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수련(133)
문장수련(132)
윤근택(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이번 호에도 전주에 사시는 ‘김학(金鶴)’ 수필가께서 e메일로 보내주신 어느 분의 글을 텍스트로 삼는다.
원문과 문장치료 후 글과 동시 읽기)
금비가 내리는데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문학회 이○○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절로 나오는 말이었다. 비다운[☞비[雨]다운 * 사실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고,흔히 쓰는 말은 한자, 영어 등으로 병기(倂記)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더라도 굳이 뜻을 명료히 하기 위해 병기를 하겠다면, 한 편의 글 가운데에서 동일어가 최초로 쓰일 때만 사용해야 한다. 아래에 ‘비(雨)’로 쓰고 있는데... .] 비가 오지 않아 얼마나 기다리던 비(雨)인가? 금년은 50년 만의 가뭄이라며 걱정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비가 국지성 소나기로 지금 쏟아지고 있다.
2017년 6월 26일 오후 5시부터(☞5시부터,이곳 전주만 하더라도,) 지역 편차를 두고 덕진구 66.3mm, 완산구 99.5mm가 내렸다. 천금보다 소중한 단비가 내렸다. 수필반 회원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나인구 회원의 감사 비와 겹치는 것 같다.[☞마침 나인구 회원은 수필반 회원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단다. 그 또한 ‘감사의 비’ 처럼 여겨진다. * 고쳐본 이유 : 원문은 느닷없이 ‘감사 비’라고 표현하고 있다. *본인이 급조한 어휘에는 작음따옴표를 쳐버릇하기! 그리고 그렇게 만든 어휘 뒤에 ‘(?)를 붙이는 버릇도 들이기! 예) ‘행복한 눈물(?)’]
텔레비전방송에서는 연일 50년 만의 가뭄이라며 저수지와 농작물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잊지(☞ 그 광경들을 보노라니, 문득 잊지 * 고쳐본 이유 : 문장간, 단락간에는 결합력이 있어야 한다. 즉, 아주 자연스럽게 문장들이 이어져야 한다.) 못할 50년 전의 일이 되살아났다. 시골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지금보다 더한 가뭄으로 기억된다. 비가 오지 않아 관수시설이 좋지 않아서 [☞~~ 동안이나 비한 방울도 오지 않았던 데다가 수리시설(水利施設)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 고쳐본 이유 : 글은 독자들로 하여금 실감나게 적어야 한다. ‘~~ 동안’으로 그 기간도 적고, ‘관수시설’을 ‘수리시설’로 바꾸고! 또 하나. ‘-않아’ ‘않아서’가 같은 문장 안에 있어 문장 리듬을 저해한다.] 가뭄 때문에 애가 탄 농민들의 마음을(☞그 해 긴 가뭄으로 타들어가던 내 양친과 이웃들의 가슴. 그분들이 용을 쓰던 모습을 차마 * 고쳐본 이유 : ‘농민들의 마음을 잊을 수 없다.’는 잘못된 표현이다. 대신,‘농민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는 올바른 표현이다.
잊을 수 없다. 여느 집도 마찬가지였지만 우리 집도 당장 모내기를 하지 못해 집안이 편치 않았다. 학교에서 2km정도 떨어진 일명 만고개를 지나 신작로 가에 위치한 3단락 6마지기(1200제곱미터) 논에 모내기를 하지 못해 메밀, 조, 콩, 등을 심는다고 야단법석이었다. (☞ 우리 집도 여느 집과 다를 바 없었다. 내 양친은, 하마나 하마나 하며 비를 기다리다가 끝내는 모내기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내 양친은 용단을 내려, 세 뙈기 여섯 마지기 논에다 구황작물(救荒作物) 내지 대체작물을 심게 되었다. 그 구황작물은 메밀, 조, 콩 등이었다. 그해 우리는 쌀밥 대신 조밥을 어찌나 많이 먹었던지. 또 그 조밥은 어찌나 목이 까끌까끌하게 하던지. * 고쳐 본 이유 : 사실 독자들은 ‘메주알고주알’에는 흥미가 없다. 사물을 추려서 적을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해, 군더더기는 금물이다.]
