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몬드의 손짓'
'에드몬드 알비우스(Edmond Albius)의 손짓’
윤근택(수필가)
나는 KBS F.M. ‘출발 F.M.과 함께’의 열성 청취자이다. 그 프로그램은 내가 평소 즐겨하는 다양한 클래식 음악을 내보내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사소하거나 위대하거나’코너에서 온갖 감동적인 이야기도 전해주고 있다.
오늘 아침, 40여분 승용차를 몰아 출근하다가 그 코너를 통해 들은 이야기도 나를 크게 감동케 했으니... . 바로 인류 7대 향신료 가운데 하나인 ‘바닐라(vanilla)’에 얽힌 이야기였다. 지금부터 아침에 그 방송에서 전해들은 이야기와 인터넷 서핑으로 챙긴 자료 등을 버무려 적으려한다.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19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부르봉 지방, 레유니온(Réunion) 섬 어느 백인 댁에 ‘에드몬드 알비우스’란 12살짜리 흑인노예가 살았다. 그는 또래인 주인댁 아이에게 손짓하며 가까이 와 보라고 하였다.
“주인님, 내가 손으로 수분(受粉)하였던 이 바닐라에서 꽃이 폈어요.”
과연 그러했다.
그때까지‘바닐라’한테는 이러한 일이 있었다. 바닐라는, 난초의 일종인 바닐라속(-屬)에 속해 있으며, 원산지는 멕시코이다. ‘바닐라’라는 이름은 에스파냐어 ‘vainilla’에서 나왔으며, ‘작은 꼬투리’를 뜻한다. 멕시코의 전신(前身)이었던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던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가 1520년대에 유럽으로 가져갔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멕시코 밖에서 바닐라를 키우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러기를 340여 년. 이유인즉, 바닐라 난초를 낳는 ‘tlilxochitl vine’이 ‘멜포나(Melipona)’라는 벌과 공생관계였고, 그 멜포나는 다른 나라에는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충매화(蟲媒花)인 바나나한테 ‘중매쟁이 벌’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때까지는 자연상태에서만 수분(pollination)이 되는 줄 알았던 셈이다.
1837년에 이르러서야 벨기에의 식물학자 ‘샤를 랑수아 앙뜨완 모렌 (Charles François Antoine Morren)’이, 이를 발견하여, 인공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재배 방법은 수익이 별로 나지 않았기에, 실제로 멕시코 밖에서는 바닐라를 재배하지도 않았다.
그랬던 것이, 정확히 1841년, 그 ‘에드몬드 알비우스’의 손에 의해 인공수분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그는 바닐라꽃이 작은 잎사귀 속에 숨어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잎사귀를 젖혀 꽃을 찾고, 그 꽃의 수술대에서 꽃밥을 손으로 묻혀 암술머리에다 옮겨 묻힌 것이다. 손 대신, 대나무꼬챙이를 썼다는 설도 있다. 하여간, 그 꼬맹이 흑인노예의 인공수정 덕분에 바닐라 재배는 곧바로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다는 거 아닌가. 당시 욕심에 가득 찬 백인들은 그 소년의 기술을 강탈하고자 애썼으나, ‘에드몬드 알비우스’의 백인 주인은 끝까지 그의 기술을 지켜주었다는 점도 감동적이다. 뿐더러, 그 백인 주인은, 몇 해 아니 가서, 그 갸륵한 ‘에드몬드’한테 노예 신분의 사슬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 이후 프랑스인들은, 그 노예 소년의 업적을 기려, 그 바닐라 인공수정 기술을 ‘에드몬드의 손짓’이라고 한단다. 정말 감동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거의 매일 맡다시피하고 즐기다시피하는 그 바닐라향은 꼬맹이 흑인노예의 손기술에서 비롯되었음을. 그 꼬맹이 흑인노예한테 경의를 표한다.
내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자니, 꽤나 아쉽다. 더더군다나, 내가 지난 날 ‘농학도(農學徒)’ 아니, 더 구체적으로는 ‘임학도(林學徒)’였으니. 우리의 주식인 쌀, 그걸 만들어내는 새로운 품종의 벼는 그 어느 곳도 아닌 필리핀의 ‘국제도작연구소(I.R.)’에서 최종적으로 태어난다. 학자들은 일일이 인공수분해서, 비닐봉지로, 잡다한 꽃밥이 암술머리에 묻지 않도록 특수포장을 한다고 했다. 그런 다음 특별항공기에 태워 그 벼의 모를 I.R.로 보내게 되고, 거기서 일 년에 다모작(多毛作)으로 키워 ‘후대검증(後代檢證)’을 통해 우수개체를 선발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국제적인 육종학자이며 대선배 임학도였던 현신규(玄信圭,1911∼1986) 박사. 그분은 일본산 ‘리기다 소나무’와 유럽산 ‘테에다 소나무’를 교잡하여 ‘리기테에다’를 탄생시켰는데, 자랑스럽게도 그 ‘리기테에다’는 현재 유럽의 주요 경제수종이라는 사실. 당시 우리는 영어로 적힌 외국책을 들여와서, 그분의 공적과 성공사례를 읽지 않았던가. 그 글에는 ‘한국의 값싼 여성 노동력과 그분들의 정교한 손놀림이 리기테에다 탄생에 일조를 한 것 같다.’는 문장도 들어 있었다. 여성들이 사다리에 올라서서, 그 높은 가지의 꽃들에 일일이 인공수정을 했다는 뜻이다. 또 한 분의 육종학자를 난 잊을 길 없다. 저 전남대 여수 캠퍼스에 재직중인 ‘정규화’박사가 그다. 그는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메주콩[大豆] 연구에 미쳐, 혼기마저 놓치고 나이 서른여섯에 결혼한 분이다. 그리고 미국 ‘일리노이 국제 대두연구소‘에서도 근무했다. 그 메주콩이 인연이 되어, 나는 그분을 기리는 수필도 적은 바 있다.바로 ‘돌콩박사’가 그 작품이다. 그리고 얼굴도 한번 뵈온 적 없으나, 10여 년 동안 e메일 등으로 교신(交信)하고 있다.
이제 내 이야기를 총정리해야겠다. 우리가 맡는 바닐라향, 우리가 주식으로 여기는 쌀, 우리가 키우는 산야의 ‘현사시나무’와 ‘리기테에다’, 우리가 담그는 메주의 메주콩 등이 저절로 생긴 게 하나도 없다. 에드몬드, I.R. 연구원들, 현신규, 정규화 등 숱한 육종학자들의 피나는 노력 끝에 얻어진 것들이라는 거. 그들 모두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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