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6)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6)
- 현대미술 중요한 감상 포인트를 알려준 작가-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그는 살아생전 이러한 말을 하였다.
“관람자와 나의 작품 사이에는 아무 것도 놓여서는 안 된다. 작품에 어떠한 설명을 달아서도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관객의 정신을 마비시킬 뿐이다. 내 작품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침묵이다.”
너무너무 멋있는 말 아닌가. 비평가들한테도 미리 초를 치지 말라고 이르는 말로 들린다. 그의 말은 천주교인인 우리들이 익힌 교리(敎理)와도 같다. 주님과 일대일 독대 내지 일체가 되는 거라고 하였다.
한편, 그는 이런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조명을 어둡게 하고, 45센티미터 거리에서 관람하는 게 좋을 것이다.”
위 두 말은 현대미술 감상법을 가장 쉽게 표현한 말인 듯하다. 그리고 현대문학작품 감상법으로도 그대로 적용할 만하다. 그가 누굴까? 바로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라트비아 태생, 미국망명자, 1903~1970)’다. 그는 이 연재물 제1화의 주인공 ‘잭슨 폴록’과, 내가 기회 닿으면 소개할 ‘월렘 드 쿠닝’과 더불어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개척한 장본인이며, 색면회화를 그린 작가이다.
그의 작품세계를 내가 설명할 수 있는 데까지 소개해 보자. 캔버스에다 두 개의 느슨한 네모꼴의 색면 두 개를 아래 위로 배치시키고, 각각의 색면에다 강렬한 색조를 입히고, 마치 동양의 수채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백 같은 걸 가장자리에다 아슬아슬 남겨둔 게 특징이다. 언뜻 보면, 캔버스에다 두 개의 네모난 색종이를 아래 위에다 각각 붙여둔 것 같다. 색종이되, 그것들은 골고루 물감이 칠해지지 않은 색종이 같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해진 양말바닥에다 원색에 가까운 헝겊을 가위로 네모지게 오려 덧대 기운 듯하다. 그러나 그 두 색면은 대치와 대비를 이루며 마치 해무리나 달무리를 연상케 한다. 여기까지 설명하면 대충 짐작이 되려나 모르겠다.
비평가들의 해설은 구구하다. 구름처럼 윤곽이 모호한, 방형(方形)에 가까운 색면을 세로로 배열했다거나, 커다랗고 모호한 색면과 불분명한 경게선으로 이루어졌다거나, 거대한 캔버스에다 기하학적 분할을 하고 반짝이는 단일색으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거나, 마치 바다와 하늘 사이의 수평선 같은 금[간극]과 강렬한 색으로 칠했다거나, 세상을 단순한 형태와 색으로 그리고 거기다가 생명력을 불어넣어 스스로 숨을 쉬게 했다거나 등등. 모두 위 단락의 내 이야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의 첫 단락 요청대로(?), 그의 색면회화에 관해서는 더 이상 내가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지는 않으련다. 대신, 그가 남긴 말들만으로도 작품해설은 충분하리라 믿는다. 정작 자기는 남들더러 이렇게 저렇게 관람하지 말라 해놓고서 할 말은 다 했던 듯하다.
어느 비평가가 악평을 하자, 그가 한 말이다.
“ 나는 내 작품에 관해 변호할 의도가 전혀 없다. 내 작품은 스스로를 방어한다.”
한마디로, 자신 있다는 말이다. 이미 이 연재물 제5화에서도 소개하였지만, 그는 1943년 ‘바넷 뉴먼’과 아래와 같은 공동성명을 발표한 적도 있다.
“ 우리에게 미술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모험이다. 그것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자들에 의해서만 탐험할 수 있다.”
그의 작가로서의 자만심은 대단했다. 1950년대에 뉴욕 시그램 빌딩 초호화 레스토랑 ‘포시즌즈’의 벽화를 의뢰 받았는데, 당시 250억이라는 거액의 계약금을 돌려준 예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 자신의 작품을 어둠침침한 데서 관객들이 제대로 감상할 수도 없을 테고, 그러면 작품의 생명력조차 잃어버리게 된다는 우려 때문이었다니… . 그 사건(?)을 기화로 더 이상 구매자가 작품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작품이 구매자를 결정하는 시대가 열렸단다. 사실 작가라면 그런 정도로 자기 작품에 관해 애착심을 가져야겠지만, 그런 정도가 못 되는 나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나는 어느 미술평론가가 그에 관해 가슴 미어지도록 호소력 있는 글을 적어둔 걸 읽게 되었다. 그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였지만, 예술도 정점(頂点)에 이르면 쇠퇴한다고 적었다. 로스코는 ‘잭슨 폴록’과 ‘드 쿠닝’과 함께 추상표현주의를 엶으로써 이전의 큐비즘(입체파)을 일시에 몰아내었지만, 그들은 얼마 아니 있어 ‘워 홀’로 대표되는 이른바 ‘팝 아트(pop art)’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노라고. 그래서일까, 실제로 그렇게 짱짱하게 나가던 로스코는 … . 그의 작품 <<White-center,1950년 >>는 ‘소더비(sotheby’s) 경매’에서 거금 7,280만 달러에 팔릴 만치 경제적 여유도 생겼던 작가다. 그러했던 그가 67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니… . 그 원인은 정확히 밝혀진 바 없으나,위에서 말했듯 자신의 예술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압박감과 절망감이 그를 앗아간 건 아닐까 하고서 잠시 혼자 생각해본다.
살아생전 로스코는 정작 자기의 작품세계에 관해 세인(世人)들과 달리 말했다.
“나는 추상주의 작가가 아니다. 그저 인간의 기본적 감정을 표현하는 데 불과하다.”
이제 이번 글을 슬슬 마무리 지어야겠다. 그의 작품은 작품대로 감상하였으며, 그가 남긴 말들을 통해서도 수필작가인 내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글을 적어나가야 할지 힌트를 얻었음에 틀림없다. 바로 위의 단락에 소개된 그의 말 가운데 ‘인간의 기본적 감정’이 특히 가슴에 와 닿는다.
l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한국디지털도서관>윤근택> 작품/논문>미발표작)’으로 찬찬히 따라가시면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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