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괭이밥은

윤근택 2017. 8. 26. 10:25

괭이밥은

                                                                                                     윤근택(수필가)

            (yoongt57@hanmail.net)                                                  

괭이밥은, 산이나 들이나 집 안팎 빈터에 잘 자라는 풀이어요. 풀이기는 하지만, 키가 작아 크게성가시지는 않아요. 당신, 내가 너무도 사랑했던 당신. 당신은 당신의 아파트 베란다에서도 흔히 볼 수 풀꽃이어요. 당신이 키우는 화초의 화분에도 저절로 잘 자라나니까요. 심지어, 당신이 부부간 금슬(琴瑟)을 생각하며 가꾸는 옥살리스(oxalis)’ 사랑초의 화분에도 저절로 자라나는 풀꽃이어요. 아주 자잘한 노란 꽃을 피우는 풀꽃이어요. 실은, 옥살리스도 괭이밥의 속명(屬名)이기에, 괭이밥의 일종일 뿐이어요. ‘옥살리스 마르티아나든지, ‘옥살리스 카노바든지, ‘옥살리스 로제아든지요.

사랑했던 나의 당신께서는, 재치로운 당신께서는, 위와 같은 나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그 괭이밥의 습성을 금세 깨닫겠지요. 당신이 가꾸는 그 옥살리스와 마찬가지로, 괭이밥도 밤이면 석 장의 그 작은 잎이 각각 반으로 접혀 잠을 잘 거라고요. 맞아요. 당신께서는 밤마다 그 옥살리스의 잎처럼 낭군의 팔을 베고 곤히 잠들 텐데, 괭이밥도 그러해요. 반면, 감성이 지나치리만치 풍부한 나는, 숱한 불면의 밤으로 이어지는데, 괭이밥의 습성을 똑똑히 보았어요. 앙징스러우리만치 작은, 하트 모양의 세 잎이 반절씩 접혀 자는 걸 똑똑히 보았단 말이어요. 아니, 곱게 포개서 잠들더군요. 들깨잎, 명아주잎 등도 밤마다 잠을 자기는 하지만, 괭이밥과는 사뭇 달라요.

괭이밥은, ‘고양이(괭이)의 밥이란 뜻이어요. 진짜로 고양이가 즐겨 먹는 풀인지는 모르겠어요. 젊은 날 내가 찾아간 적 있는 독도, 그곳에는 특산 갈매기들이 끼룩끼룩했어요. 그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마치 고양이 소리 같다 하여서 괭이갈매기라고 하더군요. 하여간, 그 작은 들풀을 괭이밥이라고 해요. 씹으면 비타민처럼 새큼해요. 돌이켜보니, 우리의 사랑도 그처럼 새큼하기만 했어요. 어린 날 손위 누이들은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일 적에 그 괭이밥을 봉숭아꽃잎과 함께 찧었어요. 그러면 그 식초 같은 성질로 하여 봉숭아물이 곱게 든다더군요.

사랑했으며 여태껏 내 가슴에 남은 당신. 실례를 무릅쓰고, 나는 오늘 괭이밥 잎을 잎줄기째 하나 땄어요. 온 가슴으로 들여다보고 있어요. 너무도 이뻐요. 하트 모양이니까요. 낮이어요. 잎들 석 장은 포개서 잠들지 않네요. 아직 낮이라서 그러할까요? 아니면 내가 훼방꾼이 되어서 그러할까요?

사랑하는 당신, 나는 문득 자귀나무의 잎도 생각해요. 아카시나무와 달리, 짝수깃꼴겹잎[偶數羽狀複葉]인 자귀나무. 내 젊은 날 대학시절, 수목학을 강의하셨던 노은사(老恩師)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일러 주었어요.

-자네들 말이여, -자귀나무는 본디 자기나무에서 온 이름이여. 그 짝수인 잎들이 잎줄기를 기준으로 밤이면 한 쌍 한 쌍 모조리 포개서 자거든. 그러니 ‘()자기나무인 거여. 그래서 신혼부부 뜰에 즐겨 심었다구. ”

내 가슴에 남아 있는 당신, 괭이밥의 꽃말은 빛나는 마음이어요. , ‘당신을 버리지 않음이기도 해요. 나는, 나는, 참말로, 당신을 끝끝내 버릴 수 없어요. 당신은 나한테서 신기루처럼 사라졌지만, 마음은 언제 빛나는 걸요.

작가의 말)

나는 또 새롭게 시도한다.

미니멀리즘(minimalism) 수필창작을 시작했다. ‘미니멀리즘이란, ‘최소한의 의미를 지닌 예술용어다. 재료 즉 소재를 최소화해서 수필작품을 한 동안 적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다시 고백하건대, 나는 편편의 수필작품을 빚을 때에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한테 최초로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해서, 모든 열정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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