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돋보기안경을 닦다가

윤근택 2014. 4. 15. 08:53

돋보기안경을 닦다가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어느새 나의 글짓기는 생활습관이 되어 있다. 아니, 일과가 되어 있다. 원고지에다 쓰던 시절과 달리, PC 워드프로세스 프로그램을 씀으로써 잘못된 부분을 이내 고칠 수 있는 등 얼마나 편리해졌는지 모르겠다. 그러기에 매일 한 편도 거뜬히 쓸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PC만이 내 다작(多作)의 조력자(助力者)이냐 하면, 막상 그렇지도 않다. 돋보기안경이 없는 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PC 화면을 키운다 할지라도, 돋보기안경을 끼지 않고서 맨눈으로는 초성·중성·종성을 제대로 찾아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를 토닥이기가 어렵다. 그러니 내 창작의 진짜 공로자는 돋보기다.

잠시 닦개로 돋보기 알을 닦고 있자니, 온갖 생각이 오간다. 불쑥 이러한 혼잣말을 내뱉는다.

늙어가도 사랑은 변하지 않는 법. 특히, 늙어가도 예술가의 사랑과정열은 쉬이 변하지 않는 법. 그러기에 나는 밤을 낮으로 삼아 끊임없이 적어댄다.

정말 한 때는 돋보기안경을 낀 이들이 멋있어 보인 적이 있었다. 안경다리를 베물고 생각에 잠긴 분들을 볼 적이면 고상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러한 모습에서 인생의 깊이 같은 걸 곧잘 느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웬걸! 학구적이지도 못하며, 독서량도 전무(全無)에 가까운 나한테만은 죽어도 노안(老眼)이 찾아올 것 같지 않았건만, 잔글씨나 가까운 사물 따위는 제대로 식별할 수 없게 이르렀다. 그러한 점에서도 시간은, 세월은 모든 이들한테 언제고 공평하게 할당된 듯하다.

사실 돋보기안경을 끼게 된다는 것은, 노안이 되었다는 증거다. 도대체 노안이 뭔가? 눈의 수정체(水晶體) , 렌즈의 두께를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이른바 모양체 가 수정체 양끝에 있는데, 이 근육질은 그때그때마다 수정체의 두께를 조절함으로써 입사(入射)되는 물체의 빛을 정확히 굴절시켜 망막에다 상()을 맺도록 한단다. 노안의 정확한 원인은, 모양체의 근육이 탄력을 잃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가까이 있는 물체를 볼라치면, 수정체가 신속히 두꺼워져 빛의 굴절률을 높여야만 망막에 정확히 상이 맺히게 되는데, 모양체의 근육이 탄력을 잃어 수정체 두께를 얇은 채로 두기에 그 빛의 굴절률이 낮아 안타깝게도 망막 뒤에다 상을 맺게 된다는 게 아닌가. 이는 제법 어려운 듯한 과학 상식이다. 하여간, 노안은 우리의 몸이 늙어감으로써 생긴 병징(病徵)임에는 틀림없다.

노안은 원시안(遠視眼)과 유사성을 띤다. 가까이 있는 물체를 잘 알아볼 수 있는 근시안(近視眼)과는 반대 개념이기도 하다. 문득, 하느님께서는 왜 마흔 이후에는 노안이 되도록 설계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 이유가 있었을 법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한테 젊은 날에는 이런 거 저런 거 알뜰살뜰 살피고, 학문적으로도 깊이 파고들기를 원하셨을 것 같다. 깨알 같은 법의 문구까지도 따져가며 사리 분별을 하며 살기를 원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니 봐도 좋을 성 싶은 것들은 대충 지나쳐 보도록 하고, 보다 먼 곳의 물체를 보되, 그것도 어렴풋하게만 보아서 윤곽만 짐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노안을 주신 건 아닐까 하고서. 사실 살아와본즉, 그러한 지혜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 같았다. 애써 시시콜콜한 것들을 더 이상 파고들 것도 없는 것 같고, 그저 그러려니 정도로만 여기며 사물을 바라보아도 하등의 문제도 생겨나지 않았다. 노안으로 인하여 판단이 희미해진다기보다는, 노안의 덕분으로 사물을 포괄적으로 또는 거시적(巨視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걸. 그러한 점에서 다소 불편하기는 하나, 돋보기안경을 끼게 되는 걸 크게 안타깝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내가 글짓기를 할 때 말고는 돋보기안경을 낄 일도 극히 드물다. 농부인 까닭에 이따금씩 농약병의 잔글씨를 들여다 보아야 일도 있지만, 그때에는 손잡이 달린 돋보기 하나면 충분하다.

하여간,돋보기안경은 작가인 나한테 이젠 필수품이 되었다. 위에서도 이미 이야기하였지만, 글짓기 할 적에 없어서는 아니 되는 광학기계다. 그런데 정말로 돋보기만이 나한테 필요하냐 하면, 막상 그렇지도 않다. 돋보기는 내가 토닥이는 글씨를 또렷하게, 굵게 보이도록 할 따름이다. 정작 내가 보아야 할 것은 그런 게 아님을 잘 안다. 나는 나한테 보이는 걸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보고자 하는 것과 보아야 할 걸을 보는 데 더욱 길들여져야 한다는 것을. 그러한 눈을 일컬어 심미안(審美眼)이라고 하였다. 정말로 작가인 나한테는 심미안이 돋보기안경보다도 아니, 노안보다도  더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