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고태미(古態美)를 생각함

윤근택 2017. 9. 21. 21:30

 

 

                  고태미(古態美)’를 생각함

 

 

 

                                                                                       윤근택(수필가)

 

시조시인 이은상은 옛동산에 올라를 노래했고, 홍난파는 그 시조에다 곡을 붙였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가곡이기도 하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 와 다시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려

 

지팡이 던져 짚고, 산기슭 돌아서니

어느 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료

 

 

세월을, 무심히 흘러간 세월을 안타까이 노래했음이 분명하다.

그런가 하면, 일전 나는 섀시(chassis) 시공 전문가친구를 도와, 어느 아파트 유리창호 갈이를 한 적이 있다. 효심이 지극한 그 댁 자제분이, 홀로 사는 91세의 노모(老母)를 위해, 큰유리창으로 갈아드려 바깥 풍경을 마음껏 즐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91세의 할머니는 연세답지 않게 정정했으며, 요즘도 자전거를 타고 시장보기까지를 한다고 했다.

할머니가 우리한테 또박또박 말했다.

살아본즉, 산은 오를수록 높고, 물은 건널수록 깊데요.”

그분도 분명 세월을 그렇게 노래하였다.

나는 벌초를 하려고 집안사람들과 선산(先山)에 올랐다. 그야말로 나무들이 울울창창 들어서 있었다. 소나무들은 미끈미끈하고, 그 껍질들은 잘게잘게 균열(龜裂)져 있었다. 한마디로, 고태미곧 예스럽고 수수한 모습을 자랑하는 소나무들. 그건 세월이었다. 사실 어릴 적에는 겨울이면 산토끼 올가미를 놓으려 잘도 오르곤 했던 선산. 당시는 어른들이 땔감을 장만하느라 무분별하리만치 소나무를 벴던 관계로, 우리가활가지라고 일컫던 키 작고 휘어져 못생겨먹은 소나무들뿐이었거늘... .

나의 생각은 이은상의 생각과 그 할머니의 생각과는 사뭇 다르다. 수목들이 대체로 그러하지만, 소나무도 본디 유목(幼木)일 적에는 수피(樹皮)가 매끈하다. 그리고 수간(樹幹) 즉 줄기가 제멋대로 구부러지는 예가 많다. 그러다가 차츰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람해지고 줄기가 반듯해지고 수피가 잘게잘게 거북등처럼 갈라진다. 그 모습이야말로 세월이 묻어나는 고태미이다. 굳이, 수피가 붉어 아름답다고 치켜세우는 춘양목(春陽木) 즉 금강송(金剛松)이 아닐지라도, 선산의 노거수(老巨樹) 소나무도 아름답기만 하였다. 소나무와 달리, 벽오동(碧梧桐)은 그 수피가 말 그대로 푸르고[] 매끈하다. 벽오동은 나이가 들어가도 그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그 또한 멋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주엽나무나 아카시아나무나 엄나무는 유목일 적에는 줄기에 촘촘 가시가 박혀있지만, 자라날수록 그 가시는 시나브로 떨어져 줄기가 미끈해지는 편이다. 세월 앞에 장사(壯士) 없어, 그 나무들도 까칠하던 성질이 누그러지는 모양이다.

사실 수목들의 나이 들어감이 아름다운 게 단지 겉모습 뿐만은 아니다. 대개의 수목들은 아름다운 나이테를 속에 갖게 된다는 거. 그 동심원(同心圓)의 나이테가 생겨나는 이치를 다시 생각 아니 할 수가 없다.

