괭이밥은
괭이밥은
윤근택(수필가)
괭이밥은, 산이나 들이나 집 안팎 빈터에 잘 자라는 풀이어요. 풀이기는 하지만, 키가 작아 크게성가시지는 않아요. 당신, 내가 너무도 사랑했던 당신. 당신은 당신의 아파트 베란다에서도 흔히 볼 수 풀꽃이어요. 당신이 키우는 화초의 화분에도 저절로 잘 자라나니까요. 심지어, 당신이 부부간 금슬(琴瑟)을 생각하며 가꾸는 ‘옥살리스(oxalis)’ 즉 ‘사랑초’의 화분에도 저절로 자라나는 풀꽃이어요. 아주 자잘한 노란 꽃을 피우는 풀꽃이어요. 실은, 그 ‘옥살리스’도 괭이밥의 속명(屬名)이기에, 괭이밥의 일종일 뿐이어요. ‘옥살리스 마르티아나’든지, ‘옥살리스 카노바’든지, ‘옥살리스 로제아’든지요.
사랑했던 나의 당신께서는, 재치로운 당신께서는, 위와 같은 나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그 괭이밥의 습성을 금세 깨닫겠지요. 당신이 가꾸는 그 옥살리스와 마찬가지로, 괭이밥도 밤이면 석 장의 그 작은 잎이 각각 반으로 접혀 잠을 잘 거라고요. 맞아요. 당신께서는 밤마다 그 옥살리스의 잎처럼 낭군의 팔을 베고 곤히 잠들 텐데, 괭이밥도 그러해요. 반면, 감성이 지나치리만치 풍부한 나는, 숱한 불면의 밤으로 이어지는데, 괭이밥의 습성을 똑똑히 보았어요. 앙징스러우리만치 작은, 하트 모양의 세 잎이 반절씩 접혀 자는 걸 똑똑히 보았단 말이어요. 아니, 곱게 포개서 잠들더군요. 들깨잎, 명아주잎 등도 밤마다 잠을 자기는 하지만, 괭이밥과는 사뭇 달라요.
괭이밥은, ‘고양이(괭이)의 밥’이란 뜻이어요. 진짜로 고양이가 즐겨 먹는 풀인지는 모르겠어요. 젊은 날 내가 찾아간 적 있는 독도, 그곳에는 특산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했어요. 그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마치 고양이 소리 같다 하여서 ‘괭이갈매기’라고 하더군요. 하여간, 그 작은 들풀을 괭이밥이라고 해요. 씹으면 비타민처럼 새큼해요. 돌이켜보니, 우리의 사랑도 그처럼 새큼하기만 했어요. 어린 날 손위 누이들은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일 적에 그 괭이밥을 봉숭아꽃잎과 함께 찧었어요. 그러면 그 식초 같은 성질로 하여 봉숭아물이 곱게 든다더군요.
사랑했으며 여태껏 내 가슴에 남은 당신. 실례를 무릅쓰고, 나는 오늘 괭이밥 잎을 잎줄기째 하나 땄어요. 온 가슴으로 들여다보고 있어요. 너무도 이뻐요. 하트 모양이니까요. 낮이어요. 잎들 석 장은 포개서 잠들지 않네요. 아직 낮이라서 그러할까요? 아니면 내가 훼방꾼이 되어서 그러할까요?
사랑하는 당신, 나는 문득 ‘자귀나무’의 잎도 생각해요. 아카시나무와 달리, 짝수깃꼴겹잎[偶數羽狀複葉]인 자귀나무. 내 젊은 날 대학시절, 수목학을 강의하셨던 노은사(老恩師)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일러 주었어요.
“자-자네들 말이여, 자-자귀나무는 본디 ‘자기나무’에서 온 이름이여. 그 짝수인 잎들이 잎줄기를 기준으로 밤이면 한 쌍 한 쌍 모조리 포개서 자거든. 그러니 ‘(잠)자기나무’인 거여. 그래서 신혼부부 뜰에 즐겨 심었다구. ”
내 가슴에 남아 있는 당신, 괭이밥의 꽃말은 ‘빛나는 마음’이어요. 또, ‘당신을 버리지 않음’이기도 해요. 나는, 나는, 참말로, 당신을 끝끝내 버릴 수 없어요. 당신은 나한테서 신기루처럼 사라졌지만, 내 ‘마음은 언제 빛나’는 걸요.
작가의 말)
나는 또 새롭게 시도한다.
‘미니멀리즘(minimalism) 수필’ 창작을 시작했다. ‘미니멀리즘’이란, ‘최소한’의 의미를 지닌 예술용어다. 재료 즉 소재를 최소화해서 수필작품을 한 동안 적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다시 고백하건대, 나는 편편의 수필작품을 빚을 때에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한테 최초로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해서, 모든 열정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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