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윤근택(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언제부터인가, 나는 인터넷 백과사전 등에 실린 글을 나의 수필작품 일부분에 그대로 베껴다 붙이곤 한다. 나는 이러한 형태의 수필을 ‘꼴라주(collage) 수필’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내 ‘클래식 음악 듣기’는 일상이다. F.M. 라디오는 어느 날 하루라도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곡을 아니 내보내는 날이 없다. 그는 그만치 서양 음악의 주춧돌인 셈이다. 또, 라디오는 어느 날 하루라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 ’을 아니 내보내는 날이 없다. 그도 역시 음악사적으로 유명한 작곡가임을 웅변 이상으로 알려준다.
인터넷 위키백과는 ‘파가니니’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너무 분량이 많아, 내가 다소나마 간추렸음을 미리 밝히면서.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1782년 10월 27일 ~ 1840년 5월 27일)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가, 작곡가이다.
10대 초에, 이미 종전의 연주 기법의 대부분을 마스터한 파가니니는 15세가 되자 하루 10시간 이상의 격심한 연습으로 혼자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나갔다. 그의 노력이 결실하여 1799년 17세에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곧 명성과 부(富)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성공으로 자만에 빠진 소년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져서 결국 연주에 필요한 바이올린마저 잃게 되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 생활을 보냈으나 그 동안 연주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사실은 이 기간에 건강 회복을 기도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고 있었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해부터 다시 연주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누이 동생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다. 1808년 26세 때부터 1828년의 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입신(入神)의 기(技)를 펴냈고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묘기는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3월 말 빈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모자·장갑·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다음해 1829년 베를린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각지를 순회한 끝에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엔 파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 여행으로부터 귀국하여 북이탈리아의 파르마를 안주의 땅으로 정하였다. (중략) 1840년 5월 27일 인후 결핵으로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57세로 일생을 마쳤다.
파가니니의 악기 연주기법.
파가니니는 4옥타브에 걸치는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음을 하나하나 끊어 연주하는 스타카토 주법, 현을 손끝으로 튕겨서 소리를 내는 피치카토 주법 현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서 휘바람 같은 소리를 내는 하모닉스, 이중 트릴 (떨꾸밈음)등의 화려한 연주 기법을 만들어 냈다.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 파가니니의 놀라운 연주를 들은 관객들은 감동한 나머지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이며 루카의 군주인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주만 들으면 까무러쳤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의 현을 두 개만 사용하는 곡을 선보이자, 엘리자는 “그럼 하나로만 연주할 수도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영감을 얻은 파가니니는 정말로 G현 하나로만 연주하는 곡을 만들었는데,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괴소문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다. 즉 파가니니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G현은 젊은 시절 그가 목 졸라 살해한 애인의 창자를 꼬아 만든 줄이라는 소문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파가니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탁월한 실력을 얻었으며, 바이올린 활을 움직이는 것은 그가 아니라 사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소문이 어찌나 파다했는지 교회를 중심으로 파가니니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공연 때마다 관객들은 혹시 무대 어느 한 구석에 정말 악마가 숨어 있는지 보려고 눈을 크게 떴으며, 파가니니가 지나갈 때마다 정말 악마 특유의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걷는지 보려고 시선을 집중했다. 소설가 스탕달과 작곡가 리스트도 이런 소문을 마치 사실인 양 언급했고, 시인 하이네는 공연 중에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 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고 단언했다.(중략) 권위를 무시하는 특유의 괴팍함과 자유분방함은 물론이고, 꼬챙이 같은 체구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두드러진 매부리코와 광대뼈를 지닌 파가니니의 외모도 악의적인 헛소문의 생성에 일조했다. (중략)
작곡가서도 파가니니는 알려져 있다. 작품에서 그가 항상 사용한 중음주법, 프라지오레토,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대비, 왼손으로 연주하는 피치카토 등은 바이올린의 표현력을 한 층 빛나는 것으로 높였다. 대표작으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무반주 <24의 카프리치오>를 들 수가 있다. 파가니니의 초절적인 기교에 자극된 19세기의 작곡가들, 예컨대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은 파가니니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많은 피아노 난곡(難曲)을 작곡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기교를 피아노로 전용하여 피아노의 새로운 표현을 개척해야겠다는 의욕이 환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자, 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다. 위 밑줄 친 부분이, 거의 매일 F.M.에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이 흘러나오게 하는 이유임을. 몇 몇 작곡가의 곡을 소개해보자. 라흐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광시곡)’, 브람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리스트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대연습곡 라 캄파넬라’ 등이 있다.
나는 위 곡들 가운데 특히나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좋아한다. 그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는 파가니니의 ‘독주 바이올린 카프리치오(capriccio) op.1’의 주제를 사용한 피아노곡이다. 다시 ‘카프리치오’가 뜻하는 바를 알아봐야지 않겠나.
카프리치오란, 즉흥품의 소품을 부르는 말이다. 카프리스, 광상곡(狂想曲), 기상곡(綺想曲)이라고도 한다. 파가니니는 그러한 카프리치오를 24곡을 생전에 만들었다. 그 가운데 매우 빠른 템포의 독주 바이올린 카프리치오 작품번호 1(op. 1)의 주제를 원용(援用)한 피아노곡이 바로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이다. 사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곡은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으리만치 빠른 템포라서, 파가니니 자신 외에는 연주하기가 아주 까다롭다고 한다. 그러한 기교의 곡이기에, 당대의 청중들은 그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했을는지도 모른다. 또, 그러한 기교의 곡이기에, 라흐마니노프 등의 많은 작곡가들이 경쟁적으로, 피아노곡 등으로 변주(變奏)해보려 애썼던 거 같다.
여기서 잠시, 라흐마노프의 곡을 한 곡 듣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하자. 아래를 클릭하면 음악이 열린다.
저작권 시비가 있을 수도 있으니, 미리 당해 블로거를 비롯한 관계자들께 양해를 구한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이어간다. 파가니니는 성공한 예술가였다. 그는 살아생전 많은 음악 애호가들이 열광토록 했다. 다시 말하지만,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란 별명까지 얻을만치. 그리고 후세의 작곡가들한테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러시아 태생 미국 시민이었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를 세계적 작곡가로 만드는 데 일조(一助)했다.
이제 나는 탄식한다. 사실 이 탄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자주 해왔다.
‘유년시절부터 받아쓰기로 시작된 글쓰기와 글짓기가 50년 이상 이어져왔으나, 그 출발도 너무 늦었다는 것을. 만국공통어인 오선지의 악보와는 달리, 국내용에 불과한 모국어도 제대로 못써 이따금씩 ‘필화(筆禍)’까지 입고 있다는 것을.’
수필도 문학이고, 문학도 예술이긴 하지만, 음악이라는 예술장르에 비하면 하찮다는 생각도 종종 하게 된다. 그 많은 음악 신동들은 자기 모국어도 채 익히기 전 10대에 이미 자기 음악을 완성한 예가 얼마나 많던가. 더군다나, 나는 그 많은 종류의 악기 가운데 그 어느 악기도 환갑 나이가 되도록 연주할 수 없다. 참말로 부럽고, 참말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는, 수필작품 창작은 아예 접어두고, 더 늦기 전에 음악용어 대사전을 펼쳐가며, 용어라도 하나씩 익혀 가면 어떨까 싶다. 적어도 그리하는 게 그 많고 훌륭한 작곡가들에 대한 예의인 듯싶어서. 날마다 아름다운 선율을 내 귓전에 선사하는 그분들에 대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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