군청에서도[☞한편, 군청에서는 군수 영감이 제주(祭主)가 되어, * 고쳐본 이유 :화제 전환의 ‘한편,’삽입! 실감나게!] 이름 있는 곳, 산과 정자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가뭄 비상대책으로 눈만 뜨면 물을 모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공부하는 우리들까지 동원되어 냇가파기, 방죽 물 떠서 작물에 주기, 둠벙 파기, 등 갖은 수단을 다하느라 공부는 뒷전이었다. 관정을 판다고 아무 곳에서나 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고등학교 3년 동안 담임했던 선생님이 공교롭게도 시골 읍내 우리 집 담을 걸쳐 여고생인 동생과 자취를 하고 계셨다.
적은 것이지만 담장 위로 김치, 감자, 고구마, 추어탕, 등을 건네줄 수 있으니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선생님은 잘 알고 계셨다. 하루는 학교에서 조용히 불러 이 가뭄에 모내기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시기에 모내기는 하지 못하고 잡곡을 심는다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우리 반 47명을 데리고 오늘은 우리 논에서 일하기로 했다. 그동안 학생들이 봉사활동에 지쳐 뜨거운 햇빛을 피해 쉬는 시간에 일부가 몰래 가버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나는 친구들의 빵과 간식, 음료수를 가지러 간 사이였다. 다음 날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담임선생님은 완고하신 성품으로 모두 강당에 집합시켜 대대적인 벌칙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주동자를 색출하고 체벌을 가하여 친구들 볼 낯이 없었다. 반장의 명목으로 선생님께 달려가 친구들을 용서해 줄 것을 말씀드렸지만 수학을 가르치셨던 선생님은 자기 뜻대로 하셨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뭄으로 인한 일로서 잊히지 않는다.[☞ 이 단락에 다소 문제가 있다. 삽화(揷話) 내지 예화(例話)를 들되, 최대한 압축해서 들기! 사실 작가는 한 편의 글을 적되, 독자들한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적는다. 주제어 혹은 주제문을 향해 모든 문장들이 일사불란하게 정돈되어 있어야 한다.]
(이하 문장치료 생략)
다른 해에는 남원 금지 출신인 선생님의 어머니 혼자 농사를 지으신 것을 알고, 일요일에 우리 친구들 몇 명이 찾아가 모내기를 도와 준 추억을 잊을 수 없다. 학교를 마친 뒤 가정을 꾸리고 살 때다. 몇 년에 걸쳐 친구들과 어울려 그 선생님을 모시고 고마움을 나누면서 학창시절의 일을 떠 올리며 가뭄이야기도 나누었다.
같은 물방울이지만 하늘에서 오늘 내리고 있는 비와 그때의 비는 전혀 달랐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감각도 다르다. 돈비의 값어치도 천문학적인 차이로 그 고마움을 느끼는 감정이 너무 판이하다. 비가 왔을 때 비를 맞으며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삽과 호미를 들고 논밭과 거리에서 울부짖으며 그 고마움을 나타냈던 사람들을 기억에서 지울 수가 없다. 그때의 한 방울의 느낌은 너무 큰 감동을 주었다. 모든 사람들의 애타는 마음이었다. 그 진가를 어떻게 마음속에 간작해야할까? 그때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 돈의 액수는 따질 수도 없고 그 고마움에 보답할 줄도 모르고 산다. 하늘에서 공동으로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느낌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지금 내 앞을 지나가는 학생들은 감동이 없는 것 같다. ‘그냥 비가 오는가 보다. 나와는 별 상관이 없다.’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다른 날과 달리 비를 맞으며 집으로 걸어가고 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 논은 형님이 유산으로 받아 농사를 짓고 있다. 지금은 경지정리가 된 그 논에도 비가 내리리라 생각하니 빗방울이 더 소중했다.
산천초목 온 대지의 물을 달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잠재우는 빗방울 소리가 내 귀에 들리고 있다.
