메, 베를네느,삐에르 루이스 등 상징주의 문학인들과도 교류하였다. 그가 연 인상주의 음악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과 상징주의 문학의 결합체이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인 점이 특징이다.  인상파 화가들이 그림을 통해 색채를 발견하듯, 그는 음악을 통해 색채를 발견하였다. 거기다가 그는 상징주의 문학을 통해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재발견하였다. 부드러운 억양과 운율과 리듬, 그리고 문장의 유연하고 불균형적인 짜임새 등과 같은 성질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하여 멜로디· 화성·리듬·음색·형식 등의 모든 면에다 그대로 적용하고자 애썼다. 그 작업은 바로크 음악에서 시작하여 직전의 후기 낭만파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온 전통을 깨부순,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파도소리가 들리고(바다라는 작품에서), 은은한 달빛이 보이고(달빛이란 작품에서), 목신(木神)이 발가벗은 채 숲에서 나른히 잠든 모습이 보이는(말라르메 상징시에다 곡을 붙인 그의 출세작, 목신의 오후 전주곡에서) 등 아주 새로운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음화(音畵)를 그린 작곡가다. 작품 바다의 경우, 새벽에서 정오까지의 바다, 바다의 유희, 바다와 바람의 대화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그를 생판 모르는 독자님일지라도 그 표제(標題)만으로도 그의 음악이 얼마나 감각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이제 다시 수필작가로 엄연히 돌아온다. 오늘까지 당연히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믿어왔던 수필창작 이론마저도 다 부수어버릴 때에 비로소 새로운 수필이 나오게 된다는 걸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는 깨우쳐준다. 아울러, 작가는 정작 문학이 아닌 여타 장르의 예술을 통해서 거듭 날 수 있다는 걸 드뷔시는 일러준다. 이제 그가 교향적 스케치라고 명명한 바다, 아마빛 머리의 소녀를 다시 들으며 이번 글은 접기로 한다.

 

(다음 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