명색이 임학도(林學徒)였으니, 내가 다소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는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이른 봄부터 늦여름까지 자란 형성층 가운데 물관[水管]의 세포들을 춘재(春材)라 부르고, 늦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자란 그것을 추재(秋材)라고 한다. 전자(前者)는 색깔이 연하며 조직이 엉성한 편이다. 후자에 비해 속히 자란 까닭이다. 후자는 전자에 비해 색깔이 짙고 치밀한 편이다. 침엽수의 나이테는 뚜렷한 편이고, 활엽수의 그것은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4계절이 뚜렷한 곳에서 자라나는 수목의 나이테는 뚜렷할밖에. 반면, 적도 지역 수목은 나이테가 균일하지 않거나 아예 생겨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왕 등 열대지방 수목들은 나이테의 경계가 불분명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나이테는 당해 수목의 살아온 날에 관한 각종 정보를 고스란히 간직한다는 거. 그걸 주로 연구하는 학문은 연륜연대학(年輪年代學)’. 나이테는 기후변화를 알려주는 환경정보를 지닌다. 한발(旱魃),충해(蟲害) 등의 정보. 그런가 하면, 나이테는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기도 하다. 깜깜한 밤일지라도, 나이테의 동심원이 성긴 쪽이 동쪽이라는 사실. 그쪽으로 많이 자라므로. , 나이테는 연대(年代)를 알려주는 하드디스크이기도 하다. 1964년 캘리포니아 하이트 마운틴브리틀 콘 파인(Britle cone pine)’이란 소나무를 연구차 벴다고 한다. 그러고서 나이테를 새어보니, 무려 4,844개였다는 거 아닌가. 줄잡아 5천 살이 된 나무로, 세계에서 가장 나이 많은 나무로 기록되고 있다. 우리들 임학도들은 수령(樹齡)을 측정하는 방법도 익혀야만 했다. ‘생장추(生長錐;increment borer)’라는 일종의 송곳으로 나무 줄기를 뚫으면, 그 생장추에 질서롭게 나이테가 켜켜이 모이게 되었고, 그 목편(木片;core)을 낱낱이 세어봄으로써 나무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었다. 사실 수목의 연령을 측정하는 방법에는 이밖에도 식재 기록, 레지스토 그래프(Registo-graph), 흉고직경(胸高直徑)에 의한 산식(算式) 등이 있다. 물론, 고고학자들이 종종 쓰는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도 쓰인다.

기왕에 내친걸음이니, 나이를 측정하는 방법 모두를 소개하기로 하자. 이미 이야기하였지만, 고고학자들은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을 즐겨 쓴다. 동물병원 원장이나 소전의 소장수들은 소의 나이를 이빨 모양으로 알아맞힌다. 아래턱앞니 영구치가 1개면 24~32개월, 그 이빨이 2개이면 29~37개월, 3개이면 37~47개월... . 양어장 주인이나 낚시꾼들은 물고기의 나이를 비늘 나이테로 알아맞힌다. 물의 온도가 낮은 겨울에는 비늘 성장이 느리고, 물의 온도가 높은 여름에는 비늘 성장이 빨라 그렇듯 윤문(輪紋)이 생겨난다지 않던가. 아니면 지느러미의 가시를 잘라, 그 단면의 나이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물고기의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했다.

두서없는 나의 이야기를 가다듬어보아야겠다. 나는 선산에, 조상님들 산소에서 풀을 내리러 갔다. 거기서 어릴 적에 보았던 키 작은 소나무들이 고태미를 자랑하며 우람하게 서 있음을 보았다. 장구한 세월을 보았다. 유구(悠久)한 역사를 보았다. 소나무들은 세월에 걸맞게, 나이게 걸맞게 껍질들이 턱턱 갈라져 있었다. 그것은 결코 상처가 아니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것은 세월이었다. 소나무의 고태미는 그 껍질 갈라짐의 수효와 비례하는 듯. 그 소나무껍질추출물은 햇볕 또는 자외선에 의한 피부손상으로부터 피부를 건강하게 하는 데 좋은 약으로도 쓰인다고 하였다. 어린 날에는 그 껍질로 기선(汽船)을 만들어 냇물에 띄우기도 했다. 자신은 볕에, 세월에 겨워 그렇듯 턱턱 갈라졌지만, 이타적(利他的)이라는 걸 차마 놓칠 수도 없었다. 그 소나무들이 지난날에는 다소 흐트러졌던 몸가짐들이었으나, 놀랍게도 곧게 수간이 펴져 있음도 보았다. 그것은 세월에 걸맞게, 나이에 걸맞게 반듯해지려는 소나무 나름의 본성(本性)을 찾아가는 거라고 느끼게 되었다. 순자(荀子)권학(勸學) 편에 나오는, ‘쑥이 삼밭에 있으면 붙잡아주지 않아도 곧게 자라고, 흰 모래에 개흙이 있으면 더불어 같이 검어진다.’는 가르침 그대로. 물론, 내가 벨 일도 없겠으나,소나무는 수십 개 아니 수 백 개의 동심원인 나이테를 속에 감추고 있을 것이다. 굳이, 겉으로 드러내 나이 자랑은 않으나, 아름답기만 할 연륜. ‘나이 들어감이란 그처럼 아름다워지는 거. 그 이치를 안 이상, 내 눈가에 잡히는 주름이며 내 머리에 늘어나는 흰 머리카락을 더는 서러워하지 않으리.

 

 

작가의 말)

그 어떤 소재라도 내 더듬이에 닿기만 하면, 곧바로 글로 둔갑시킨다. 오늘은 또 어떤 글을 쓸까 고민했으나, 또 해냈다. 하루를 또 잘 살았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댓글수0