문장치료사 윤쌤(윤근택)의 말]
글쓴이의 문장치료는 단축수업(?)으로 그치겠다. 위 각론에서 지적한 부분만이라도 재차 실수를 하지 않으면 한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애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릴 게 있다. 오늘 아침나절에, 나는 전주의 ‘김학’ 수필가로부터, 어느 분께서 속이 상해서(?) 밤새껏 한숨도 주무시지 못했다는 기별을 받았다. 그분의 글도 이 문장치료 시리즈물(?)에 있었던 모양이다. 하여간, 내 휴대폰에 문자메시지로 그런 내용이 들어왔다. 퍽 유감이다. 말은, 양날을 지닌 창과 같다는 걸 나는 너무도 잘 안다. 이는, 영어 단어에도 잘 나타나 있다. ‘word’뒤에다 ‘-s’를 붙이면, ‘말’또는‘문장’이 되지 않는가. 그러나 ‘words’앞에다 ‘s-’를 붙이면 ‘창들(swords)’이 되어버리니... .
사실 내가 문학인의 길을 30여 년 걸어오는 동안, 위에서 소개한 사례와 같은 사건사고(?)가 왜 더 없었겠는가.
이렇게 말한 이도 있었다.
“ 앞으로 내가 글을 쓰나 봐라. 윤근택씨가 미워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을 거라고요.”
그러나 그분은 후일 꽤나 대접받는 여류수필가로 변신했다. 찬물을 한 대접 따라 마시고, 맹훈련을 했다는 이야기다.
또 이렇게 말하면서 전화기 수화기를 ‘쾅’ 내려놓은 이도 있었다.
“자네 말이야. 새까만 수필계 후배이자 대학 학과 나의 제자인 주제에, 나의 작품에 관해서 ... .”
사실 그는 어디에서 아직도 엉터리 수필작가들을, 자기를 닮은 엉터리 수필가를 마구 찍어내다시피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어느 여성수필가는 숫제 탄원서를 보내온 적도 있다.
“윤 선생님, 인터넷에 올라있는 제 글과 제 실명을 좀 내려주세요. 제가 중환자실에서 암 투병하고 있는데, 그 병보다도 더 고통스러우니... .”
사실 그분은 그 동안 각종 문학상을 받았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해 왔던 분이다.
위와 같은 상처를 입힌 적 있다. 남에게 입힌 마음의 상처이기도 하였지만, 내가 입은 마음의 상처일 수도 있다.
그나마 지금 내가 새삼 위안 삼는,‘뷔퐁’의 명언이 있다.
“Style is the man himself(글은 곧 그 사람이다).”
그의 말을 바꾸어 받아들여도 된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국어를 제대로 쓰려고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야 한다. 글로써가 아닌, 나이로만 대접받으려면 경로당에 가면 된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모국어를 제대로 못 쓰면, 의원도 아니 된다고 한다.
내가 연세드신 분들께 위로의 말씀을 드릴 일은 정작 다른 데 있다. 우리말까지 말살하려고 들었던 일본제국주의자들로 말미암아, 연세가 지긋한 분들은 제대로 모국어조차 배울 기회가 없었다는 점. 그밖에는 달리 위로해드릴 말씀이 없다.
하루아침에 수필작가가, 특히 훌륭한 수필작가가 되지는 못한다. 명문장가는 더더욱 도달하기 힘든 높은 경지에 있다.
남들로부터,‘개꼬리 삼 년 묻어두어도 황모(黃毛) 못 된다.’는 우리의 속담을 들을 수는 없지 아니한가.
다소 고까운 점 있었더라도, 마음을 좀 더 넓게 가지시고, 다들 눈부신 문업(文業)을 닦아가시길 바라며, 이 글로써 종강(終講)코자 한다. 그야말로 용단(勇斷)이다. 그 동안 다들 감사했다.
단, 본인이 통사정하다시피 해서 e메일 등으로 부쳐오는 글은 받아주겠다.
- 대구 팔공산 어귀 ‘팔공보성1차타운’ 전기실에서 윤근택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