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2) -중년기
줄(2)
-중년기-
윤근택(수필가)
참말로, 그것은 줄이었어요. 끄나풀이었어요. 어떤 노인은 돋보기안경을 끼고 흔들의자에 앉아,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어요. 쓸쓸하기만 한 전설을요.
중년기
대략 일생을 이렇게 구획한다는 거 아녜요. 초년은 0~29세, 청년은 20대 전후, 중년은 30~49세, 장년은 50~69세, 말년은 70세 이상.
노인은 중년기에도 숫제 ‘바람돌이’였어요. 가족을 떠나 이곳, 저곳 오지(奧地)로 자원(自願)해서 전근을 가곤 하였어요. 핑계가 제법 되었어요.
“이번엔 승진하여 경북 영양으로 발령났기에... .”
사실 도망다닌 거였어요. 그 도망은 번거로운 도시생활로부터 도망이기도 하였지만, 보다는 어느 여류 수필가와 밀애(密愛) 끝에 입고 입힌 상처를 다스릴 길 없어 집을 떠난 거였어요. 맨 처음은 상실의 아픔을 달랠 길 없어, 연인과 팽팽하게 맞잡고 당기거니 밀거니 하던 ‘끄나풀’을 잔인하리만치 놓아버리고 그렇게 떠났어요. 그 첫 번째 오지에서, 누가 버려놓은 농가(農家)에서 솥걸고 군불지피며 정확히 2년을 견뎠어요. 봄,여름,가을,겨울,봄,여름,가을,겨울. 그렇게 맞은 여덟 계절과 24개월. 계절의 순환은 화투장48장에 그려진 그림 그대로였어요.
그 노인은, 그때 자신의 생활모습이 화투장에 투영되었어요. 실제로, 화투장 48장에 나타난, 유일한 인물‘우산 쓴 영감 ’은 실존인물이었다는 거 아녜요. 일본의 선사(禪師)였는데, 그는 득도에 실패하자, 하산하는 길이었어요. 우산을 쓰고 개울가에 이르자, 개구리가 폴짝폴짝 뛰어오르고 있었어요. 그 개구리는 풀잎에 맺힌 이슬을 따먹기 위해 거듭거듭 뛰어올랐어요. 선사가 그제야 깨달음을 얻었어요.
‘ 저 미물(微物)도 저처럼 실패에 굴하지 않거든,하물며 인간이 내가... .’
그 선사는 도로 산으로 올라갔고, 온갖 꽃과 새들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드디어 득도를 했대요.
후일, 이 글에서 소개하는 어떤 노인은 그 이야기를 묶어 ‘화투 시리즈’를 적었고, 그 ‘화투’가 든 수필집 <이슬아지>를 펴낸 적도 있었어요.
노인은 당시 그 선사와 달리, 득도를 하지 못하고, 그 질긴 ‘인연의 줄’도 완전히 놓지 못한 채 또다시 길을 떠났어요. 물편 ‘영덕’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또 다른 여성과 ‘인연의 줄’을 잡고 그야말로 불꽃 튀기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요.
고통을 감내코자 또 다시 고통을 택하고만, 어리석기 그지없는 중년의 남정네였어요. 참말로, 멀리 두고온 가족들은 안전에도 없었어요. 그 남정네의 양 눈에는 허공에 나부끼던 거미줄이, ‘유화(柳花) 솜실’이 들어가 앞을 온통 흐렸던 거였어요.
‘오, 안타까웠던 일이여! 가족은 물론이려니와 당사자 등 많은 이들한테 남겼던 상처여!’
지금 그 노인은 돋보기안경을 끼고 흔들의자에 앉아,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어요. 쓸쓸하기만 한 전설이여요. 노인은 돋보기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눈가에 맺힌 물기를 훔쳐내고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 구질구질했든, 천했든, 육욕적(肉慾的)이었든 사랑은 사랑이었어요. 작은 상처를 달래기 위해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낸 ‘인연의 줄’이었어요.
노인은 빛바랜 자신의 두 번째 수필집 <이슬아지>를 다시 펼쳐보고 있어요. 미친 사람처럼, 신들린 사람처럼 하룻밤 사이에 한 편 두 편씩 마구 적어대어 고작 석 달 만에 써서 만든 책이어요. 중첩된 실연의 아픔 감내키 어려워 그렇듯 글을 적었다네요.
잠시 노인은 지긋이 눈을 감고 생각해요.
‘그 누군가를, 그 무엇을 지독스레 사랑하지 않고서는 한 줄의 글도 제대로 쓸 수는 없어. 그건 진실이야! 그런 점에서 요즘 젊은 것들이 적은 수필은 수필도 아니야! 한낱 감정의 부유물(浮遊物) 혹은 ‘뜨물’에 지나지 않은 것들을 글이라고 적어대니 말이야!’
노인은 후진 수필가들과 수필작가지망생들한테 강권하네요.
‘ 프란츠 리스트가 지은 ‘사랑의 꿈’ 노랫말처럼 목숨 붙어 있는 한 사랑하라. 설령, 불행이 따르더라도 더 늙기 전에 사랑하라.’
문득, 노인은 젊은 날 그리도 소주 안주로 즐기던 마른 오징어를 잘근잘근 씹었으면 싶어 한다. 하지만 하지만, 어금니마저 다 빠져 달아났으니... .
노인은 가을햇살 아래 여태 흔들의자에 몸을 의지한 채 그 질기기만 하였던 ‘인연의 줄’ 생각에 잠겨 있다.
작가의 말)
이 글은 곧 ‘줄(3)’으로 이어질 겁니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 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