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발표작

수필시학의 실재/박양근(수필가/비평가/부경대 영문학과 교수)

윤근택 2014. 4. 12. 02:26

 

수필시학의 실재

-     메타수필과 실제수필-            

   

 

 박양근(수필가/문학비평가/부경대 영문학과 교수)


 
이 글은 <<월간문학>> 2014 4월호 354~356쪽에 실린 그분의 글을 옮겨왔음을 미리 밝혀둔다. 윤요셉

 

수필의 문학성과 수필 요건은 동일한 의미인가. 아니면 수필을 다른 장르와 구별하기 위하여 철학성과 사회성이 본연의 가치라고 말하려 하는가. 그 경계의 좌표가 없이 수필을 논하고 수필을 평가하는 게 가능한가. 이제 이러한 논쟁은 수필의 대중성과 마음대로 붓 론을 떠나 시급하게 다루어야 하는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수필의 좌표라는 수필미학과 수필시학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수필이론가들이 먼저 체계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문제이지만, 수필가 개개인들도 진지하게 숙고하여야 하는 화두라고 하겠다.

한국에서 수필이 여전히 이론의 빈혈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수필은 여기(餘記)라는 비이론적 사설(私說)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만큼 수필에 대한 이론적 연구가 가능한 잠재성을 가진 경우도 별로 없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신변적 노트에서 벗어나 미적 구조를 이루려는 진지한 작법이 확산되고 있다. 작가는 창작한다. 비평가는 작가의 작품에 대하여 장단점을 이론에 근거하여 설명한다. 창작이 비평보다 우선하지만 사실은 메타수필이라는 원형적 구조가 먼저 제시된다. 메타수필이란 수필작품으로 구체화하기 위하여 작가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추상적 구도를 말한다.메타수필에 대한 개념을 지닌 작가는 그렇지 못한 작가보다 문학성과 미학성을 달성하기 쉽다. 비평가도 메타성과 작품의 문학성을 분석하여 작품의 질량을 재는 것이다. 그 점에서 비평가와 작가는 갑을 관계가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 위에 놓여진 운명의 동반자라고 말할 수 있다.

 2월호(3월호의 오기인 듯함.)에 발표된 16편의 작품 중에서 나름의 수필시학과 메타성이라는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작품으로 최원현의 응시,윤근택택의 문고리, 황을문의 죽부인, 강석호의 겨울의 기억, 최건자의 지리산의 교훈, 노혜숙의 편도티켓, 강선영의 데브짱 7편이다. 다른 작품은 아쉽게도 작가 나름의 강점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교과서적 기법에 충실한 것은 좋으나 모조된 건축물이 예술성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앞서 거론한 좋은 작품들은 제재에 대한 사유와 의미화 외에 형상화를 위한 언어와 문체와 문장간의 결속력이 탄탄하여 내용과 표현의 앙상블이 돋보인다.

(중략)

윤근택의 문고리는 소재와 언어 구사력이 뛰어난 결속력과 교직성을 제시한다. 단어는 개체로서는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언어가 의미론적 형태론적 교감을 이룰 때 언어는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면서 문학어로 자리잡는다. 문고리라는 전통언어가 도어록이라는 외래어와 대비되는 순간, 작가가 보낸 가난한 문고리 시절은 현대의 타락한 문고리 권력 시대와 대비를 이룬다. 전자가 순수하고 아름답고 수수한 인간계를 상징한다면 후자는 아첨과 세속과 타락이 횡행하는 인간계를 대행한다. 보잘것없는 문틀 문고리 하나로 세상의 선악을 구분해 낸 기법이 윤근택의 수필이 지닌 메타성과 미적 장치라고 하겠다.

(중략)

수필의 무형식성은 부정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무한한 형식의 잠재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 어느 작품이든 문학성을 가지려면 나름의 시학과 메타성을 확보하여야 한다. 심층적인 창작의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하는 작품과 일상적 체험을 감동스럽게 써보겠다는 작법 사이에는 분명 건너지 못하는 간격이 자리한다. 이제 수필가들은 수필미학과 수필시학의 부재를 탓하여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그만큼 공부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낼 따름이다. .

 

 

 사실 나는 그분을 직접 만난 적도 없다. 내가 1989 <<월간에세이>>를통해 수필가로 데뷔한 한 해 후인 1990년에 동일 잡지로 수필가로 데뷔한

것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분이 일찍이 나의 작품 댕기풀이 등에 관해 제법 좋은 평을 적은 바도 있다. 일종의 교감이랄까 그러한 게 둘 사이에 존재하는 것 같다. 위 글은 나의 수준에서는 제법 어렵다. 그러나 이 문장은 내 마음을 빤히 들여다 본 후 적은 듯하다.

윤근택의 문고리는 소재와 언어 구사력이 뛰어난 결속력과 교직성을 제시한다. 단어는 개체로서는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언어가 의미론적 형태론적 교감을 이룰 때 언어는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면서 문학어로 자리잡는다.

굳이 내가 쉽게 풀이하자면, 이렇다. 나는 문장간의 결속력 내지 문장간 결합력을 중시하여 왔고, 그 문장이론을 문장수련이란 시리즈물에서도 수없이 강조했다. 그분이 그러한 나의 노력을 그 작품에서 발견했을 따름이다. 어떠한 어휘가 작품에 쓰여졌을 때에 그 작품 속에서 이웃하는 어휘들과 온전히 일체를 이루어야 비로소 문학어가 된다는 거. 그분의 의견에 동의를 하는 정도가 아니다. 나는 그러한 걸 평소 중시해 왔다. , 위의 문장이나 위의 단락에서 이미 썼던 어휘나 문장이, 다시 아래 문장 또는 아래 단락에 쓰였을 적에는 어느새 그 어휘나 그 문장이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 된다는 거. 반대로 말하자면, 동일한 작품에서 그 의미가 거듭거듭 달라지게 하기 위해 어떠한 어휘를 거듭거듭 쓰게 된다. 나의 작품 바꿈에 관한 은유가 썩 좋은 예에 해당한다.

마치 작가와 비평가가 사전(事前)에 입을 맞춘 듯하다. 시쳇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인 듯하다. 하지만, 위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학자인 그분과 달리,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지름길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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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고리

   문고리 / 윤근택

   문고리/윤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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